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숲
방금까지 사람의 그림자조차 구경할 수 없었던 길을 바라보는 카에덴 델피니움의 눈매가 와락 구겨졌다. 불안한 와중에도 장작불에 통통한 소시지를 구워 먹을 생각을 하느라 한껏 들떠 있던 부푼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매일같이 짐 가방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오던 하녀의 두 손이 오늘은 무척 가벼워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으니.
낑낑대며 두 손 가득 무겁게 오던 하녀가 빈손으로 나타났다. 큰일이 벌어졌음을 예감하게 하는 모습과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그의 얇디얇은 신경줄을 갉아먹는 듯했다.
너무 피곤한 탓에 눈이 스스로 환각을 일으키는 건가. 환청까지 듣는 걸 보면 귀도 완전히 맛이 간 것 같기도.
제발 꿈이길 빌며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눈을 잠시 붙이는 게 좋겠다. 그가 잠이 든 사이에 상황을 잘 살피라 일러 주려고 노바르를 부르려던 찰나였다.
“연구원님!”
더 이상 환청으로 치부할 수 없게 선명한 목소리였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머리를 감싸 쥐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앞까지 쉼 없이 달려온 하녀는 무릎을 짚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와중에도 고개는 빳빳이 치켜들어 그를 보고 있었다. 새하얀 입김 너머로 흔들리는 하녀의 눈동자가 보였다.
“황제 폐하께서…… 황제, 폐하께서…….”
인사도 생략한 하녀가 허겁지겁 말문을 열었다.
“그래. 그분께서는 또 왜?”
“폐하께서 보내신 사람이 방금 막 저택에 당도해 주인님을 기다리고 계세요.”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 사이사이로 급박한 상황이 전해졌다.
“어서, 어서 주인님을 모셔 오라고 닦달하셔요.”
카에덴 델피니움은 땀이 송골송골 돋아나 이마에 머리카락이 잔뜩 들러붙은 하녀를 한 번, 호수에 빠져 죽을 것처럼 그저 물 앞에 서 있는 요한을 한 번, 그리고 다시 하녀를 보았다.
그는 직접 가 소식을 전해 보시라는 뜻으로 요한을 눈짓했다. 그 뜻을 읽었을 텐데도 하녀는 그 자리, 그의 앞에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평소에는 숲에 가장 가까이 있는 그보다 요한에게 먼저 가 인사를 하고 가져온 물건을 주는 하녀가 아닌가. 그다음엔 노바르, 마지막 차례가 그였다. 그런 하녀가 지금은 요한도 노바르도 아닌, 그만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봐라.
저기 저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호수처럼 속내가 투명하게 읽히는 하녀가 그를 헛웃음 짓게 했다.
무서우니 직접 가기는 싫고, 노바르는 꽤 멀리 떨어져 있고, 그래서 나를 희생양으로 갖다 바치시겠다?
요한에게 직접 가 보라고 하려던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세트도 마음대로 대하기 힘들었는데 이 하녀도 마찬가지였다. 생김새 어느 한 부분 닮은 곳도 없는 두 사람이지만…… 눈빛이 닮아 있어 그런 걸까. 그는 비정하게 제 뜻을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물렁물렁한 인간이 되었나.
“다녀올 테니 기다려.”
“네!”
요한에게 가는 그의 뒷등에 대고 하녀가 해맑게 외쳤다.
충분히 숨도 고르고 기운도 차린 것 같은데, 역시 하녀를 보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 생각은 요한과 마주 섰을 때 더욱 강해졌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당장 저 차디찬 물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끝난 조카에게 그는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의 해가 떴네. 잘 잤어?”
상대방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면 그쪽도 무어라 반응이 돌아와야 하지 않나.
“아, 점심때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인사구나. 내 생각이 짧았네. 그래. 오늘 점심도 거를 생각이야?”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어서 하고 자리로 돌아가지 그래?”
“그럴까?”
황제라는 단어를 뱉으려다 말고 그는 에둘러 표현하기로 했다.
“너를 애타게 찾는 사람이 있대.”
“뭐?”
괜한 오해를 부를까 싶어 그는 황급히 덧붙였다.
“남자야.”
“…….”
“듣지는 못했는데 아마 그럴걸.”
이렇다 할 표정 없이 잠잠하던 요한의 한쪽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싸늘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가 메이에게까지 닿았다.
대화를 엿들으며 발을 동동 구르던 메이는 짙은 후회를 담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내가 갈걸.
편한 길을 택한 자신이 미워진 순간이었다.
❖ ❖ ❖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렇게나 길었나.
흘끔 앞을 본 메이는 고개를 조금 더 숙인 채 공작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숲 길목까지 마차를 타고 와 허겁지겁 달려가기까지. 그 시간을 통틀어 지금이 가장 숨 막히고 불편했다.
메이는 어서 빨리 마차의 그림자가 보이길 빌었다. 당연히 마차를 따로 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 불편한 시간도 끝이 나는 것이니까.
자박자박 소리를 죽여 걷던 메이는 공연히 시린 손끝을 문질렀다. 마른침을 꼴깍 삼켜 봤지만 긴장감만 늘어났다.
많고 많은 사용인 중 하나. 메이는 자신의 자리를 자각하고 있었다. 주제넘게 굴지 마, 메이 하핀.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타이르고 다그쳤다. 마님의 소식을 묻고 싶어 입이 근질거려 입술을 꾹 깨물기도 하면서.
지금껏 잘 참아 왔는데, 앞으로도 그럴 생각 있는데…….
공작은 절대 마님을 두고 수도로 떠날 사람이 아니다. 그런 생각은 꿈에서도 해 본 적 없었지만, 그렇지만…… 전쟁은 다르지 않나. 공작이 출정하게 되면 어떡하나 싶어 메이의 속이 타들어 갔다.
마님은 언제쯤 저 호수에서 나오실 수 있는 건가요? 몸이 많이 아픈 건 아니시지요? 주인님께서는 꼭 떠나셔야만 하나요? 아니지요? 여기에 계속 계실 거지요?
하고 싶은 질문은 그토록 많았지만 메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전혀 다른 소리였다.
“조, 조금 화가 난 것 같아요.”
앞을 보며 걸어 나가기만 하던 공작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누가?”
“……네?”
“화가 난 사람.”
그제야 주체를 빼먹은 걸 알아차린 메이는 황급히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사람이요. 어찌나 막무가내로 주인님을 찾는지 모르겠어요. 호수로 가겠다며 억지를 부리시더라니까요. 하녀들 수군거리는 얘기를 들어 보니까, 위병들과도 싸운 모양이에요.”
이러다 혹시 황제의 사람과 싸움이라도 벌일까 싶은 생각에 메이의 입술이 사르르 닫혔다. 아, 누가 시간을 딱 5분만 돌려 주었으면. 메이가 부질없는 바람을 품어 보는 사이에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에 요한은 돌연 멈추어 섰다.
“리세트는…….”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어 요한은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뒤에서 헉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훌쩍이는 소리로 변했다.
진작 말해 주었어야 했는데.
리세트의 마력이 그를 감싸 안고 사라진 날이 지나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생겼다.
단편적인 부분만 전해 듣고 이곳에 와 제 할 일을 마치면 조용히 사라지는 하녀. 어렸을 적부터 리세트와 어울려 놀던 메이 하핀. 리세트의 소식을 묻지 못해 속이 바짝 타들어 갔을 그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요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아직은 지켜보는 게 최선이라는 것. 하지만 조금씩 차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 며칠 전에는 마력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까지 차분하게 전했다. 그사이 우는 듯한 하녀의 훌쩍거림은 잦아들어 있었다.
“알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주인님.”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 올려 그 과분한 인사에 화답한 요한은 이만 마차에 올랐다.
❖ ❖ ❖
황제의 명을 받들어 델피니움 영지까지 찾아온 로반 백작은 응접실에 앉아 시계만 노려보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째 그는 이곳에서 차나 마시며 기다리고 있는 신세였다.
델피니움 공작을 보면 단단히 한 소리를 하고 마리라. 그의 굳은 다짐은 응접실의 문이 열린 순간 처참하게 부서졌다.
“오셨습니까, 델피니움 공.”
공작 부인의 안부를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을 얼굴로 공작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전에도 차가운 인상 때문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기 껄끄러웠는데 차라리 그때가 더 그리워졌다. 공작의 눈매며 턱선, 분위기까지 이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뾰족했으므로.
애써 떨리는 마음을 감추려 그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폐하의 부름을 언제까지 뒷전으로 미룰 작정이십니까. 공께서 염려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소환에 응하셔야지요.”
가만히 경청하는 태도를 취하는 공작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며 그는 헛기침을 해 목청을 가다듬었다.
“크리프 후작께서 그리 안타깝게 떠났는데, 우리가 그의 희생을 저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크리프 후작의 시신이 발견된 건가?”
지금껏 침묵을 유지하던 공작이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본격적인 대화의 신호에 로반 백작은 활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발견된 건 없지만 당연한 일이지요. 그 조사 현장에 있던 모두가 죽었는데, 제아무리 크리프 후작이라지만 살아 있겠습니까? 너무나도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이지만 곧 시신을 수습할 수 있을 겁니다.”
“당연한 일이라…….”
“귀족으로서 명예로운 죽음이었습니다. 후대에 길이길이 남겠지요.”
요한은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어떻게 그런 얼굴로, 그런 표정으로, 그딴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여력도 없어 그만두었다. 그 대신에 희생을 했다며, 이제 그 정신을 받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겠지.
곧이어 요한의 예상에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니 공께서 나서 주셔야지요. 누구보다 절친한 친우이지 않습니까. 운 좋게 공께서 시신을 발견하실지도 모르고요. 아! 그거 아십니까? 크리프 후작이 공을 위해 마지막까지 대단한 일을 하고 갔습니다.”
“……들은 바가 없는데, 무슨 소리지?”
“델피니움 영지와 가까운 숲이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 고블린의 서식지로 유명했던 그 숲이요. 최근 그곳에 다시 그놈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보고가 종종 올라왔습니다. 신경이 꽤 쓰였던 모양인지 크리프 후작이 서부 지역으로 곧바로 가는 대신 그 숲을 들렀다 갔다고 합니다. 깨끗이 정리를 하고 간 것이지요.”
그 멍청이가.
팔걸이를 부술 듯 움켜쥐고 있던 요한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최근 보고에 따르면 몬스터들이 이번 전쟁을 통해 얻고 싶어 하는 건 그 숲으로 추정됩니다. 정찰을 돌듯이 움직이는 몇몇 놈들의 발길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어요. 델피니움 영지가 가장 가까우니 피해가 클 테지요.”
숲. 요한은 그 단어를 입으로만 불러 보았다.
숲.
리세트를 처음 만난 곳.
리세트의 부모님이 잠들어 계신, 바로 그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