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분홍색 꽃잎
수도에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걸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설마 전쟁일 줄은 몰랐다. 수많은 이의 피와 희생으로 일궈 낸 평화가 벌써 깨졌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이토록 허무하게, 어떻게 그런…….
아니겠지.
부정해 보았지만 결국 그 끝에 다다른 건 체념과 분노였다. 언젠가 벌어질 일을 꾸역꾸역 막다 결국 터지고 만 것이라는 깨달음에서 오는 체념. 얼마든지 몬스터를 죽여 없앨 수 있음에도 끝내 퇴각 명령을 내린 지휘관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것을 모두 압도하는 두려움이 뒤이어 이어졌다.
무서웠다.
전쟁을 피해 사람들은 또다시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이 신세로 전락할 터였다. 숲과 들판을 누비는 동물들은 몸을 피해 숨을 것이고, 피가 낭자한 길가에는 사람들의 울음이 들끓겠지.
나의 삶을 이루는 소중한 존재들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하는 것.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와 리세트는 바짝 집중했다. 카에덴 델피니움의 말을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
아직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한 단계는 아니지만 제국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다고, 조사단을 파견한 상태이니 곧바로 선발대를 꾸려 진군할 계획이라고 했다. 전쟁의 신호탄을 울린다는 소리였다.
‘네 남편이 전쟁터에 끌려가는데 안 볼 거야? 아, 끌려가는 건 아니지. 그래. 어쨌든 원하지도 않는데 가는 거니까, 너를 이곳에 두고 가는 거야.’
결국 요한이 가는구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니 새삼스럽게 놀라울 건 없었다. 마음 편히 다녀오라고, 리세트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라니.
‘지금 못 보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몰라.’
그의 말처럼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질 테지. 함께 전장으로 떠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한 혼자, 그 위험한 곳으로 가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마력을 지녔다 해도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개개인의 능력보다도 그날의 운이 중요하게 작용할 때가 있다.
그날의 날씨가 너무 흐려 시야 확보가 안 되어 죽을 수도 있다. 지휘관의 오판으로 작전을 무리하게 수행하다 죽을 수도 있다. 방심해서. 미처 처치를 하지 못한 상처에 독이 스며들어서. 동료가 실수를 저질러서. 예기치 못한 많은 변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니까 빨리 좀 일어나. 너는 똑똑한 애잖아. 벌써 그 물 밖으로 나왔어야지. 왜 이렇게 굼떠? 이게 요한을 볼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
리세트는 하나하나 따져 정정해 주고 싶었다.
빨리 일어나고 싶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요. 최선을 다하고 있단 말이에요. 마지막 기회라는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왜 그런 말을 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어요?
물속에 잠긴 후 처음으로 입술을 떼었지만 물고기처럼 뻐끔거리기만 할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퐁퐁 솟아난 물방울이 수면 위로 올라가기를 한참. 어느 순간 리세트의 주변은 다시 고요해졌다. 허벅지와 목을 감고 있는 가느다란 마력의 줄기를 잡고 버둥거리던 손도 천천히 멈추었다.
비전 마법을 파훼하지 않는 한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되새기며 리세트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바로 그때, 수면 위로 빠르게 올라간 은빛 마력이 무언가를 가지고 리세트에게 돌아왔다. 어서 손을 펴 보라는 듯 마력이 손등을 만지는 걸 보고 나서야 리세트는 주먹을 쥐고 있다는 걸 알았다.
뭐 때문에 그러니?
장난칠 기분은 아니었지만 일단 손을 펼쳐 주었다. 마력은 손바닥 위로 사뿐히 내려앉아 가지고 온 것을 꺼내 놓았다. 분홍색 꽃잎이었다.
그것을 알아본 리세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무어라 부탁을 하기도 전에 주인의 뜻을 읽은 마력은 신이 나 수면 위로 춤을 추듯 떠나갔다.
❖ ❖ ❖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을 서성거리는 메이는 착잡한 눈길로 공작 부부의 침실을 살펴보고 있었다. 새벽의 빛이 하늘을 밝힐 무렵 저택으로 돌아온 공작은 침실로 들어가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 벌써 두 시간째였다.
평소에는 그 시간이면 모든 준비를 끝낸 후 다시 호수로 돌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메이의 뒤편에 선 하녀들도 불안한지 한 마디씩 대화를 주고받았다.
“혹시 잠드신 게 아닐까?”
“그러면 깨워 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누가 갈래?”
선뜻 대답하지 않는 그녀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닌지라 메이는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 나서는 비장한 얼굴로 침실을 향해 가려는 하녀의 앞치마 매듭을 잡았다.
갑자기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에 놀란 그 하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돌아보았다. 메이는 어서 뒤로 오라며 고갯짓을 했다. 그래도 그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메이는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주무시고 계신 건 아닐 거야.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그걸 메이 네가 어떻게 장담해? 만약 깜빡 잠이 드신 거라면 어서 깨워 드려야지.”
“마님께서 여기 안 계시잖아.”
“뭐?”
“마님께서 안 계시니까, 여기서 안 주무실 거야.”
정말 이상한 이유인데, 하녀들 모두 선선히 수긍할 수 있었다. 그녀들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마침내 침실의 문이 열렸다.
“주인님. 식사는 하고 가셔야…….”
그에게 어떻게든 따듯한 음식을 조금이라도 먹이고 보내려던 메이는 어정쩡한 자세로 발 한쪽을 내디딘 채 눈만 깜빡거렸다.
뭐야, 꿈인가?
그 생각이 단단히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듯 공작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머리는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정복을 갖추어 입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공작의 모습이었다. 매일 보는 하얀색 셔츠와 회색 로브에 익숙해져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그 남자는 간결한 눈짓으로 인사를 남기고 계단 아래로 유유히 사라졌다.
❖ ❖ ❖
떠날 준비는 완벽하게 끝이 났다.
영지로 올 때 거의 몸만 온 수준이라 따로 챙겨 갈 것이 없었지만 사용인들은 열성적으로 마차와 말을 점검하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기느라 바빴다. 그들을 말리려다 요한은 그만 마음을 접었다.
모처럼 죽은 듯이 조용하던 영지의 저택에 활기가 돌았다. 그거면 된 일이었다.
수도로 떠날 준비가 한창인 곳에서 조금 벗어나자 말의 갈기를 빗겨 주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주머니에 찔러 두었던 장갑을 빼내 손에 낀 요한은 그에게서 고삐를 넘겨받았다.
말 등에 올라앉는 움직임이 매끄러웠다. 요한은 능숙하게 말을 몰아 달렸다. 뺨을 스치는 바람과 코끝에 스미는 숲의 냄새가 차갑고 거칠었다. 딱딱하게 언 땅을 박차고 나가는 말의 발굽에 채어 시들어 죽어 버린 잡초와 들꽃이 힘없이 쓰러졌다.
호수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요한은 고삐를 당겨 속도를 줄였다. 투명한 은백색의 호수는 오늘도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이미 눈에 익은 모습인데, 마음이 아픈 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말에서 내려온 요한은 눈부신 아침 햇살이 비추는 흙길을 느릿하게 걸어갔다. 오늘따라 유독 허전하게 느껴지는 손끝을 시린 바람이 매만지고 달아났다.
오랜만에 몸에 걸친 정복과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로브는 집사가 편지와 함께 보내온 것이었다. 금장 단추에 닿은 햇살은 잘게 부서져 요란하게 빛났다. 눈에 거슬릴 정도로 밝은 빛을 따라 요한은 비스듬히 시선을 내렸다.
그 시선이 심장 부근에 다다랐을 때 요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빛바랜 낡은 금장 단추가 호수를 밝히는 은빛으로 아름답게 반짝였다. 마치 꼭 리세트의 머리카락을 떠올리게.
낡은 단추의 표면을 손으로 한번 훑어 낸 후 요한은 호수로 시선을 옮겼다.
“잘 잤어, 리세트?”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것도 너무나 익숙해진 일일 뿐인데 가슴에 시린 바람이 들어차는 것 같았다.
다녀올게. 금방 올 거야.
긴 샤워를 하며 여러 번 중얼거린 그 말들이 입 안에 갇혀 나오지 못했다. 메마른 입술을 당겨 올려 보았지만 건조한 미소만 그려 낼 뿐이었다.
눈을 뜨고 호수를, 이곳에 잠들어 있는 리세트를 찾아 헤매다 보면 영영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막막한 빛을 띤 눈동자는 물기가 촉촉이 묻어 있는 바닥으로 향했다. 눈을 내리뜬 채로 요한이 막 입술을 열었을 때였다.
“오늘은 꽃다발을 안 들고 왔네.”
소시지를 꽂은 얇은 나뭇가지를 양손에 잔뜩 들고 나타난 카에덴 델피니움은 입 안에 무언가를 넣은 채로 우물우물 말을 건넸다.
그냥 좀 가라고, 멀리 비켜서라고 한 소리 하려던 요한은 그의 말을 듣고서야 손이 허전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중요한 걸 두고 왔다. 메이 하핀이 떠나가는 그의 등에 대고 무어라 외쳤던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겨우 꽃다발 한 번 안 가져온 거로 그런 표정까지 지을 건 없잖아?”
위로를 하는 건지, 약 올리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딱히 반응하고 싶지 않아 요한은 침묵을 택했다.
“네가 너무 슬퍼한다면, 착한 마음을 먹고 매일 내가 직접 가져올 수도 있고. 물론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 하녀를 시켜야겠지만 말이야.”
“…….”
“어때? 좋은 생각이지?”
그가 자리를 비울 때도 누군가 호수에 꽃을 가져다준다면 좋을 것 같긴 했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아 후회가 밀려들었다. 지금 제 앞에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에덴 델피니움보다 메이 하핀이 비교할 수 없이 믿음직스러우니.
저택에 돌아가 메이 하핀에게 따로 말을 해 두면 되는 일이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요한은 우선 고개를 끄덕여 주기는 했다. 어찌 되었든 한 명을 확보해 두어 나쁠 건 없었다.
“그럼 고맙다고 말해 봐.”
그의 눈썹이 와락 찌푸려져도 카에덴 델피니움은 생긋 웃고 있기만 했다. 저놈이 원래 저런 인간이었나? 알면 알수록 거부감이 느껴진다는 건 변함없었지만 전에는 이처럼 황당하지는 않았다.
역시 메이 하핀이면 충분하겠다는 결론을 내린 요한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정말 갈 거야?”
“…….”
“옷까지 갖추어 입은 걸 보면 갈 생각인가 보네. 아내를 버리고서, 아이를 버리고서. 역시 넌 매정하고 비정한 놈이야.”
속을 긁는 말에도 요한은 꼼짝하지 않고 호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당장 놈을 끌어다 나무에 묶어 버리고 싶었지만 괜한 데 힘을 빼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리세트에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니 무시할 수밖에.
“잘 다녀와. 조심하고.”
이 황당한 놈이 한 말 중 가장 신경을 거슬리게 해 요한은 결국 시선을 돌렸다.
“네가 왜, 내게 그런 말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