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밤이 끝나 간다
로반 백작은 감격에 겨운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행길을 예상하고 왔는데 공작은 의외로 순순히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이렇게 쉽게 가겠다고 하다니. 선뜻 좋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너무 기뻐 실실 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현재까지 회의를 통해 결정된 사항을 간결하고 빠르게 요점만 짚어 전달했다.
“선발대와 후발대의 역할을 철저하게 분리할 겁니다. 공격과 방어로요. 치유 계열은 지원 부대로 따로 편입해 상황을 보고 양쪽 진영에 투입하기로 했습니다만, 우선적으로는 중앙에 배치하는 것으로 뜻이 모였습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목소리가 열띠어 갔다.
공작이 작전을 맡아서 실패한 적이 없었다. 이번 전쟁 역시 승리로 이끌겠지. 그런 황홀한 미래를 꿈꾸느라 흥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경청하는 자세만 취하던 공작이 입술을 뗐다.
“조건이 있어.”
왠지 너무 쉽게 마음을 돌렸다 생각하던 차였다. 어깨를 움찔 떤 로반 백작은 곧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돌아왔다.
무리한 요구를 하면 어쩌나 싶으면서도 지금의 심정으로는 어떤 것이든 다 포용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황제 폐하의 전언도 있지 않은가. 잘만 구슬려 오라고. 공작이 원하는 조건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라는 말을 듣고 온 터라 지독한 긴장감을 덜어 낼 수 있었다.
“말씀해 보시지요.”
“선발대의 지휘관이 정해졌나?”
“아직…… 정해진 바는 없지만 곧 가닥이 잡힐 것 같습니다.”
“전략관도 아직 못 정했겠군.”
“그것도 곧, 정해지겠지요.”
로반 백작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다 하하, 멋쩍은 듯 웃어 버렸다. 일이 수월하게 풀린다 하였더니 손바닥과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 자리를 두고 얼마나 많은 고성이 오가는지 모른다. 어떻게든 서로 미루고 싶어서, 죽어도 가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어 적임자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책임이 막중한 자리이니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한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 자리, 내가 맡는 것으로 해.”
“……예?”
“내가 맡겠다고.”
얼떨떨해진 그는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냉큼 공작의 뜻을 받아들였다. 때마침 새롭게 차를 내오는 사용인들에게 종이를 가져오라고 해 공작의 서명까지 받아 내고 나자 기분이 날아갈듯 가벼워졌다.
실로 어마어마한 수확이 아닌가.
“대신 이번 일이 끝나면 나는 후처리 작업에서는 빠지는 거로. 몬스터들의 가죽도 뼈도, 심장도 필요 없어. 선발대가 할 일이 끝나면 나는 곧바로 귀환하겠어.”
공작은 이후로도 몇 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했고, 그는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았다. 다소 이해할 수 없는 조건이 하나 붙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로반 백작이 바로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응접실을 나서고 난 후, 요한은 사용인들도 전부 물린 채 혼자 남아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수도로 가야지.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로반 백작이 어련히 잘 이야기를 해 둘 테니 따로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아도 될 터였다. 보고서를 토대로 작전을 짜고, 아, 그 전에 명단부터 확인을…….
차갑게 식어 버린 찻잔을 내려놓는 손에 미세한 떨림이 감돌았다. 요한은 빈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눈을 감았다.
한 달이면 될까.
아니. 그것보다 빨리 끝낼 수는 없을까.
작전이든 뭐든 행정 절차를 거칠 필요가 있나. 나 혼자 가면 안 되나. 인원을 통솔해 가는 게 더 거치적거릴 때가 많았다. 언제나 그랬다. 몬스터들은 죽일 수나 있지. 그것들은 아군이라는 가면을 쓴 방해물이나 다름없었다.
비전 마법 중에 마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는 것도 존재하니 그것의 도움을 받는 방법도 괜찮은 듯했다. 몇 날 며칠 고열에 시달리는 후유증이 남는다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빨리…… 리세트에게 돌아올 수만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요한은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한 번도 제대로 다뤄 본 적 없는 마법을 이처럼 중대한 시점에 사용해도 되나. 더 큰 부작용을 감수하게 된다 해도 성공이 보장된다면 기꺼이 행할 터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다시 침착하게 생각해 보려 했지만 요한은 끝내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했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창문이, 그 너머의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 ❖ ❖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옆에 서 있는 카에덴 델피니움의 얼굴은 불만이 가득하다는 듯 구겨져 있었다. 그토록 기다린 소시지를 먹고 있었지만 맛을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너무 추워서 그런가.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오물오물 음식을 씹는 소리만 조용히 번져 나갔다.
회색빛 연기 너머로 흐릿하게 요한이 보였다. 호수 앞에 서서 보이지도 않는 밑바닥만 응시하고 있는 그 미련한 놈이. 추위도 안 타는지 요한이 옷을 제대로 껴입는 걸 보지 못했다.
도대체 옷을 왜 그따위로 입고 있는 것이냐며 진지하게 물어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아주 기가 막혔다.
‘모르겠어.’
네가 모르면 이 세상 어느 누가 아느냐고, 저기 호수 밑에 있는 리세트가 아느냐고 쏘아붙이던 그는 화들짝 놀라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 후에는 굳이 옷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셔츠에 얇은 로브 하나를 걸친 델피니움의 가주가 얼어 죽는 진풍경을 보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가문에 재물이 다 떨어져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억측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제가 대신 갈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깊은 한숨이 섞인 노바르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트렸다. 장작불 옆에 쪼그리고 앉은 노바르는 수프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너는 또 왜? 너까지 속 시끄럽게 하지 마. 쟤 하나로 족하니까.”
호수로 돌아온 요한은 자신 혼자 출정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그와 노바르는 이곳에서 리세트를 지키라고, 금방 돌아오겠다며 간결하게 말을 맺었다. 그러고 나서는 또 몇 시간째 호수만 바라보고 있었고.
“호수가 아직까지 잠잠한 걸 보면 제 마력은 필요 없지 않을까요? 델피니움 공 대신 제가 가는 편이 훨씬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네가 거기 가면 뭐 뾰족한 수라도 생겨? 요한은 선봉에 설 테고, 넌 방어 계열이니 당연히 후방으로 빠지겠지. 네가 요한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아? 허튼소리 하지 말고 네 자리를 지켜.”
신랄한 비판에 음식을 슬겅슬겅 씹고 있던 노바르의 턱이 움직임을 잃었다. 정확한 지적일 뿐인데 마음 한편이 쓰라렸다.
요즘 노바르의 일상은 겨울잠에 드는 동물들처럼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호수에서 퍼져 나오는 마력과 마법진을 확인하며 바쁘게 지내는 데 반해, 그는 방어 마법진을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이상이 없으니 다행인데, 그래서 할 일이 없었다. 제대로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은 전에 없던 터라 노바르는 꽤나 당혹스러웠다.
자기 자신에게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나는데 속상하고, 그러다 우울해지고. 하지만 딱히 해소할 방법은 없는 그런 감정. 노바르가 그 낯선 감정에 또 매몰되어 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리고 뭐? 네 마력이 필요가 없어?”
실소를 흘리는 카에덴 델피니움의 목소리에 노바르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함부로 속단하지 마라. 변수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똑똑히 경험했잖아. 네가 자리를 비웠을 때 마력이 날뛰기라도 해 봐. 숲은 물론이고 저택까지 불길이 번지겠지. 와, 엄청 큰 모닥불을 볼 수 있겠네. 너 설마 그게 보고 싶은 거야?”
“연구원님 말씀이 맞습니다. 맞아요. 변수는 정말 무섭지요.”
벌떡 일어난 노바르는 비장한 얼굴로 그의 손에서 나무 꼬챙이를 낚아채 갔다. 소시지를 굽고 있던 그 소중한 것을 아무런 말없이 갈취해 간 놈의 얼굴이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하나를 금방 먹어 치우더니 또다시 하나를 더 가져갔다.
잠자코 뺏겨 주던 그의 이맛살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당연히 제 입에 넣을 줄 알았는데 노바르가 갑자기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
“먹을 것 좀 가져다드리려고요.”
“그냥 둬. 저럴 때는 혼자가 나아.”
“하지만…….”
“혹시 너 꼬챙이로 맞고 싶어?”
일리 있는 말에 노바르는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타들어 가는 장작을 가만히 보던 시선을 비스듬히 올리자 밤하늘이 보였다. 별이 참 예쁘게도 떠 있었다.
❖ ❖ ❖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요한은 의식하지 못한 새 생각에 잠겼다.
거울을 보는 게 견딜 수 없이 싫었던 때가 있었는데, 언제부터 괜찮아졌나…….
밤하늘이 불러온 기억은 또다시 리세트였다.
‘요한, 네 눈은 밤하늘처럼 예뻐.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 밤하늘 말이야. 꼭 그거 같아.’
별이 많이 보이는 날이면 리세트는 종종 그런 말을 해 주었다. 오래도록 눈을 마주하며. 사랑스럽게 미소 짓는 얼굴을 하고서. 그 말은 요한의 가슴속 깊이 들어와 따스하게 잠겨 들었다.
그런 말들이 모이고 모여 거울을 보는 게 괜찮아졌다. 더 이상 못 견디게 괴롭지 않았다.
리세트와 함께 본 무수히 많은 하늘 중 오늘이 가장 별이 많았다. 빼곡하게 하늘에 들어찬 은빛 물결은 마치 꼭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했다.
“별이…… 많아, 리세트. 네가 보면 좋아할 텐데.”
나직이 흘러나온 말은 하얀 입김처럼 흩어졌다.
“나중에 꼭 같이 보자.”
요한은 시선을 내려 호수를 바라보았다. 이곳에도 하늘이 담겨 있었다. 별이 떠오른 하늘을 비추는, 리세트의 마력으로 물든 은빛의 호수. 하늘보다도 깊고 아름다운 호수가 춤을 추듯 빛을 보내왔다. 마치 리세트가 대답을 하는 것만 같았다.
“아기와 하고 싶은 거 생각해 보라고 했지?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고 싶어. 너무 많이, 그 하늘을 보고 싶어.”
진심에서 우러나온 소리는 아니었다. 아기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꺼낸 건 혹시, 그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기 이야기를 하면 리세트가 좋아하니까. 너무 좋아서 깨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내일 떠난다는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밤이 지나면 떠나야 한다.
그러니 제발…… 어둠이 조금만 더 길게 머물러 주기를. 끝나지 않기를.
간절한 바람을 타고 서서히 달이 기울기 시작했다.
밤이 끝나 가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