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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33)화 (133/151)

133화
얼굴

몇 날 며칠 쉬지 않고 달린 강행군에도 종마는 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는지 지친 기색 한 번 내비치지 않고 빠르게 달렸다. 몸놀림이 날랜 흑마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길을 누볐다.

목적지에 다다른 요한은 말의 허리를 허벅지로 강하게 조이며 고삐를 당겨 잡았다. 안정적으로 멈춰 선 말은 마치 앞으로 달려 나갈 태세를 하듯 앞발로 쿵쿵 힘차게 땅을 내려찍었다.

투레질을 하는 말의 갈기를 손으로 빗겨 주자 흥분감에 젖어 있던 말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흙먼지가 보얗게 일었던 길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황성 문을 지키던 위병들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세상에, 델피니움 공작 각하?”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확보되었을 때, 누군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보초를 서던 위병들은 그제야 그를 알아보고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불시에 뺨을 맞은 듯 아직도 얼떨떨하지만 틀림없는 요한 델피니움 공작이었다. 공작 가문의 문양을 새긴 파란색 로브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는 듯이.

“아니, 어떻게 이런…….”

두 눈 멀쩡히 뜨고 있어도 그들은 선뜻 믿을 수가 없어 서로를 곁눈질했다.

델피니움 공작을 반드시 데려오고야 말겠다는 사명을 안고 떠난 로반 백작이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공작이 먼저 성문에 당도했다. 도대체 어찌 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공작의 표정을 보아하니 어서 비켜서야 할 것 같았다.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입을 닫고 길을 터 주는 게 상책이었다.

가볍게 고삐를 치며 공작은 유유히 그들을 지나쳐 갔다.

“델피니움 영지에 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공작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누군가 참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대답을 주지 못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다급해 보였던 공작의 얼굴만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 ❖ ❖

군수 물자와 용병을 고용해 추가로 확보한 병력을 확인하던 황제는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신음하며 고개를 들었다.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어 읽고 있던 서류는 손에서 떠나보냈다.

웅성거림이 커지다 한순간 조용해졌다.

이 소란의 원인을 알려 줄 이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시종이 허겁지겁 그에게 뛰듯이 걸어왔다.

“대체 웬 소란이지?”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선 황제의 입에서는 고운 소리가 나가지 못했다. 언짢은 그의 분위기를 읽지 못했는지 시종은 부산스럽게 고개를 털었다.

“고, 공작이…… 델피니움 공작이 알현실로 들었습니다, 폐하.”

가느다랗게 당겨지던 긴장의 끈이 탁 풀리는 듯해 황제는 피곤에 절은 눈을 끔뻑거렸다.

“로반 백작과 착각한 게 아니고?”

“아닙니다. 공작이 왔습니다. 제가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황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델피니움 공작이 알현실에 있다니. 그의 소식을 들고 와야 했을 로반 백작은 어디로 가고 공작이 먼저 왔단 말인가.

별생각이 다 들었다.

정당하게 휴가를 받고 떠난 이를 억지로 불러들이는 데 너무 화가 나 로반 백작을 죽이기라도 했나. 설마, 그런 일은 아닐 테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망상이 정말이지 한심스러워 그는 요란스럽게 헛기침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델피니움 공작이 무척 어려웠다. 요한 델피니움이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랬다.

그 옛날에는 그저 어린아이가 너무 어른스러워 대하기 껄끄러웠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어른들의 말에 토를 다는 법이 없던 그 애를, 다른 귀족들은 다루기 쉬운 강력한 검이라며 좋아라 했지만 그는 달랐다. 그 또한 처음에는 다른 이들의 견해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찜찜하고 거북스러웠다.

열두 살의 요한 델피니움은 어린아이가 짊어지기에는 말도 안 되게 위험 부담이 큰 일을 군말 없이 받들었다. 열세 살이 되어도, 더 흘러 열일곱, 흐르고 흘러 성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쯤은 싫은 소리를 할 법도 한데, 누가 보아도 부당한 명령일지라도 어긴 적이 없었다. 반론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되고 공작위를 승계하게 되었으니 그런 것이라고, 그 아이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모르겠다.

황제는 살아 있는 사람의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 무감한 눈동자를 마주하는 게 곤욕스러웠다. 사람인가 싶게 잔혹하고 냉정했던 선대 델피니움 공작보다도 그 어린아이를 마주 대하는 게 껄끄러웠다.

그렇지만 제국을 위해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를 영지에 남겨 두고 수도에 돌아온 사람이 아닌가.

아, 그렇지!

번뜩 뇌리를 스친 생각에 황제는 완벽하게 불안을 털어 내고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임신한 공작 부인. 태어날 아기. 그들의 평안한 삶을 위해서, 아이에게 평화로운 세상을 선물해 주고 싶어 그런 것이지 않겠나. 어쨌든 공작은 누군가의 남편이자 곧 아버지가 될 사람이니 말이다.

좋게 생각하려고 하니 모든 게 다 좋게만 끝날 것 같았다.

불안감 따위는 저 멀리 날려 보낸 황제의 얼굴이 기쁨의 빛을 띠자 시종도 그제야 생긋 웃으며 물러섰다.

기쁨에 함빡 젖어 있던 황제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건 막 알현실의 문을 열었을 때, 델피니움 공작의 얼굴을 본 그 순간이었다. 의자에서 일어선 공작은 예의를 갖춘 묵례로 그를 맞이했다.

“……공, 자네 얼굴이…….”

누군가를 죽인 것인가. 아니면 죽이기 위해 온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대체 저 얼굴을 무어라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담금질을 수십 번 해 잘 벼린 칼날처럼, 마치 피가 흥건하게 묻어 예리하게 번뜩이는 검신처럼 공작의 눈빛은 날이 서 있었다. 도저히 사람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불충을 용서하시지요.”

한껏 예의를 차린 말과 그 눈동자의 괴리감에 말문이 턱 막혔다. 공작이라는 든든한 검을 얻은 듯해 기뻐하던 불과 몇 분 전이 다 거짓인 양 황제는 거칠게 갈라진 입술을 혓바닥으로 쓸었다.

기뻐할 상황이 아니었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보아하니 수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여독을 풀 시간도 필요하지 않겠나?”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오는 길에 다 풀어 괜찮습니다.”

“……그런가? 뭐가 그리 급하기에 공이 웬일로 알현 신청도 하지 않고 바로 찾아온 거지?”

“로반 백작까지 보내신 폐하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급하게 오는 길입니다. 저 또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황제가 입술을 미처 떼기도 전에 공작의 말이 치고 들어왔다.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끼이익, 평소에는 소리가 나지 않던 문이 닫히기 싫다는 듯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 황제는 섬뜩했다. 저도 모르게 등 뒤로 손을 허우적거리며 문손잡이를 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문은 굳게 닫혀 버린 후였다.

❖ ❖ ❖

황제는 원목의 커다란 책상 위에 지도를 펼친 후 요한에게 각종 보고서와 회의 자료를 넘겨주었다. 따듯한 찻잔이 차갑게 식어 갈 때까지 그간의 상황을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했다.

예상 격전지는 서부 지역. 몬스터들이 밀려나 터를 잡은 그곳이었다.

이미 결론이 난 회의를 요한이 뒤집을까 전전긍긍하던 황제는 그가 다른 말 않고 넘어가는 분위기라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요한은 보급로와 후방 지원 부대의 위치를 유심히 살폈다.

예전 같았으면 미쳤냐는 소리가 절로 나올 위치 선정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들의 급한 성미와 짧은 생각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공격에 치중한 선발대가 다 죽어 버리면 필패. 말 그대로 다 죽는 것이지만.

만약 지난 토벌 전쟁 때였다면 요한은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가 가장 원했던 전술이었으니.

“이번에야말로 몬스터들을 몰살하겠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우리 제논 제국에 발을 디디지 못하게 해야지요.”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말에도 황제는 선뜻 웃지 못했다.

요한은 참지 못할 것 같은 비웃음을 감추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 한심한 인간의 머릿속이야 뻔하다.

이 상황에서도 또다시 얄팍한 수를 고심하고 있는 것인가.

불과 얼음을 자유자재로 부리던 드래곤. 자연물을 매개로 마법을 펼치던 골렘. 그 외에도 상급으로 분류된 몬스터들은 오래전에 다 죽어 멸종했다. 선대들이 남긴 건 하급 중에서도 최하위의 것들. 귀찮고 번거롭지만 언제든 죽일 수 있는 몬스터들만 살려 돌려보냈다. 그놈들이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을 갖게 될 줄은 모르고서.

이번에도 또 새끼만 남기고 퇴각하라 할까. 어쩌면 그럴 수도.

그만 찻잔을 내려놓는 요한의 눈동자는 한심스러워하는 속내와 달리 잠잠한 빛을 띠었다.

“그래. 이번에는 꼭, 그리해 주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니.”

결연한 황제의 눈빛은 선황보다는 총기가 돌았다. 아직 이 제논의 명줄이 끊어질 때가 아닌 듯 보였다. 요한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그 뜻에 화답했다.

확답을 받았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갈 차례였다.

“수색대를 따로 편성하겠습니다. 크리프 후작이 그 목표입니다. 조사원들이 모두 죽었다고는 하나 아직 그만 발견하지 못했지요. 어딘가로 피신해 몸을 숨기고 있을 겁니다.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도, 연락을 보내오지도 않는 걸 보면 부상이 심각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해서 치유 계열 두 명, 전투 계열과 방어 계열에서 각각 한 명씩 차출하겠습니다.”

“공의 뜻대로 하게.”

“아직 로반 백작이 폐하를 만나 뵙지 못해 모르고 계시겠지만, 제가 지휘관과 전략관을 맡는 것으로 뜻을 모았습니다.”

“공작이, 직접 나서겠다는 말인가?”

골치 아프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잠시. 황제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좋은 것과는 별개로 두려웠다. 두려웠지만 마음이 놓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요한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 지어 보였다.

“제국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에, 최소한의 피해로 전쟁을 끝내고 귀환하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시지요.”

젊은 치기와 허황된 말로 치부하기에는 공작의 능력은 월등히 뛰어났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제국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기도 했다.

결심을 굳힌 황제는 악수를 청하듯 한 손을 내밀었고, 요한은 그 손을 맞잡는 것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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