136화
너에게 가는 길
두 쌍의 눈동자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쪽은 그저 심드렁하고, 다른 한쪽은 감탄 섞인 총명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근래에 모처럼 따듯해진 날씨 덕분에 장작불의 온기와 빛이 살짝 옅어졌다. 무심코 장작을 더 넣으려던 노바르는 싱긋 웃으며 제자리에 장작을 올려 두었다. 바닥에 깔아 놓은 얇은 이불 위에 앉자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오늘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호수는 지독히 잔잔해 물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덕분에 자연의 밤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다른 지역은 폭설로 고생한다고 하였는데 델피니움의 영지는 눈이 그쳤다. 이곳의 눈을 모두 끌어다 다른 곳으로 보낸 것처럼 기이한 현상이었다.
계속 이러면 좋을 텐데.
노바르가 막 그런 생각을 한 무렵에 콧등으로 무언가 차가운 것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눈송이였다. 하나씩 천천히 내리기 시작하는 눈은 다행히 거세질 기미가 보이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동화 속의 풍경 같았다.
새벽을 향해 가는 밤의 평화로운 침묵을 깨트린 쪽은 카에덴 델피니움이었다.
“애가 좀 이상하네.”
그가 지칭하는 대상이 리세트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린 노바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하늘을 보며 되찾은 마음의 안정이 금세 사라져 버렸다. 잠기운도 저 멀리 날아갔다.
“리세트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어떻게 하지요? 제가 빨리 들어가 볼까요?”
“흥분했나?”
“예?”
“달리기하면 심장이 막 빠르게 뛰잖아. 지금 좀 그러는 것 같아서.”
“달리기요? 이 밤중에요?”
“글쎄.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
그는 걱정 말라는 듯 노바르의 등을 토닥이며 장작불 옆에 꽂아 둔 꼬챙이 하나를 손에 쥐어 빼 들려고 했다. 낮에는 따듯해 땅이 조금 녹아 꼬챙이를 꽂기 쉬웠는데, 밤이 되어 살짝 기온이 낮아졌다고 그새 땅이 언 듯했다.
설탕을 뿌린 과일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지금 먹으면 알맞게 익어 맛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이 적기라는 소리였다.
몸을 쓰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가 뭐 하고 있느냐는 듯이 노바르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못 빼시는 겁니까, 안 빼시는 겁니까?”
노바르는 타박하면서도 순순히 꼬챙이를 뽑아 주었다. 가만 보면 리세트보다 이 녀석이 더 순한 것 같았다. 다루기 쉬운 건 말할 것도 없고. 꽤 쓸 만하단 말이지.
“일단 더 지켜보자. 어디로 도망가는 것 같아. 호수가 잠잠한 걸 보면 별로 위협적인 상황인 것 같지는 않거든.”
따끈한 과일 하나를 와사삭, 씹는 그의 입술은 설탕물이 묻어 반짝거렸다.
따듯한 과즙은 기대 이상으로 달콤했다. 평소였으면 맛있게 먹었을 텐데……. 이상하게 찝찝하다고 해야 하나, 필요 이상으로 달게 느껴졌다. 이것보다 훨씬 단 리세트의 쿠키도 잘만 먹었으면서.
눈이 내리는 호수는 평온했다. 은빛 마력이 옅게 감돌아 한층 더 꿈결 같게 보이는 그 호수를 보고 있는데도 썩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평화 속에 불안이었다.
❖ ❖ ❖
며칠 전만 하더라도 다툼으로 인해 고성이 오갔던 회의장은 누구 하나 죽어 나간 것처럼 적막했다.
황제에게 느닷없이 회의 소집 명령을 받은 중앙 귀족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들어찼다. 기쁨과 불안. 요한 델피니움 공작의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느낀 정반대의 감정 때문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지휘관을 모시게 되었지만 불만을 표하는 어리석은 자는 없었다. 감사하다고 고개를 조아려야 할 판국이니 말이다.
앓던 이를 뽑은 것 같은 기분에서 비롯된 기쁨. 하필이면 자신들이 어렸을 때부터 모진 일을 겪게 한 공작이 지휘관과 전략관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가져다준 불안. 다스리기 힘든 두 감정이 극렬하게 부딪쳤다.
아무리 어린 나이였다지만 공작에게 너무 많은 짐을 쥐여 준 것이 아니냐며, 이제 와 슬쩍 발을 빼는 귀족들이 더러 있었다. 자신들의 영지가 몬스터들에게 피해를 보지 않아 한발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관전하던 이들이 그 무리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치사한 사람들을 보았나! 저들도 한때는 편리하니 뭐니 함께 좋아했으면서!
위상이 대단한 공작가의 어린 가주를 제 입맛에 맞게 부렸던 귀족들의 낯빛은 허옇게 떠 마치 꼭 퍽퍽한 밀가루 반죽을 연상케 했다.
“델피니움 공작 각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한 그 남자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공작은 자신의 자리로, 황제와 가장 가까운 그곳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애초에 그가 늘 앉았던 자리이건만, 오늘따라 더 그 자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어서들 앉지. 공작도 왔으니 속히 회의를 진행했으면 하는데.”
황제의 나직한 목소리가 일제히 귀족들을 일깨웠다. 그들은 어느새 자신들의 자리에 배부된 서류를 보며 황급히 앉았다.
그 서류를 빠르게 넘기며 보고 있는데, 점차 눈길이 밑으로 내려갈수록 경악에 찬 신음을 삼켜 내야 했다. 소리를 막기는 했지만 다른 건 미처 막을 새가 없었다. 눈은 크게 뜨이고 입은 벌어진 채로 조금도 다물리지 않았다. 공작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그랬다.
“퇴로는 겐호스 산맥과 노트로라 산맥을 통할 생각입니다.”
험준하기로 정평이 난 곳을 이용하겠다는 것도 모자라 공작은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다른 곳은 몬스터들이 장악해 함정이 도사릴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설명을 들으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지만 그 까마득한 산을 넘을 생각을 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찔해졌다.
공작은 그들이 머리를 맞대 도출해 낸 전략을 따랐지만 양상이 사뭇 달랐다. 마치 공격에 사활을 건 사람처럼 보였다.
방어 계열 마법사들까지 공격에 기용할 줄 누가 알았겠나. 엄연히 분류된 계열이 있고 제 쓰임이 있는 것을!
지독히 추운 겨울의 흙으로 방어벽을 쌓으면 밀도가 높아져 위력이 세지니 그것을 높은 곳에서 동시에 떨어트린다. 물과 흙, 나무를 이용해 방어벽을 만들어 공격까지 하리라고는…….
심지어 이 정신 나간 작전은 한곳에 몬스터들을 몰아가는 게 관건인데, 공작은 본인이 선봉에 서서 이끌겠다고 했다. 그 어린 날, 그들이 공작에게 미끼가 될 것을 종용했을 때와 같은 전술에 곳곳에서 헉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전투 계열의 최정예로 편성된 선발대가 어떤 방식으로 몬스터를 공격할지 듣는 내내 그들의 입은 떡하니 벌어져 턱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공작은 공격에 미친 사람 같았다.
그야말로 공격을 위한, 공격에 의한, 오로지 공격에 전부를 건 작전이었다.
혹시 이 전쟁의 목표가 자학인가?
그들의 머릿속에 공통된 물음이 떠올랐을 때였다.
“사르도레 백작.”
공작에게 이름을 불린 그가 벌떡 일어섰다. 이 추운 겨울날에, 비록 회의장이 추운 건 아니었지만 공작의 눈빛만 마주 보아도 식은땀을 뻘뻘 흘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왜 그러십니까?”
“기꺼이 영지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식량을 저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책잡힐까 염려했던 그는 하하하, 호쾌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공작은 곧이어 안토오 자작을 호명했다.
“자작령에서 재배되는 꿀은 특히 맛이 좋고 체온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들었습니다. 그 귀한 걸 선뜻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겁니다.”
요한은 이 전쟁에 가장 크게 공을 들이고 있는 가문을 하나씩 호명해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 주었다. 반대로 끝까지 사병과 가문 소유의 부지를 절대 내놓지 않겠다며 버틴 자들에게는 신랄하게 독설을 퍼부었다. 혀를 잘린 사람처럼 그들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다행히 그 정도의 양심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껏 어느 가문에서 얼마만큼 전쟁 물자를 지급했는지 알 길이 없던 귀족들은 서로를 보며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그 시선 속에는 시퍼런 빛을 품은 칼날이 들어 있으리라.
한 발자국 물러나 제 잇속만 챙기던 귀족들은 마지못해 전쟁의 지원을 늘리게 될 터였다. 그만하면 되었다는 판단이 서 요한은 소리 없는 웃음을 짓고 일어섰다.
“이번에는 꼭, 제국이 온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힘을 써 주시길 바랍니다.”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 모두가 뜨끔한 표정으로 큼큼 헛기침을 했다. 이 주제에 한해서는 그 누구도 큰소리를 칠 입장이 못 되었으니까.
“후대에 더 이상 전쟁을 물려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여기서 끝입니다.”
그 말에 반박하는 자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슬그머니 손을 들어 반론을 제기하려던 남자도 잠자코 물러났다.
원활하게 물자를 확보했고 인원도 편성했다. 남은 건 출정뿐이었다.
여러 날짜를 뽑아 놓고 논의한 끝에 출정 날짜는 일주일 뒤로 정해졌다. 가장 우세한 건 열흘 뒤였지만 델피니움 공작이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해 삼 일이나 앞으로 당겨졌다.
일방적이었던 회의는 시작된 지 세 시간 만에 끝이 났다.
❖ ❖ ❖
일주일 뒤에 출정한다는 소식이 각 지방으로 빠르게 전해졌다.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슬픔을 감출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제국은 비탄에 빠져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집집마다, 온 거리마다, 발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서는 피 맺힌 울음이 터져 나왔다. 목 놓아 울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애끓는 비명을 토해 냈다.
앞선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과거에 매몰되어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졌다. 겨우 살아 돌아온 가족을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들은 까마득한 두려움에 잡아먹힌 채 야속한 신을 향해 눈물과 비명을 쏟아 냈다.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발 내게서 가족을 빼앗아 가지 말라며 울부짖는 소리가 매일같이 신전을 울렸다.
가족을 남겨 두고 떠나야 하는 이들의 마음은 여러 갈래로 찢겨 황폐해졌다.
모두가 힘든 시기였다.
슬픔을 감출 수가 없어 울고,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어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혹독하게 휘몰아치는 눈발도 사람들의 슬픔을 하얗게 지워 주지는 못했다.
야속한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출정식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쟁터로 떠나보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