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갑작스러운 소식
꼭 주먹을 쥔 손에서 힘을 푼 리세트는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하나씩 쫙 펼쳐 보았다가 다시 오므리기를 반복했다. 자라처럼 목을 한껏 움츠렸다가 어깨를 밑으로 쭉 내려도 보았다.
상체의 움직임은 어느 정도 되찾았다. 여전히 하반신에는 힘이 들어가지는 않지만 이 정도도 감격스러운 성과였다.
리세트는 자신이 호수에 잠겨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의식이 흐릿해졌다가 어느 날은 또렷해지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사실이었다. 물속에 있는데도 숨을 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나마 움직여 주기는 하는 팔로 물살을 가르며 위로 올라가고 싶은데 다리는 감각이 없고, 마법진에서 뻗어 나와 몸을 휘감고 있는 마력은 놓아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속상해하는 대신 리세트는 본래의 목적에 집중했다.
틈날 때마다 릴프랑을 먹어 둔 게 천운이었다. 꺼져 가던 마력이 되살아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자신의 본래 마력이 거의 잡아먹히기 직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알게 모르게 리세트의 몸속에서 두 마력을 묶고 있던 델피니움가의 마력은 꽤 많이 밀려나 지금, 리세트의 손 안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물론 얌전히 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얼마나 바쁘게 쏘다니는지. 한눈을 팔면 반쯤 고개를 빼 물속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기 일쑤였다.
포기를 모르고 달아나려 시도하는 마력을 다시 가두고, 그것이 몸부림을 쳐 리세트가 구슬을 놓치면 바위틈으로 숨으려는 걸 간신히 낚아챘다.
멀리서 보면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정다워 보이지만, 피만 흘리지 않을 뿐이지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세 개의 마력이 뭉치고 섞여 서로를 물어뜯었다. 리세트의 마력끼리 싸우는 일도 빈번했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 양팔을 각각 쥐고 멀리 달려가는 것만 같았다. 찢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균형은 아직까지 리세트의 마력이 우세하게 몰아가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마력을 움직이기를 한참. 리세트는 잠잠해진 델피니움가의 마력 위에 또다시 한 겹의 방어 마법진을 둘렀다. 은색 막이 덧씌워진 구슬은 조금 더 작아졌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호수 바닥이 짧게 빛났다. 눈꺼풀을 들고 있을 힘도 없어 리세트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마력을 잡아 가둘 때나 어쩔 수 없이 눈을 뜨는 것뿐이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리세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어차피 보이는 거라고는 깊은 물, 어두워 제대로 앞이 보이지도 않는 호수의 바닥이었으니.
눈을 뜨고 있으면 오히려 두려움이 엄습해 감고 있는 편이 심신에 이로웠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잘 들렸다. 시끄러운 카에덴 델피니움의 목소리가.
들리라는 요한의 목소리는 희미하기는커녕 귓가에 스치지도 않는데, 그의 목소리는 너무 크고 잘 들렸다. 리세트의 몸을 지탱해 주는 마법진이 그의 마력으로 유지되고 있어 그런 듯했다. 혼잣말의 대부분은 자기 얘기였다.
배고파. 추워. 침대에서 자고 싶어.
그는 그 말을 제일 많이 했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지극히 그다운 말이라 리세트는 킥킥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여느 때처럼 추워, 그 단어로 시작한 혼잣말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날이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전쟁은 영 내 취향에 부합하지 않는 것 같아. 너희 딱딱한 흙바닥에서 잤다며? 서리까지 맞아 가면서. 너무 싫다.’
그 말을 듣던 리세트는 문득 깨달았다. 맞아, 저분도 귀족이셨지. 이런 데서 곱게 자란 태가 났다. 그간 리세트가 겪어 온 귀족들과는 상당히 다른 유형의 사람이라 저도 모르게 까먹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게 진작 몬스터들을 다 쓸어버렸으면 얼마나 좋아. 체제 유지니 뭐니 하면서 계산하다 이 꼴이 난 거지. 한심하긴.’
그는 진심으로 진저리를 치는 듯했다.
볼 수는 없지만 그가 어떤 얼굴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요한이 그를 볼 때와 비슷한 모습이겠지.
리세트는 조심스럽게 호수의 마법진으로 마력을 흘려 보냈다. 혹시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까 싶어서. 애타게 마음속으로 크게 외쳐 보았다.
요한은 뭘 하고 있어요?
일방적인 대화가 계속 진행되는 걸 보면 아쉽게도 리세트의 목소리는 닿지 않는 듯했다. 진이 빠지고 허탈해져 리세트는 팔에서 힘을 뺐다. 그러다 갑자기 리세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주제가 나타났다.
드디어. 드디어 요한 얘기였다.
‘쟤는 얼어 죽으려고 작정한 것 같아. 네가 나중에 일어나면 혼 좀 내 봐. 아, 내 목소리가 들리기는 할까?’
들려요! 제발,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계속 말해 주세요!
간절한 마음이 닿았는지 그는 한동안 요한 얘기를 세세하게 들려주었다. 이 추위에 셔츠 한 장만 입고 있는 대단한 놈이라던가, 하녀가 애걸복걸해 로브를 입혔다는 것. 표정이 얼어붙어서 몸은 안 추운 것 같다던가 하는 말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식사도 통 안 해. 하는 꼴을 못 봤어. 기껏해야 네가 먹던 쿠키 몇 개 깨작대다가 이제는 그것도 안 먹어. 물만 좀 마시고. 어렸을 때 저랬다면 분명 지금 키의 절반밖에 크지 못했을걸? 와아, 그럼 너보다 더 작은 거네. 끔찍해라.’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샐 것 같아 리세트는 다시 간절하게 손을 모으고 기다렸다. 다행히 기다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잠을 안 자. 아, 물론 눈을 붙이기는 하겠지. 내가 못 본 거겠지만. 하여튼, 엄청 짧게 자다 일어나는 것 같아. 쟤를 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야…….’
또 뭐가 신기해요? 네? 말해 주세요!
그의 말이 더 이어지질 않아 리세트는 다급해졌다. 얼마 만에 듣는 요한의 소식인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냥 흘려들어. 알겠지? 쟤를 보면 마치 작고 귀여운 동물이 주인에게 자기 좀 봐 달라고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아. 아직도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어. 분명 네가 보길 바라서 저러고 있는 걸 거야. 미친놈인 건 진작 알았지만 저렇게 미쳤을 줄이야.’
그 이후로는 다시 춥고 배고프다는 하소연이 주를 이루었다.
상처 얘기가 불러온 기억에 리세트는 초조하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마력이 무자비하게 요한의 몸을 베어 버린 감각은 리세트의 손에 선명하게 전해졌던 것이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나 리세트는 속상하고 화가 났다.
다친 요한이 걱정되었다가 무모한 행동 때문에 화가 났다가, 그러고 나서는 다시 걱정되고…….
리세트는 치유 계열의 마력을 조금만 떼어 내 살며시 수면 위로 올려 보냈다.
요한은 분명 근처에 있을 테니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애타는 마음을 도와주듯 방어 계열의 마력까지 번져 나와 호수를 밝게 비춰 주었다. 길을 잃지 말라는 듯이, 잘 찾아가라는 듯이. 감긴 시야 너머로 환한 빛이 언뜻 엿보였다.
눈을 뜨면 집중하기 힘들어 리세트는 최대한 감각에 의지해 마력을 흘려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요한을, 호수 가까이 닿아 있는 소중한 그를.
요한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따스한 체온도, 손길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지만 리세트는 똑똑히 요한에게 닿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력이 온몸으로 그것을 전해 왔으니까.
말끔하게 요한을 치료해 준 후 마력이 다시 리세트에게 돌아왔지만 호수를 밝히는 빛은 더 늘어나 있었다.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 건 아니었지만 꽤 괜찮은 듯 보여 리세트는 굳이 마력을 거두지 않았다. 힘에 겨우면 유지하지 못했을 테지만 리세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력 스스로 빛을 내고 있어 몸에 무리가 가지도 않았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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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니움가의 마력과 끈질긴 추격전을 끝냈을 무렵, 리세트의 입가에 거만한 미소가 번졌다. 승리한 자만 누릴 수 있는 값진 포상이었다.
며칠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생명력이 질긴 이 마력이 발악하듯 환영을 만들어 내는 바람에 카에덴 델피니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집중한 탓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이번에는 큰 수확을 거둬들여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기와 비전 마법을 엮어 주던 고리를 또 하나 끊어 냈으니까. 비전 마법진의 수식을 벌써 두 개나 없앴다. 이제 남은 건 네 개. 갈 길이 멀지만 점점 고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덕에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지만 리세트는 웃을 수 있었다. 이렇게 차근차근 없애다 보면 언젠가 끝이 올 터이니.
그러니까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게 요한 얘기 좀 해 주세요.
간절한 바람을 담아 호수 밑바닥으로 마력을 보내며 리세트는 오랜만에 눈을 떠 보았다.
수면 너머로 밤하늘이, 별이 가득한 그 아름다운 하늘이 보였다. 리세트는 별을 잡을 것처럼 손을 살며시 들었다. 그래 보아야 수면에도 닿을 수 없지만 한층 가까워진 듯했다.
문득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이 까마득한 호수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그 마음이 간절해질수록 리세트의 움직임은 다급해졌다. 위로 올라가려고 팔을 허우적거렸지만 수면에 닿기는커녕 별빛이 부서져 보일 뿐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리세트의 팔이 부자연스럽게 멈추었다.
수면 아래가 잠잠해져 다시 하늘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래. 이거면 됐어. 뭘 더 바라겠어. 괜찮아. 일을 마무리 지은 후 나가서 보면 돼. 약해지지 마.
용기를 내는 게 기특하다는 듯 리세트의 마력이 주인의 품으로 안겨 들어왔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성질 고약한 마력을 따라 하듯 은빛의 마력은 물고기처럼 형체를 만들어 리세트 곁을 맴돌았다.
짧은 꼬리로 살랑살랑 뺨을 간질이기도 하고, 일부러 커다랗게 부풀린 머리를 리세트의 어깨에 대고 비비적거렸다. 리세트가 잡으려고 하면 재빨리 저만치 달아났다가 헤엄치듯 다가와 곁을 지켰다.
예쁘다.
그 칭찬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는지 리세트의 마력은 주인의 몸을 빙 두르듯 한 번 감싸고는 넓게 퍼졌다. 호수 속에도 밤하늘이 펼쳐졌다. 너무 아름다워 넋을 놓았던 리세트는 생긋 웃으며 손바닥을 펼쳐 앞으로 내밀었다.
마력이 하나씩 모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가나 시합이라도 하는지 앞다퉈 달려들었다. 꼭 별을 따다 손에 가득 모은 것만 같았다.
요한과 함께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생각을 하는 동시에 카에덴 델피니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리세트. 빨리 일어나. 너 이러다 후회한다?’
쿠키를 모조리 먹어 치우겠다는 협박을 종종 일삼았던 사람이라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저러실까.
‘결국 전쟁이 발발했어. 요한이 끌려가게 생겼어!’
리세트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