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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34)화 (134/151)

134화
추억의 맛

예상한 것보다도 수월하게 회의를 이어 가는 요한의 얼굴은 이렇다 할 표정 없이 그저 무감했다. 현 황제가 무의미한 거래를 제시하지 않아 일은 빠르고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공에게 거는 기대가 커. 잘 부탁하네.”

의례적인 인사로 황제는 그만 이 긴 회의의 끝을 알렸다.

요한은 짧은 묵례를 보낸 후 알현실을 나섰다. 그가 보아야 할 각종 자료는 즉시 사람을 불러 공작저로 가져다준다고 하였으니 따로 챙길 것은 없었다. 대리석 바닥을 밟아 가는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도 궁인들은 금세 방긋 웃으며 고개를 조아리곤 했다. 이 전쟁을 무탈하게 끝내 줄 구원자를 숭배하듯이. 마치 전쟁의 승리를 점친 것처럼 환한 미소를 보이며.

황제와의 긴 논의를 마쳤을 무렵에 요한은 원하던 것을 전부 얻어 냈다.

이번 전쟁에 차출되었어야 할 카에덴 델피니움과 노바르 로슈만을 잡음 없이 제외시켰다. 처음 그의 제안을 들었을 때 황제는 조금 언짢은 듯한 얼굴로 한숨을 쉬다 이윽고 물러나 주었다.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저 뜻이 있을 거라고, 공작을 믿는다는 말로 그 의제는 원만하게 매듭지어졌다.

아트반 크리프만을 위한 수색대도 꾸려졌다. 생각해 둔 이름을 말하자 황제는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서명하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지휘관과 전략관의 자리도 요한이 차지했다. 이제 불합리한 명령에 따르며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 그 권한마저 그가 가져왔으므로. 이번 전쟁에서 요한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게 된 셈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중앙 귀족원을 대대적으로 손볼 생각이네. 나라에는 제대로 일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해. 너무 고여 썩기 전에 잘못된 걸 바로잡고 싶군. 불법적으로 봉토를 갈취한 자들의 수가 많아. 공작도 너무나 잘 알고 있겠지만.’

전쟁을 위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던 중에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하는 황제의 의중은 명백했다. 그 뜻을 받들어 주길 바라는 것일 테지. 황제가 바라는 건 곧 요한이 바랐던 일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요한은 수색대를 꾸리는 데 반대하지 않은 황제의 내심도 읽을 수 있었다. 델피니움 공작가와 크리프 후작가를 혁명의 주축으로 삼고 싶다는 뜻이었다. 사실 두 가문은 오래전부터 중앙 귀족원의 핵심이나 마찬가지이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제 내일 있을 회의만 잘 마무리하면 된다.

귀족들은 단번에 넘어간다는 인상을 보이지 않기 위해 몇 번 무의미한 반대표를 던지겠지만, 그 끝에서는 결국 요한의 뜻에 따르게 될 터였다.

밖으로 나서자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을 발견한 흑마가 어서 달려가고 싶다는 듯이 제 고삐를 움켜쥐고 있는 이를 앞서갔다. 거의 끌려가는 수준으로 요한 앞에 당도한 궁인은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 있습니다, 공작 각하.”

요한이 말고삐를 건네받자 얌전히 기다리던 흑마가 푸르릉 소리를 내며 꼬리를 흔들었다. 짧은 휴식으로 기력을 회복한 흑마는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차가운 바람결에 머리칼이 흔들렸다. 그 감촉이 무척이나 서늘하고 따가웠다. 마치 깊고 어두운 물속처럼, 리세트가 잠든 그 호수를 떠올리게.

요한은 급하게 말을 세웠다. 이대로…… 이 길로 곧장 달려가면 공작저가 보인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더 이상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주인의 망설임을 기민하게 읽은 흑마가 불쑥 몸을 돌렸다. 지나온 길을 성급하게 되돌아가는 말을 다시 세우며 요한은 피식 웃었다.

“놓고 온 건 없어.”

황궁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 줄 알았는지 말의 순한 눈동자 가득 의문이 떠올랐다. 영리한 그의 말이 헷갈리지 않게 요한은 말 머리를 돌려 주는 것으로 간명한 해결책을 주었다.

윤기 나는 흑색 갈기를 휘날리며 말은 광장으로 내달렸다.

❖ ❖ ❖

요한은 광장 진입로에서 말을 맡긴 후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에 와 달리 무엇을 할 것도 없으면서. 어째서 온 것인가.

해소되지 못할 의문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창백한 햇살이 비춰 드는 거리를 그저 묵묵히 걸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로브 자락을 흔들었다.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광장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을 보고 온 듯이 고요하고 또 음습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름 때만 해도 활기를 띠었던 사람들의 표정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웃음과 희망찬 말들로 붐비던 거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며 종종걸음을 쳐 따라갔고, 어른들은 미처 아이들의 예민하고 여린 마음을 돌보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식료품을 가득 안고서 추운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전쟁의 두려움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살며시 시선을 떨군 채로 요한은 추위에 언 바닥을 보며 걸었다. 의식하지 못한 새 문득 걸음을 멈추어 세우고 고개를 들자 실소가 흘러나왔다.

어느 상점의 커다란 유리창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걸까. 문을 열지도 않았을 텐데.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다시 돌아가려던 요한의 걸음을 붙잡은 건 딸랑,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종이었다.

겨울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영업을 중단하는 그 상점의 문이 열려 있었다. 이곳을 알게 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손님.”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나서야 요한은 자신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그가 주문하기도 전에 주인이 먼저 아이스크림을 건넨 것이다. 이상해 빤히 바라보자 주인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바닐라 맛이 아닌가요? 그새 입맛이 바뀌셨나?”

그냥 받으면 되는데. 그나마 단맛이 덜해 먹던 것일 뿐, 달리 좋아하는 것도 없는데. 아니. 애초에 이걸 먹으러 올 생각도 없었는데 언제 들어온 거지.

“……초콜릿 맛으로.”

“그래요? 알겠습니다.”

힘차게 아이스크림을 크게 퍼 올린 주인은 작은 컵에 꾹꾹 눌러 담았다. 혀를 마비시킬 정도로 단 초콜릿 맛. 리세트가 좋아했던 그 맛의 아이스크림이 차곡차곡 쌓였다.

돈을 건네려는 요한에게 주인은 손사래 치며 거절했다.

“나중에 꼭, 다시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손님.”

투박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주인의 뺨이 멋쩍은 듯 붉어졌다.

상점을 벗어나 꽤 오랜 시간 걸었지만 그의 모습은 오래도록 요한의 뇌리에 머물렀다. 입 안을 온통 초콜릿 맛으로 적셨을 무렵 정처 없이 걷던 두 다리가 멈추었다.

분수대가 보였다.

❖ ❖ ❖

리세트는 뾰족하게 치뜬 눈으로 파란빛의 마력을 노려보았다. 환영을 만들어 꿈에 가둬 버리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뺨을 찰싹 때리고 도망가는 몹쓸 짓을 반복하는 저 마력이 리세트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아 힘껏 잡아끌었다.

머리통을 뽑고 싶어 저러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제 모습이 우스워 리세트는 뽑힐 것 같은 머리카락을 붙잡고 버텼다.

저리 안 가?

어디서 감히 명령을 하냐는 듯이 마력이 회오리를 치듯 둥글게 몸을 말아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당겼다.

새파란 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것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마력 같으니라고!

그것 말고는 도무지 이 마력의 장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성격은 못돼 먹었지,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 하지, 사람을 골탕 먹이는 걸 즐기고 울리는 걸 좋아하고. 하여튼!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리세트가 요동치는 마력을 붙잡아 찰싹, 뺨을 때리듯 치자 물살이 잠잠해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력을 후려쳤다. 단단히 토라졌는지 마력은 은색 구체로, 리세트의 마력이 만든 그 공간으로 쏙 들어가 몸을 숨겼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씩씩대며 어깨를 들썩이는 리세트의 입과 코에서 물방울이 퐁퐁 솟아났다. 대답하듯 파란빛을 한껏 뿜어낸 마력은 그 뒤로는 잠을 자는 듯 조용하기만 했다.

하필 그 빛이 남긴 여운 때문에 리세트의 눈꼬리가 밑으로 축 내려갔다. 안 그래도 잊히지 않던 요한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 탓이었다.

저 성질 고약한 마력과 한바탕 힘겨루기를 하고 나자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요한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수도로 가고 있겠지?

갑자기 울적해져 리세트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물속이라 그리 빠른 동작은 아니었지만 그 움직임을 따라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뺨을 찰싹거렸다.

리세트는 주위가 잠잠해진 틈을 타 조금씩 자신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못된 마력은 진이 빠져 조용해졌으니 비전 마법을 부수러 갈 차례였다.

❖ ❖ ❖

시원하게 물줄기를 쏘아 대던 분수대도 겨울잠에 들어간 듯 조용했다. 요한은 그 앞에 서서 묵묵히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먹는 걸까.

단맛이 혀를 난도질할 것처럼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차가운 계곡물에 내던져진 것처럼 입술이 파르르 떨리다 경직되어 갔다.

몸서리치면서도 요한은 꿋꿋하게 한 입 한 입 꼭꼭 씹었다. 겨울이라 아이스크림이 잘 녹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딱딱하게 어는 것 같기도 했다. 턱을 움직일 때마다 모래를 씹듯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옆으로 시선을 돌린 요한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한순간도 요한의 머릿속을 떠나가지 않던 리세트가 그곳에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린 모습으로, 이 차가운 길 위에 나타났다. 붉은색 리본이 눈에 띄는 아카데미의 교복을 입은 채였다.

머릿속이 그려 내는 환상이라는 걸 알지만 너무나도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워 요한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이스크림을 처음 먹어 본다며 한껏 들뜬 아이는 초콜릿 빛으로 입술을 물들이고서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벌써 다 사라졌다고, 햇볕이 너무 뜨거워 녹아 없어진 거라며 슬퍼했다. 입술에 흥건하게 증거를 남길 정도로 맛있게 먹어 놓고서.

귀여운 아이가 선명하게 떠오를수록 요한의 손동작이 빨라졌다.

다시 아이스크림을 사 가지고 오겠다며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요한을 분수대에 남겨 두고 훌쩍 떠나간 아이의 모습이 멀어지자 요한의 손도 멈추었다. 산처럼 쌓인 아이스크림은 사라진 후였다.

어느새 해가 사라져 하늘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달이 뜰 것이다.

광장 초입에서 말을 건네받은 요한은 뒤늦게 몰려온 피로감을 떨치듯 눈을 살며시 감았다 떴다. 흑마는 날렵한 동작으로 공작저를 향해 갔다.

이 길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영지에서 수도로 올 때의 여정보다도 훨씬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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