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바보야
이상한 감각이었다. 몸이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른 것처럼 기억에 드문드문 공백이 생겼다.
그 공백을 채워 보려 리세트는 조금씩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시작은 비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차가운 비.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세차게 퍼붓고 있다는 건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리세트는 소리에만 의지해서 기억을 뒤적였다.
귓가에는 빗소리가 끊임없이 몰아치는데, 어째서 얼굴에는 한 방울도 튀지 않는 걸까.
몸에 열이 올라 숨쉬기도 벅찼다. 내심 비를 맞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리세트의 소원을 들어주듯 시원한 비와 바람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얼굴은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빗물이 닿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열감을 뺄 수 있어 좋았다.
이렇게 조금만 더 비를 맞고 있으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리세트는 다시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발끝에 닿는 물이 무척 차가웠다. 비와는 느낌이 달랐다. 마치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는 듯 리세트의 몸은 서서히 무거워졌다.
겁이 났지만 그 싸늘한 감각은 차츰 더 몸을 타고 올라왔다. 이러다 불에 타 죽겠구나 싶었던 게 마치 꿈인 양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추웠다. 그 순간에도 얼굴만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리세트는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바동거렸지만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서웠다. 너무나도 무서웠지만 점점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졌다. 더는 수면이 깊어지지도 않았다. 안심한 리세트는 그제서야 요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런 목소리를 내가 어디서 들었더라.
아카데미에서 쓰러졌을 때. 요한은 그때도 서럽게 울며 리세트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듣는 사람 마음이 더 아프게, 아이처럼 엉엉 울었지. 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요한의 목소리는 그날과 비슷했다.
그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서 리세트가 느낀 감정은 극명하게 달랐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처음에는 무척 슬펐다. 마음이 너무 아파 찔끔 눈물이 새어 나왔다. 정말 그게 다인지, 펑펑 눈물을 흘렸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랬다.
끝에 다다랐을 때는 화가 났다. 저런 이야기를 하필이면 지금 하는 바보 때문에.
요한, 이 바보야. 내가 널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
어서 일어나 그 말을 해 주고 싶은데. 울고 있는 저 바보를 꼭 안아 주고 싶은데…….
요한의 품이 멀어졌다. 온기도, 목소리도, 모든 것이 떠나간다. 기억과 의식이, 몸이 무겁게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 후의 기억은 하늘이었다. 눈에 익은 분홍색 꽃잎이 여기저기 떠다니는 맑은 하늘.
내가 하늘을 날고 있는 건가. 꽃잎이 여기까지 날아온 걸까.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어야 꽃잎이 하늘까지 날아들 수 있는 걸까.
새처럼 하늘을 날아 볼까 하다 리세트는 금세 의욕을 잃었다.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답답하고 짜증이 나야 하는데 웃기게도 굉장히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자유…….
리세트의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
사지가 꽁꽁 묶여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자유라니. 이럴수록 정신을 차려야지. 요한의 마력이 또 나쁜 마음을 먹고 수작을 부릴 수도 있으니.
문득 리세트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 듯한 손에 힘을 실어 보았다. 한 손에 들어오는 그 작은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까딱거릴 수도 없었다. 고개를 움직여 보려 목에 힘을 주던 리세트는 결국 그나마 제 의지를 따라와 주는 손가락만 꼼지락댔다.
동그랗고 작은 걸 보면 아마도 구슬인 것 같았다. 힘을 주어 만질수록 구슬이 깨지려는 듯 꿈틀거렸다. 그 맹렬한 움직임을 느끼고 나서야 리세트는 깨달았다.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아, 그거구나. 성질이 어마어마한 구슬.
요한의 마력이면서 너는 왜 그 모양이니?
소리 내 말하지도 못했는데 용케 알아들었는지 마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네 주인은 나한테 얼마나 다정한데.
그 말에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하듯 마력이 다시 한번 파드득 몸을 떨었다.
너도 참 대단하다. 혹시 델피니움 연구원님의 마력 아니니?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제멋대로일 수가 없는데.
한껏 투덜투덜 빈정거린 리세트는 열심히 외워 둔 마법식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아, 이제 마법진이라고 해야 하나.
잠시 든 의문은 차츰 멀어졌다. 각기 다른 세 개의 마력이 리세트의 몸 안에서 극렬하게 부딪치기 시작했다.
너는 성격이 너무 나쁘니까, 이제 요한의 마력이라고 부르지 않을래. 델피니움가의 마력이라고 불러야지…….
❖ ❖ ❖
음습한 어둠만 담겨 있던 요한의 눈동자에 아름다운 빛이 스며들었다 사라졌다. 그 빛을 따라가듯 요한은 한 걸음, 또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구두코에 차디찬 물이 닿기 직전에 멈추어 섰다.
꿈이었나.
마치 방금 보았던 그 빛은 꿈이었다는 듯이 호수는 어둡기만 했다. 밤이 찾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요한은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막막한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 순간에 다시, 요한이 사랑하는 색으로 호수가 반짝였다.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려는 듯이 주변을 온통 은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요한은 숨을 죽인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물안개처럼 호수 위를 폭 덮은 포근한 빛이 살며시 요한에게 다가왔다. 그 빛이 몸을 감싼 순간 따스한 기운이 번졌다. 누구의 것인지 눈을 감고서도 알아맞힐 수 있었다.
리세트, 네가 왔구나.
요한의 몸을 다정하게 만져 주었던 그 마력은 한참 동안 곁을 맴돌다 서서히 사라졌다. 그 빛을 잡고 싶어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미 꿈결처럼 멀어진 후였다.
요한은 떨리는 손으로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그러고 나서 뺨과 목덜미를, 제일 쓰라렸던 눈썹 부근을 매만져 보았다.
상처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 ❖ ❖
무슨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을 통하는 것이 아닌 메이 본인이 직접 호수로 올 것. 공작이 호수로 떠나기 전 메이에게 준 임무였다.
영지의 사용인들은 쉬쉬하고 있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마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걸. 궁금할 법도 한데 그들은 메이에게 아무것도 캐묻지 않고 도움을 주었다.
“메이, 이거면 되겠어?”
“응. 고마워. 충분할 것 같아.”
“그래.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해.”
메이는 하녀들이 챙겨 준 물건을 들고 공작의 침실로 향했다. 방금 막 별채에서 돌아온 터라 손이 꽁꽁 얼어 있었다.
활동성이 떨어지는 두꺼운 옷보다는 얇은 옷을 겹겹이 갖추어 입는 편이 체온을 유지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메이는 예전에 리세트에게서 주워들은 지식과 생활의 지혜를 십분 활용해 짐을 챙기고 있었다.
차곡차곡 개켜 놓은 옷이 섞이지 않게 얇은 끈으로 꽉 묶었다. 그다음에는 약초를 챙겼다.
저거는 뿌리를 달여 먹는 약초. 새빨간 열매를 가진 약초. 시큼한 맛이 난다는 약초. 생으로 먹으면 독이 된다는 약초. 개구리의 발바닥같이 괴상하게 생겼지만 어쨌든 저것도 약초.
하도 많이 봐서 약초의 특징까지 외워 버렸다.
고기를 먹고 싶다고, 약초 말고 씹을 게 필요하다는 괴짜 연구원님을 위해 준비한 소시지까지. 준비는 얼추 마무리되었다.
메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갑작스레 울적해져 약초를 종류별로 묶고 있던 메이의 손이 힘을 잃었다.
공작의 얼굴은 곧 죽을 고목나무처럼 메마르고 시들어 파스스 깨어질 것만 같았다. 정말로 손끝만 가져다 대도 부서져 버릴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서 차마 리세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묻지 못했다.
메이는 애써 우울한 기분을 떨쳐 내려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짐 가방을 다 쌌을 때 또다시 불길한 생각이 뇌리에 찾아들었다.
전쟁이라니…….
덜컥 불안해져 빠르게 고개를 털었다. 가방을 들고 문밖으로 나선 메이는 채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버렸다. 평소답지 않게 너무나도 소란스러운 탓이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뭐, 호수?”
호수라는 단어에 놀란 메이는 웬 소란인가 싶어 재빠르게 달려갔다. 무거웠던 양손이 가벼워졌다는 것도 모른 채, 모여 있는 사용인들 틈을 파고들어 가 이 소란의 원인을 마주했다.
“황제 폐하의 보좌관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경우가 있다니. 내가 자네들과 말다툼을 벌이려 이곳까지 온 줄 아나?”
자신을 황제의 보좌관이라며 소개한 남자는 씩씩거리며 콧김까지 뿜어 댔다.
“이 추운 겨울에 호수라니. 이곳만 전쟁을 피해 간다던가? 1년 동안 쉬겠다 선언하고 떠나더니 아주 살판이 났군! 폐하의 서신을 이리 무시하고도 델피니움 공작가가 무사할 줄 아는 건가? 더 늦기 전에 어서 공작을 이곳으로 불러오든 아니면 공작이 있다는 호수의 위치를 알려 주든, 빨리 서두르게!”
빠르게 호통이 쏟아지는 와중에 집사와 메이의 시선이 부딪쳤다. 어서 가 보라는 집사의 눈짓을 읽은 메이는 곧바로 돌아섰다.
호수를 향해 달려가는 발걸음이 얼어붙은 땅을 박차고 나갔다.
❖ ❖ ❖
그런 날이 있다. 꿈을 꾸지 않아도, 안 좋은 일 하나 없어도 문득 불안해지는 그런 날.
카에덴 델피니움은 원인 모를 불안감을 끌어안고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기껏해야 이제 막 점심때를 넘겼는데 무척 긴 하루가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며칠 전 저녁에는 리세트의 마력이 관찰되어 축제 같은 분위기로 잠시 들떴었다. 없던 식욕이 샘솟아 수프도 세 그릇이나 비우고 딱딱한 육포와 질긴 빵까지 꺼내 간만에 포식을 즐겼다. 물론 그와 노바르만 기뻐했다. 요한은 더욱 슬픈 표정을 짓고 호수를 지키고 서 있을 뿐,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안 먹겠다는 사람의 입을 무턱대고 벌릴 수도 없고. 애석하게도 요한의 입에 손을 댈 용기 있는 자가 이곳에는 없었다.
이런, 아니지. 아마 이 세상 어디를 뒤져도 없을 터였다. 리세트를 제외하면 말이다.
시간을 잘 지키는 하녀가 오늘은 늦는 듯해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매서운 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는 나무가 헐벗은 채로 흔들리고 있을 뿐, 저택으로 이어지는 그 길의 끝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늦으려나 보다. 간단하게 생각한 그가 막 다시 호수로 눈길을 돌렸을 때였다.
“연구원님!”
불안한 예감에 한층 더 힘을 실어 주는, 이 적막한 숲을 흔드는 목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