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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32)화 (132/151)

132화
다녀올게

“음…… 가족이니까?”

저도 멋쩍은지 카에덴 델피니움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자신 없어 보였다. 슬쩍 시선을 돌리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요한은 조소를 숨길 수 없었다.

더 이상 하고 싶은 말도, 애초에 말을 섞을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제발 이만 떠나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으면서도 카에덴 델피니움은 멀뚱히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시지를 우물우물 씹는 소리만 들려오는 호숫가에 한 무리의 새들이 날아들었다. 부리의 색이 노랗고 선명한, 몸체가 큰 두 마리의 새.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새하얀 새가 다섯 마리. 가족처럼 정다운 모습으로 그 새들이 수면 위에 올라앉았다.

“저 새들은 리세트한테 아무런 영향도 안 끼치니까 그만 표정 좀 풀지? 마력으로 태워 죽이기라도 하게? 오히려 네 마력이 더 나쁜 결과를 불러올걸.”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빨리 하고 사라져.”

“나는 여기가 마음에 들어.”

이건 또 무슨 헛소리를 할 수작인가 싶어 요한의 입꼬리가 한없이 밑으로 기울어졌다.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카에덴 델피니움은 저 혼자 계속 말했다.

“리세트는 똑똑하고 착해서 좋아. 가르쳐 주는 대로 쏙쏙 흡수해. 그에 비하면 노바르는 좀 부족하긴 한데, 애가 꾀도 안 부리고 성실해. 옆에서 보면 뭘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나도 이 일이 끝나면 너희랑 수도로 가려고.”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가지?”

“미리 알려 주는 것뿐이야. 또 훼방 놓지 말라고. 하여튼 나는, 수도로 갈 거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네 마음대로 해.”

“공작저에 자주 놀러 갈 거야. 오래전이지만 내가 원래 살던 곳이기도 했으니까.”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건지 요한은 도무지 그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떠나는 순간까지도 화를 돋우고 싶은 것인가. 재미를 위해서, 궁금해서, 또다시 그런 이유 때문에?

“리세트는 좋고, 노바르는 귀여워. 가족이니까 너는 신경 쓰이고.”

또, 그놈의 가족.

언제는 그런 것에 의의를 두지 않는 듯이 굴더니. 이제 와 왜 마음을 돌린 걸까. 이 가문의 비전 마법을 파훼해 제 실력을 입증하는 것만이 저놈의 목적이 아니었나. 요한이 이런저런 생각에 몰입한 사이, 카에덴 델피니움은 피식피식 실없이 웃었다.

“예쁜 구석이라고는 셋 중에 제일 없는 네가 이토록 신경이 쓰일 줄은 나도 몰랐거든.”

“…….”

“내 삶을 통틀어 요즘이 제일 즐거워. 좀 시끄럽긴 한데 썩 나쁘진 않아. 그래서 수도로 갈 거야.”

“일일이 나한테 보고하듯 알려 줄 필요는 없을 텐데.”

“내가 아는 누구는 하루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세세하게 말하는 걸 좋아하더라고. 자기 남편한테도 열심히 종알대던데. 네가 퍽 좋아하는 것 같아서 따라 하는 거야.”

리세트를 거론하는 말을 내뱉고서 카에덴 델피니움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럴 시간이 없다. 여기서 한가롭게 노닥거리고 있었다니.

바보처럼 그의 말장난에 말려드는 기분에 요한은 그만 몸을 돌렸다. 리세트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지만 빠르게 일을 끝낸 후 돌아오면 된다. 리세트가 깨어나기 전에만. 그것보다 일찍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이 소시지 방금 구운 거라 맛있는데. 하나만 먹고 가지.”

등 뒤에서 종알대는 그를 무시한 채 요한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들을 주시하던 노바르 곁에 다가가 서자 그가 깜짝 놀란 눈으로 요한을 보았다.

볼 한쪽이 툭 튀어나와 있는 노바르가 제대로 씹지 못한 음식을 꿀꺽 삼켰다. 장작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도 음식을 삼키는 소리를 지워 주지는 못했다.

“하나…… 드릴까요?”

“아니.”

어렸을 때보다도 엉성해 보이는 놈에게 이런 부탁을 해도 될까. 문득 고민이 스쳤지만 요한은 한숨짓듯 말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이곳까지 전쟁의 불씨가 번져 온다면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리세트를 저 호수에서 건져 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기가 비전 마법을 끊지 못한 상태로 태어날 텐데요?”

“그 모든 걸 제외하고 리세트만 생각해.”

“그럼, 그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이런 부탁을 노바르 로슈만에게 하는 게 짜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연구에 미쳤으니까. 다 되어 가는 일을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을 터였다. 메이 하핀에게는 그를 막을 힘이 없지만 노바르 로슈만에게는 있다.

믿을 게 이놈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요한을 절망의 수렁에 빠트렸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부탁할게.”

“어…… 네! 잘 다녀오세요. 다치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요한은 고개를 한 번 까딱여 보인 후 걸음을 돌렸다. 어느새 해가 머리 위,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떠 있었다. 이제는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어? 저게 뭐지?”

비명 같은 카에덴 델피니움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요한은 나무에 묶어 놓은 말을 향해 걸어갔다.

“리세트, 왜 그래?”

굳이 리세트의 이름을 부르는 얕은수에 넘어가지 않으려 요한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결국은 멈추어 서고 말았다.

리세트. 리세트. 리세트.

다급하게, 혹은 다급한 척 그 이름을 부르는 카에덴 델피니움의 목소리에 요한은 끝내 굴복했다.

이를 꽉 깨물자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요한은 다시 호수로, 리세트의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 대는 그 성가신 놈에게 달려갔다.

❖ ❖ ❖

리세트의 바람을 타고 떠나간 마력은 꽃잎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호수 곳곳에 떠다니던 분홍색 꽃잎이 마력의 인도를 따라 한곳에 모였다.

리세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자신의 바로 위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밝은 햇살이 한껏 들어오던 게 거짓인 양 지금은 단단한 그늘막 아래에 몸을 숨긴 것 같았다. 예쁜 꽃잎들이 만들어 낸 그늘이었다.

개중에 꽃 모양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과 상처가 없는 꽃잎을 선별하는 작업에 애를 먹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리세트를 대신해 마력들이 힘을 모아 열심히 움직였다.

잘 다녀오라고, 꽃으로 글자를 써 보여 줄까.

말을 할 수가 없으니 꽃을 통해 마음을 전해 보려고 했다. 무엇보다 예쁘기도 하고, 무사하다는 걸 알릴 기회로 삼을 수도 있으니.

델피니움가의 마력과 싸울 때나 비전 마법을 파훼할 때를 제외하고는 조금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냈던 리세트는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싱긋 웃음 짓는 입가로 물방울이 포로롱 맺혀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처음의 원대한 계획에 차츰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글자를 만들 만큼 꽃의 양이 충분하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 꽁꽁 언 꽃과 꽃잎이 갈색으로 변한 탓에 멀쩡한 꽃잎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리세트가 고민하는 사이 호숫가로 상황을 살피러 간 마력들이 돌아왔다. 요한이 떠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고, 다급하게.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리세트의 머릿속에 처음의 계획 따위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되는 대로 꽃과 꽃잎을 최대한 그러모아 요한이 있는 곳으로 흘려 보냈다. 간절한 소망을 꾹꾹 눌러 담아서.

조심히 다녀와, 요한. 다치지 마. 아니야. 다쳐도 되니까 무사히 돌아와 줘. 아아, 모르겠어. 그래도 역시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제발 내 마음이 전해지기를. 너에게 닿을 수 있기를.

네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랐다.

❖ ❖ ❖

맹렬한 기세로 물살을 가로지르는 무언가에 놀랐는지 수면을 떠다니던 새들이 파드득 날아올랐다. 다급하게 달려온 요한은 방금까지 자신이 서 있던 호수 앞에서 멈추어 섰다.

떨리는 시선을 내리자 분홍색 장미꽃이 보였다. 그 꽃과 한 몸이었던 꽃잎도 보였다. 분홍색 물결이 요한의 구두 앞코를 적실 것처럼 넘실댔다. 마치 그를 배웅해 주려는 듯이.

바람을 타고 모여들었을까.

아니.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호수에 넓게 퍼져 있던 꽃잎이, 그가 매일 호수에 띄워 보냈던 그 꽃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리세트를 떠나보낸 후 요한은 처음으로 호수를 보며 진심 어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요한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가까워진 만큼 싱그러운 분홍빛 물결이 신이 나 춤을 추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가던 요한은 물기가 촉촉이 스며든 땅을 짚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물에 닿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최선이었다.

“응. 아직 나, 여기에 있어.”

리세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도 들을 수 없지만 요한은 왠지 알 것만 같았다. 정말 이상한 일인데 그러했다.

이제 가는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리세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응.”

더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은데 목소리의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가슴속에 담고 있던 많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이윽고 전부 하얗게 비워진 듯해 요한은 그저 피식거리며 웃기만 했다. 웃음이 맺힌 입술이 살며시 열렸다.

“다녀올게, 리세트.”

그만 일어나 등을 돌린 요한은 더 이상 멈추어 서지 않았다. 말 등에 올라앉아 저택으로 가기까지, 한순간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준비를 마친 하인들은 저택 앞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은 그들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남기고 이만 돌아섰다.

짐을 실은 마차가 맹렬히 달려 나가는 말들의 뒤를 힘겹게 쫓아갔다. 요한은 선두에서 말을 몰았다. 최대한의 속력으로 달리다 날이 어두워졌을 때야 말에서 내려와 야영을 했다. 마을에 들르지 않고 쉼 없이 달린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수도에 입성할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해야 빠르게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요한은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사는 사람처럼 끈질기게 매달렸다.

“곧 공작저에 도착합니다, 주인님.”

요한의 뒤를 따르던 보좌관은 드디어 해방이라는 듯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도 안도의 웃음소리가 번지기 시작했을 무렵 요한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황궁으로 간다.”

“……네?”

“너희는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 쉬어.”

그 말을 남긴 채 요한은 곧장 황궁으로 말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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