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너를 떠나보내는 시간
온 세상을 쓸어버릴 것처럼 비가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제대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쏟아져 내리고 그마저도 부족하다는 듯 점점 더 빗줄기가 굵어졌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듯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요한의 몸을 밀어 냈다.
그 바람에 밀려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고,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고, 그렇게…….
시야가 흐려지고 정신은 물에 잠긴 것처럼 아득해졌다.
마치 나무가 소리 내 울기라도 하는 양 나뭇잎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질척이는 흙 위에 나동그라진 초록빛 잎사귀가 그 자리를, 저와 한 몸이었던 나무를 떠나고 싶지 않은지 온몸으로 들러붙어 비바람을 견뎠다.
갑작스레 내린 폭우는 생동감 넘치던 숲의 빛깔을 모조리 앗아 갔다. 때가 되면 돌아오는 새들도, 붉게 물들기 시작하던 잎사귀도, 이 모든 것을 아울러 떠받치던 흙과 찬란한 빛을 흩뿌리던 하늘까지도. 모든 걸 빼앗아 갔다.
세상에 종말이 들이닥친 것처럼 이토록 소란스러운데, 너의 잠을 깨우지는 못하는구나.
조금이라도 비를 막아 주고 싶어 요한은 자세를 고쳐 안아 리세트의 고개를 제 어깨에 더욱 깊이 묻었다. 뜨겁고 거친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한겨울의 바람보다도 차가운 빗물에 흠뻑 젖은 요한의 몸은 리세트와 닿아 있는 부분만 뜨거웠다. 그 부분만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릎을 적시는 수면이 발목을 붙잡는 것처럼 질척였지만 요한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마법진에 제대로 마력이 자리 잡으면 기류가 생길 거야. 그때 나와. 늦으면 안 돼.’
그 당부를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기억에 되새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위태로운 마음이 이 바람을 따라 흔들릴 때면 소리 내 중얼거렸다.
늦으면 안 돼. 늦어서는 안 돼. 멈추면 안 돼.
멈추면…… 안 돼.
수심이 점점 깊어질수록 이를 악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팽팽하게 당겨진 턱 근육이 경직된 것처럼 굳어졌다. 부서질까 덜컥 겁이 나 리세트를 안은 팔에서는 의식적으로 힘을 풀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허리 아래까지 수면에 잠겼다. 조금만 더 가면 그를 집어삼킬 정도로 수심이 깊어진다.
살을 저미듯 싸늘한 냉기가 전신을 쓸었다. 가슴팍까지 수면이 올라오자 요한은 문득 시선을 내렸다. 물에 젖게 하고 싶지 않아 높이 안아 들었던 리세트의 하반신도 어느새 물에 잠겨 있었다. 언제나 잠이 든 리세트의 몸을 감싸던 프릴과 리본은 물에 젖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마법진의 중앙에서부터 마력이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요한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는 양초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수면을 통과해 밑으로 내려갔다. 밑으로, 더 밑으로 뻗어 나가 마침내 마법진에 닿았다.
바람에 휩쓸려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가녀린 빛이 호수를 밝혔다. 새까맣게만 보이던 호수 아래에 낯익은 빛무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곳이 파랗게 물들면, 너를 놓아주어야 하겠지.
쓰린 한숨을 토해 내는 입술을 달싹이던 요한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리세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 불안에 기인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종내에는 눈물이 되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눈물은 빗물에 씻겨 자취를 감추었다.
요한의 시선은 다시 리세트에게 돌아갔다. 주변의 모든 게 흐릿한데, 리세트만 또렷하게 보였다.
언제나 그랬다. 리세트를 만난 순간부터 다 죽어 가던 요한의 세상에서는 오직 그 빛 하나만 반짝였다. 싱그럽고 맑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영원히 네 눈 속에 담기고 싶었다. 언제나 너뿐이었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그런 유치한 협박이라도 해 볼까.
내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내던진다고 하면 네가 화를 내면서 눈을 떠 줄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고, 농담이었다고 말하면 그 눈으로 다시 나를 담고 미소 지어 줄 것만 같았다. 그런 질 나쁜 농담은 다시는 하지 말라며 경고하겠지.
하지만 요한의 입술은 전혀 다른 말을 건넸다.
“리세트, 그거 알아?”
세상을 지워 버릴 것처럼 내리는 빗소리조차도 요한의 목소리를 빼앗아 가지는 못했다.
“너무 슬픈 일이 있으면 눈물이 나잖아. 어머니와 동생이 죽고 난 후에는 혼자 남게 되는 순간이 오면 계속 눈물이 나더라. 멈추는 날이 오기는 할까 싶게,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아야 하니까, 자리를 지켜야 하니까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실 난……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었어.”
요한은 잠시 멈추어 서서 리세트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몇 번이고 그 거짓말을 반복했다. 조금도 괜찮지 않지만 그 말을 주문처럼 외우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만 같아 절박하게 속삭이던 날이 많았다. 그리고 그건 나름대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주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그 거짓말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때는 거짓말이라는 것도 몰랐다. 정말 괜찮아졌다 생각했으니.
그러던 어느 날, 넓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다 참을 수 없이 슬픔에 젖어 들던 밤에 요한은 그 거짓말을 버렸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더는 자신을 속일 수가 없어 다른 말을 찾아 헤맸다.
괜찮아질 거야.
눈물을 한차례 쏟아 내 이불을 다 적시고 나서는 그 말을 붙잡고 늘어졌다. 괜찮아지게 해 달라고,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 모든 게 소용없었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괜찮아지지 않았다.
어렸을 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인정하자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나중에는 눈물이 안 나더라. 너무 슬픈데, 계속 더 슬퍼지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어. 이제 더 흘릴 눈물이 없는 걸까, 눈물이 다 말라 버린 걸까 싶었거든. 그런데…….”
미처 의식을 거치지 못한 말이 마치 빗물에 쓸려 내려가는 눈물처럼 쏟아졌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눈물에 녹아들었다. 차디찬 빗물도 뜨거운 눈시울을 식혀 주지는 못했다. 호수에 내린 어둠도 붉어진 눈시울을 가려 주지 못했다.
그사이 호수를 밝히는 빛 하나가 더 늘어났다. 너를 떠나보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시 떨어져 있는 것뿐이라고, 금방 이 시간도 지나갈 거라며 속삭여 보았지만 초조해지는 마음을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계속 사라진다. 너와 함께 있을 시간이.
요한은 리세트에게 상처로 남았을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진심으로 사죄했다.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축하해 주지 못했던 것. 아기가 찾아온 기쁨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고 억눌러야만 하는 상황을 주었던 것. 리세트 모르게 아기를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
그 말을 듣고서도 차마 앞으로 나서지 못했을 그 마음을, 그때의 기분을 느끼게 해 미안하다고. 손목에 제어구를 채워 침실에 발을 묶어 뒀던 것도, 지금 이 모든 일까지 포함해 전부 미안하다고.
마치 이 비처럼, 끓어오르는 울음처럼 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이 이어졌다.
잠시도 놓치기 싫어서,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리세트를 감싸 안은 팔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내가 어떻게 너를 놓을 수 있을까. 어떻게.
리세트가 들을까 봐 차마 소리 내 울지 못했던 요한의 입술이 서러운 울음을 쏟아 냈다. 요한은 간절히 바랐다. 제발 이 비가 숨겨 주기를. 너에게 이 소리가 닿지 못하게 해 주기를.
이르게 찾아온 어둠이 내린 호수와 숲을 파란빛이 압도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사라져 간다. 붙잡을 수도 없게. 너무나도 빠르게. 시간이 흘러간다.
문득 이곳에서 함께 보낸 소중한 추억이 떠올랐다.
한 번만 새를 만져 보고 싶어 호숫가를 서성이는 리세트, 간식을 먹고 싶은 걸 꾹 참고 그의 다리를 베고 누운 리세트, 숲의 향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웃고 있는 리세트, 커다란 꽃다발을 보며 사르르 미소 짓던 리세트. 그토록 사랑스럽게 웃었던 나의 연인, 리세트 델피니움.
어째서 너를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에 그 아름다운 기억이 나를 찾아왔을까.
“많이 궁금했을 텐데…….”
그 소문을, 그 진실을 제 입으로 절대 밝히지 않으리라, 끝까지 숨기고 덮으리라 다짐한 긴 시간이 허무하도록 떨리는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리세트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말하지 못했어.”
그까짓 게 다 뭐라고. 지금까지 마음 졸이며 네가 주는 행복을 기쁘게 누리지 못했을까.
리세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거짓으로 쌓아 올린 행복이니까, 리세트가 아는 그의 모습은 극히 일부분이니까, 그래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리세트가 진실을 알게 되면 끝날 행복이라고, 언제나 그런 생각에 휩싸여 살아왔다.
행복했지만 못 견디게 불안한 시간이었다. 리세트가 그의 세상에 찾아와 주었을 때부터 늘 그랬다. 불안에 떨었다. 버려질까 봐, 나를 두고 떠날까 봐,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사이로 멀어질까 봐.
타인의 입을 통해 이미 리세트는 그 소문을 다 알고 있는데도, 그럼에도 그의 곁에 있어 주던 그 진심을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 의심했던 건 그였다. 리세트는 티끌 없는 애정을 아낌없이 퍼부어 주었는데도 그가 믿지 못했다. 바보같이. 한심하게. 진실을 숨겨 가면서.
“비겁하지? 네가 듣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이제 와 이런 얘기를 하고.”
중앙에 모여 있던 마력이 가장자리로 퍼지기 시작했다. 요한의 마력으로도 누르지 못할 정도로 수면 아래가 요동치고 있었다.
이제 리세트를 보내야만 하는 시간이 왔다.
“추울 거야.”
곁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요한은 이마에 입을 맞추어 그 마음을 전했다.
비가 내려 리세트의 얼굴을 닦아 주어도 물기는 조금도 지워지지 않는데. 흠뻑 젖어 버린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본들 오히려 더욱 번지기만 할 텐데.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요한은 떨리는 손으로 리세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빗물이 마르기라도 할 것처럼, 어느새 붉어져 있는 눈시울을 매만졌다.
“미안해.”
춥고 어두운 곳에 너를 홀로 남겨 둬서, 미안해.
요한은 그만 리세트의 몸을 조심스럽게 호수에 놓아주었다. 리세트를 떠나보내는 손이 시리도록 아렸다. 마법진에서 뻗어 나온 마력이 실처럼 변해 리세트의 몸을 휘감아 밑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리고 비가 그쳤다.
숲과 호수를 흔들어 대던 거센 빗방울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숲은 다시 고요 속에 잠겨 들었지만 리세트가 가라앉는 그 주변에는 잠시도 그치지 않는 비가 내렸다. 오래도록 떠나가지 않는 뜨거운 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