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네가 없는 하루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길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삐를 틀어쥔 손에 실리는 불안감을 읽었는지 땅을 거세게 내려찍듯 달리던 흑마가 영리하게 속력을 줄였다.
“가끔 보면 너도 은근히 말을 안 들어.”
핀잔하는 말도 그저 좋은지 그의 말은 푸르릉 소리를 내며 애교스럽게 울었다. 둔탁하지만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고요한 길 위로 퍼져 나갔다. 땅거미가 진 지평선 너머로 공작저가 보였다. 리세트가 없는, 리세트가 사라진, 그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
서서히 가까워지는 어둠이 시야를 침잠하게 만들었다. 단지 저녁을 맞는 하늘의 빛 때문인지, 공작저가 보이는 탓인지 요한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요한은 서두르지 않는 동작으로 유유히 대문을 넘어갔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위병들에게 적절히 눈인사를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주인의 귀환을 열렬히 환영해 주듯 그들은 열을 맞추어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을 지나쳐 가던 요한의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저택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집사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은 말에서 내려와 그에게 다가갔다.
“주인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짧은 인사를 올린 로드니는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요한의 모습을 면밀히 살폈다.
“먼 길 오시느라 많이 힘드실 텐데, 하루는 푹 쉬고 움직이시지 그랬습니까.”
고삐를 넘겨받으려는 듯 그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요한은 괜찮다는 듯 미소 지으며 앞서 걸었다. 오랜만에 본 집사가 반가웠는지 말의 탐스러운 꼬리가 팔랑거렸다.
“저는 천천히 뒤따라갈 테니 주인님께서는 어서 가시지요.”
말에 오르라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요한은 슬쩍 미소 지으며 걸어갈 뿐이었다. 로드니는 조금 뒤편으로 물러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공연히 귀찮게 해 드린 게 아닌지요. 황궁에 가셨다는 건 전해 들어 알고 있었지만 너무 걱정이 되어 조바심이 났나 봅니다.”
“괜찮아.”
“중간에 몬스터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고 해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공작저에는 별일은 없었나?”
“전쟁이라는 말에 사용인들이 겁을 먹어 며칠 새 침울해지긴 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수도는 안전할 거야.”
요한은 제 옆까지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무심코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 집사는 연신 손을 쥐었다 펴고 있었다. 리세트 이야기를 물어보고 싶을 텐데. 선뜻 묻지 못하는 그 마음이 고맙고도 미안했다.
사실 요한도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좋을지 모를 뿐이었다.
간단하게 축약하기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 모든 걸 차치하고 곧장 쓰러졌다고 하면 집사도 쓰러질지도 모르지. 집사의 노쇠한 심장에 타격을 주지 않을 시작점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목욕물을 받아 놓았으니 몸을 푹 녹이고 오늘 밤만이라도 편히 쉬시지요.”
식사는 어떻게 할 건지 물으려던 로드니는 무거워 보이는 공작의 어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느새 짙어진 어둠이 내려앉은 어깨에 점점 더 많은 짐이 지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쓰라렸다.
“주인님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나는, 괜찮아.”
조용히 묻는 집사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많이 지쳐 보이십니다.”
그런가. 잘 모르겠다. 요한은 고삐를 쥐지 않은 손으로 조금 거칠어진 턱과 움푹 팬 듯한 뺨을 쓸어 보았다. 집사가 저런 말을 할 정도라면 꼬락서니가 어지간히 심각한 모양이었다.
“리세트는 괜찮아.”
곧 호수에서 나올 것이라고, 괜찮아질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요한은 태연함을 가장해 말했다. 집사가 뒤에 있다는 게 문득 다행스러웠다. 지금 제 표정을 보지 않았지만 썩 보기 좋지는 않을 게 자명하므로.
“네. 괜찮으실 겁니다. 마님께서는 꼭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앞서가던 요한의 발걸음이 돌연히 멈춘 건 막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에 당도했을 무렵이었다. 이 갈림길에서 오른편에는 정원이, 왼편으로는 저택과 이어진다. 그러니 당연히 왼편으로 돌아서야 하는데 요한의 몸은 오른쪽을 향해 돌아갔다.
다소 멍한 시선이 한 곳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멈춰 선 것에 대한 불만을 표하듯 그의 말이 고개를 움직여 고삐를 당겼지만 요한은 그 감각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머지않아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선사할 작은 새들과 탐스러운 꽃들로 가득 찰 곳. 리세트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 줄 온실이 그 길의 끝에 있었다.
❖ ❖ ❖
간단하게 씻고 나가려던 요한의 마음을 돌린 건 따듯한 수증기를 피워 올리는 욕조였다. 요한은 꽃잎과 입욕제를 푼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듯한 물이 피곤에 파묻힌 몸을 노곤하게 녹여 주었지만 도리어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 순간에도 호수의 수면 아래에 홀로 남겨져 있을 리세트가 잠시도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눈을 내리감고 있던 요한은 문득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의 그림자 밑으로 툭, 천장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떨어졌다.
손에 부드러운 것이 잡혔다. 욕조를 채운 따듯한 물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저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손을 스르륵 펼치자 짓뭉개진 꽃잎이 보였다.
수면을 둥둥 떠다니는 꽃잎은 물을 한껏 먹어 본래 간직하고 있는 빛보다도 선명하고 촉촉했다.
일부러 분홍색 장미꽃을 준비했을 집사의 배려를 보아서라도 욕조에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 꽃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은 결국 리세트이니.
물기를 닦아 낸 후 요한은 가벼운 가운을 걸쳐 입고 욕실을 나섰다. 테이블에 무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황제가 사람을 통해 보내온 것과 간단한 야참이 차려져 있었다. 읽어야 하는 문서만 가지고 침대로 가려던 요한은 옅게 한숨지었다.
한 손으로 들고 먹기 간편한 샌드위치와 차, 한 입에 넣기 수월한 크기의 조각 과일이 정갈하게 담긴 접시가 서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마치 못 본 척하지는 말라는 듯이.
무시하면 될 일이다. 무언가를 씹을 여력도 입맛도 없거니와 더군다나 속이 쓰려 물을 마시는 것조차 약간의 역겨움을 동반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얼굴들이 떠올랐다. 식사를 거르면 키가 안 크지 않느냐고 태연히 묻던 리세트와 못 본 새 주름이 늘어난 집사가.
요한은 의자를 빼 앉아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았다.
샌드위치 한 쪽을 집어 든 채로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눈길은 침착했다. 최악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보고서를 읽고 있는 사람답지 않은 눈빛은 말미에 다다랐을 때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지능을 갖춘 몬스터들은 제법 머리를 굴리며 세를 넓혀 갔다.
시작은 서부. 그곳의 가장 외진 숲에 숨겨진 동굴에서부터 시작된 움직임은 점점 거칠어졌다. 숨으려고 한 게 아니라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보란 듯이 그 일대를 휘젓고 다녔다.
인근 영지의 영주들은 자신의 봉토를 지키는 데 급급해 괜히 몬스터들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고, 방어가 최선이라며 방어 마법진을 구축해 사활을 걸고 있다는 것으로 서류는 끝이 났다.
요한은 지도에 표시된 위치를 눈으로 따라가며 펜을 들었다.
추가로 보급로로 쓸 위치를 정한 후 기꺼이 성을 내주겠다는 영주들의 수를 헤아려 작전을 구상했다.
이놈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지능을 가졌으니 뚜렷한 목적성을 띠는 행동을 보일 줄 알았는데 너무 과한 평가인 듯싶었다. 태초에 괴물로 태어나 괴물로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인간이란 그저 자연에서 살아가는 동물들보다 조금 더 번거로워 사냥의 재미를 돋우는 것일 뿐이었다.
그건 고대의 강력한 몬스터들도, 현세에 남은 것들에게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지능을 갖추고서도 불규칙적으로 약탈만 일삼는 것이겠지.
간단하게 전략을 세우고 나니 눈과 목이 조금 뻐근했다. 빼곡해진 종이를 내려다보는 요한의 손이 접시에 닿았다. 차갑고 매끈한 감촉만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빈 접시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샌드위치와 과일이 담겼던 접시 위에는 이제 포근한 불빛만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요한은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따스한 불빛이 창가로 향하는 요한의 눈동자에 스며들었지만 차가운 기운을 몰아내 주지는 못했다.
창문에 비스듬히 기대선 요한은 완성 단계에 이른 온실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오래도록 보았다.
네가 있는 곳에서는 반짝이는 별들이 보일까.
어느새 막막한 하루도 끝이 보였다.
❖ ❖ ❖
리세트는 결의를 다지듯 숨을 흡 들이마셨다. 숨을 쉬려는 노력을 굳이 기울이지 않아도 호흡하는 데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수면 밖에서 나고 자란 탓에 저절로 그런 행동을 했다.
물속에서 하기에 적합한 행동은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코로 급하게 들어온 물 때문에 캑캑거리며 리세트는 손등으로 코를 쓱쓱 문질렀다. 시원한 물이 빨개진 콧망울을 식혀 주었다.
비전 마법진에 다가가는 건 이제는 더 이상 힘든 일이 아니었다. 성질 더러운 마력의 방해를 뚫는 게 적잖이 힘들었지만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금세 도달할 수 있었다.
그 마력은 비전 마법진에 다가가지 못하게 환영을 만들어 냈다. 환영을 이겨 내면 통로가, 그 통로 끝에는 비전 마법진이 있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보여 줄까.
살아온 인생의 절반 이상을 부모님 없이 쌓아 와 그런지 마력이 이용할 추억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어제는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환영이 찾아와 제일 빠른 시간에 무찌르고 비전 마법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늘은 어떤 환영일까.
엄마가 부엌에서 특이한 맛이 나는 묽은 수프를 만들고 계실까. 흙 묻은 손을 털어 내며 아빠가 집에 돌아온 나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려 주실까.
리세트는 기울어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괜찮다는 듯이, 이런 것쯤은 별것 아니라며.
환영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엄마의 음식이 너무 먹고 싶지만 꾹 참으면 되고, 당장 달려가 아빠의 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지만 그 자리에 서서 바라만 보면 된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리세트는 의연하게 웃으며 환영을 놓아줄 줄 알았다.
무얼 보여 주든 이겨 낼 수 있어.
눈가로 열이 몰리는 듯해 리세트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물살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시원한 물도 식혀 주지 못한 붉어진 눈시울을 가려 주었다.
어디 한번 또 해 봐!
리세트는 호기롭게 외쳤다. 못내 두려운 마음은 꼭꼭 숨겨 두고서. 막막한 마음은 애써 미뤄 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