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26)화 (126/151)

126화
시린 계절

올해의 가을은 너무나도 짧게 지나갔다. 미처 겨울을 대비할 새도 없어 농작물이 얼어 죽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전쟁의 승리를 축복해 주는 것만 같았던, 그 찬란한 햇살이 비치던 땅에 서리가 내려 소복이 쌓여 있었다. 무르익은 열매를 딸 생각에 들떠 있던 사람들의 원성은 처음에는 야속한 날씨로, 그다음에는 신을, 황제를, 다시 비정한 날씨를 향했다.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어 갔다.

신전에 찾아가 몇 날 며칠을 신께 기도를 올려도 그들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쟁 때만큼이나 배를 곯는 사람들이 늘어나 어느 영지를 막론하고 울음소리가 떠나갈 날이 없었다. 먹고 죽을 식량도 없는 마당에 세금을 더 거둬 가겠다는 소식이 벼락처럼 찾아왔고, 제국민들의 생활은 곤궁해져 더 이상 세금으로 충당할 작물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네들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영주들은 세율을 조정해 주지 않았다. 그런 일이 빈번해지자 영지마다 크고 작은 분란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결국 귀족들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일이 벌어지고 만다.

두 사람 이상 모이기만 하면 제국민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어째서 영주들은, 제논의 황제는 이 팍팍한 삶을 어떻게든 살아 내고자 하는 백성들을 쥐어짜는 걸까. 그 긴 전쟁을 보상해 주겠다며 낮춰 준 세율을 4년간 동결해 주겠다 했으면서. 마치 토벌 전쟁을 준비하던 그 3년 전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때도 꼭 이러지 않았나.

합당한 이유를 알려 주지 않고서 세율을 올리고, 원성이 높아지면 그제서야 부랴부랴 전시 사태를 선포하고…….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된 의문은 손쓸 새도 없이 퍼져 나갔고, 괜한 혼란을 야기할까 싶어 침묵을 고수하던 황실과 중앙 귀족들은 결국 예상보다 이르게 각 지방에 전쟁이 발발할 조짐이 보임을 선포했다.

어느 때보다도 혹독한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황궁의 회의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고함이 판쳤다.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만 넘쳐 났다.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제국민들의 원성을 들어 줄 희생양이 필요할 뿐이었다.

어제보다 멀쩡히 시작된 회의는 한 시간도 채 넘기지 못하고 싸움의 장이 되어 버렸다.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중앙 귀족뿐만 아니라 영지를 거느린 자라면 누구든지 회의를 참관할 수 있게 해 주어 온갖 곳에서 고성이 오고 갔다.

앉으라고 놓아 준 의자에 제대로 앉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점잖은 몇몇이 자리를 지킬 뿐, 대다수가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일어나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앉아 회의를 참관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게 진작 소탕했으면 좋았겠지요! 영지민들을 느슨하게 풀어 주면 안 된다고 끝까지 반대하던 게 오블고 백이 아니었습니까?”

“내 의견에 제일 먼저 동조한 게 자네였네!”

가장 목소리가 큰 두 사람 사이로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두 분께서 책임을 지시면 되지 않습니까. 제 영지에서는 더 이상 세금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벌써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말이 안 될 건 또 뭐랍니까?”

“어허, 이 사람이!”

의자에 앉아 돌아가는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황제가 팔걸이를 내려쳤다.

“지금 경들이 이러고 있을 때인가!”

마력을 실은 목소리가 귓구멍을 뚫듯이 들어왔다. 귀족들은 얼얼한 두 귀를 막으며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황제의 주도하에 회의가 재개되었다.

시간이 없었다. 날씨가 더욱 혹독해지기 전에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본래대로면 후방을 지킬 전투 계열의 마법사들까지 죄 끌어다 선발대에 대거 포진하기로 결정지어졌다.

선방은 공격, 후방은 방어로 철저하게 역할을 분담했다.

공격선이 무너져 몬스터들이 후방으로 치고 들어오는 그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누군가 반론을 제기했지만 그다지 이목을 끌지는 못했다.

그렇게 병력에 관한 문제가 시끄럽게 해결되고 나자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문제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여러 안건이 남아 있지만 우선 물자 조달에 관한 것부터 의견을 나누었다.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양도 한계에 도달해 이 이상 세율을 올리는 건 무리라는 데는 다들 인정하는 바였지만, 그것을 타개할 방법에 관해서는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현지에서 조달하자는 의견과, 정녕 미친 것이냐는 반대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상대적으로 연륜이 있는 귀족들은 이 전쟁을 무탈하게 최단 시간에 끝내야 한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물자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백성들에게 다음 해의 세금을 미리 거두는 대신, 그만큼의 이자를 더해 돌려주는 건 어떻겠느냐는 입장을 취했다.

젊은 귀족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들고일어나 반발했다. 고혈을 쥐어짤 수도 없는 상황이거니와 현지에서 조달하면 되지 않겠냐며 의견을 개진했다.

다행스럽게도 전쟁에 참여 의사를 밝힌 연합국 중 풍작을 이룬 왕국에서 물자를 확보해 주겠다는 입장을 전달해 이 안건도 무사히 끝맺을 수 있었다.

“크리프 후작의 시신은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답니까?”

아트반 크리프의 생사 확인이 그다음 안건으로 올라왔다.

시신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남발하지 말라며 타박하던 귀족들도 이제는 크리프 후작의 전사를 받아들였다. 다만 아직까지 시신을 발견할 수가 없어 공표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의 시신은 후방의 지원을 받아 수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제 남은 안건은 하나. 요한 델피니움 공작의 부재였다.

영지에 틀어박혀 통 나오질 않는 공작은 황명까지 무시하며 답신 하나 보내오지 않았다.

공작 부인의 상태가 많이 위중한가?

그렇다고 해도 전쟁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는 문제가 아닌가.

걱정하던 귀족들도 슬슬 부아가 치밀어 당장 공작을 끌고 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때마침 카에덴 델피니움도 영지에 있다고 하니 공작과 함께 수도로 데려와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노바르 로슈만의 이름도 당연하다는 듯 따라왔다.

치열하게 고민하던 황제가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지금은 명백한 전시나 다름없는 상황. 언제까지고 공작의 대답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델피니움의 영지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 ❖ ❖

카에덴 델피니움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작더미에 마른 장작을 몇 개 더 던져 넣었다. 화력이 약해져 잠잠해지고 있던 솥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와 음식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의 자리 옆에는 수프를 끓이는 작은 솥이, 노바르의 자리 옆에는 각종 약초를 우려내는 거대한 솥이 있었다.

추위에 익숙지 않은 그는 훈기를 돋우는 장작불에 의지해 손을 녹였다. 정상적인 색을 가진 불꽃이 타오르는 걸 보면 조금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러다 문득 그는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저게 사람인가.

사람이기는 한가.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 특히 요한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호수 앞에 꼿꼿이 서서 날을 지새우는 요한의 자세는 오늘도 반듯했다. 얼굴이나 차림새도 멀끔했다.

일주일이 뭐야, 하루만 지나도 미친놈처럼 물에 뛰어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 달이 넘도록 요한은 잘 버텨 내고 있었다.

국자로 수프를 퍼 올리는 카에덴 델피니움의 손에서 희미한 파란빛이 어른거렸다. 잠잠한 그 빛처럼 호수도 그저 잔잔하기만 했다. 스무 개의 방어 마법진을 겹겹이 둘러싸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 게 허무하리만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잘하고 있는 거겠지?

리세트가 걱정되어 호수 주변을 빙 둘러본 그의 시선이 어느 지점에서 우뚝 멈추었다. 걸어 다니면서 일일이 방어 마법진을 점검하고 있는 노바르가 보였다.

그래도 쟤는 사람 같다.

퀭한 눈을 한 노바르는 영혼이 달아난 듯한 얼굴로 약초 뿌리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는 그의 꼬락서니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다. 요한만 멀쩡한 얼굴이지. 속은 제일 썩어 문드러졌을 테지만.

호수에 마법진을 펼친 지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다니.

그것을 자각하자 초조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시간을 길게 끌어서는 안 된다. 그럴수록 리세트는 점점 더 그 무의식의 세계에 갇히게 될 텐데, 이 사실을 알리기에는 요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잠자코 기다렸다.

리세트를 믿고 지금껏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똑똑한 아이이니 무탈하게 해결할 것이라며.

호수가 평온한 건 좋은 일이었다. 마력을 그만큼 잘 억누르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으니.

그런데 계속되는 황제의 독촉이 마음에 걸렸다. 필요한 물건들과 소식을 가져다주는 하녀 메이 하핀이 황제의 친서를 가져오는 빈도수가 근래 들어 눈에 띄게 늘었다.

전쟁이라니. 하필 지금이라니. 미칠 노릇이었다.

“리세트. 제발 빨리 좀 일어나라.”

❖ ❖ ❖

서리가 내린 호수는 새하얬다. 마력으로 물들어 있어 파란빛이 감돌기는 했지만 멀리서 보면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고 보아도 될 정도였다.

요한은 무릎을 굽혀 앉아 흙을 만져 보았다. 겨울의 기운이 깃들어 딱딱하고 차가웠다. 물에는 닿을 수가 없어 괜히 흙을 건드려 보게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처음에는 꼬박꼬박 날짜를 셌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리하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을 자각하면 호수로 뛰어들고 싶어졌다. 못 견디게 리세트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어느덧 매서워진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을 때 자연히 한 계절이 지나갔음을 알았다. 호수에 떠다니는 분홍색 꽃잎이 혹독한 계절을 나고 있는 이 호수의 유일한 생기였다.

“네가 싫어하는 겨울이 왔어, 리세트.”

추운 게 싫고, 그래서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하는 게 제일 슬프다는 너는 그 차가운 곳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눈을 뜨면 많이 놀랄 텐데. 감기를 호되게 앓으면 어떡하지. 헤엄을 칠 수 있다는 걸 아는데, 그럼에도 리세트가 물에서 나오지 못할까 봐 좀처럼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몸을 씻고 이곳에 올 준비를 갖추는 그 잠깐 사이에도 머릿속에는 오직 호수의 풍경만 그려졌다. 보이는 건 그것이 전부였으니까.

리세트의 얼굴도, 은빛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요한이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닿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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