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호수
그들을 따라온 마부 두 명과 사용인 여섯 명은 짐을 실어다 나르고 물러갔다.
리세트의 상태를 살펴야 해 요한은 마차 안에 머물렀다. 남은 두 사람은 마차를 등지고서 일에 착수했다.
노을에 물든 호수를 바라보는 요한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분명 아름다운 광경일 텐데 요한의 눈에는 피처럼 붉어 보일 뿐이었다. 새 한 마리 날아들지 않는 호수가 그의 상념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다.
카에덴 델피니움과 노바르 로슈만이 저토록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준비가 더뎠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리세트의 등에 새겨 넣은 마법진과 똑같은 것을 호수 바닥에 펼치고 있었다. 파란빛이 감도는 손이 신중하게 허공을 짚어 나갔다. 그의 손이 그려 내는 문양이 하나씩 나타나 호수 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옆에선 노바르는 양초에 불을 붙이고, 들고 있던 작은 접시 위에 촛농을 떨어트렸다. 어느 정도 지지대 역할을 할 만큼 양이 쌓이면 양초를 그 위에 꾹 눌러 단단히 고정시켰다. 호수에 그려지기 시작한 마법진 위의 수면으로 그가 만든 것을 띄워 보냈다. 마력에 물든 촛불이 새파란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저토록 거대한 마법진은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유지하기 힘들었다. 고르게 마력을 분배하기 위해 양초의 불을 빌려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으려면 마법진이 완성될 때까지 양초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양초가 물살에 휩쓸리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오직 자연의 힘에 비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이 간절한 염원이 통했는지 숲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했다.
계속 그럴 줄로만 알았다.
요한은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호수에 옅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요한의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담겼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오려면 족히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데 탁한 회색빛으로 점점 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덮어 버렸다.
“물이 많으면 좋긴 한데, 왜 하필 지금이야. 자리 좀 잡고 내릴 것이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카에덴 델피니움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호수 위에 유유히 떠다니던 도형들이 한곳에 모이기 시작할 무렵, 창문에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잔잔하던 호수에 파동이 일듯 빗물이 닿은 수면에서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어느새 빗방울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센 비가 내렸다. 지척에서 보이던 카에덴 델피니움과 노바르 로슈만의 얼굴조차 알아볼 수도 없게 창문에 빗방울이 가득 맺혔다.
요한은 초조한 시선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불빛의 이동 경로를 쫓아갔다. 그 자리에 멈추어 있어야 하는 양초가 호수의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지 불빛이 계속 움직였다.
리세트를 품속으로 더 깊이 당겨 안으며 요한은 창문을 열었다. 쏴아아-, 세상을 비로 적시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들이치는 빗물이 얼굴과 옷을 적셨다.
“마법진은 완성된 거야?”
요한은 목소리를 높여 카에덴 델피니움을 불렀다.
“어, 수식까지는. 이제 마력만 공급해 주면 되는데 저 양초들이 고정이 안 돼. 저것만 해결되면 나머지는 순식간에 끝낼 수 있는데…….”
큰 소리로 대답하던 카에덴 델피니움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빗소리에 먹힌 건 아니었다. 다만 너무 놀라서,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두려움마저 들어 입술이 저절로 닫혔다.
똑똑하고 무서운 놈.
카에덴 델피니움은 경탄과 두려움이 섞인 시선으로 요한을 보았다.
요한의 마력이 호수 전체를 눌러 억지로 소란을 잠재웠다. 비가 내리는 게 거짓인 양 호수에는 작은 파동도 일지 않았다. 빗물이 떨어지는데, 폭우처럼 쏟아지는데 그저 무력하게 호수 아래로 가라앉을 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저 방대한 마력은 언제 보아도 경이롭네.”
허, 가볍게 실소한 카에덴 델피니움의 눈길이 옆으로 옮겨 갔다. 노바르는 대답하는 것도 잊었는지 멍한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마무리해야지, 노바르.”
그가 부드럽게 타이르듯 부르면 노바르는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아, 네!”
오늘도 여전한 반응을 보여 준 노바르의 외침이 빗소리를 압도할 만큼이나 우렁찼다. 그 즉각적인 반응을 칭찬하듯 웃은 카에덴 델피니움은 무탈하게 자리에 안착한 양초의 심지에 조금씩 마력을 흘려 보냈다.
희미하게 파란빛을 내던 불꽃의 색이 진해졌다. 노바르는 방어 마법진을 펼쳐 호수 주변에 거대한 장막을 만들었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요한은 조심스럽게 리세트의 몸을 안아 들었다.
“이제 갈까?”
요한은 전혀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듯 감싸 쥐고 있는 리세트의 어깨를 부드러운 힘으로 조금 더 당겨 품에 밀착시켰다.
“밖에 비가 내려. 조금 많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요한은 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무 놀라지 마, 리세트.”
마차에서 내려서자 금세 온몸이 비에 젖었다. 마차 밖의 세상은 안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어둡고 음습해 보였다. 요한은 그 새까만 세상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마침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잘 왔네.”
가까이 다가온 요한을 돌아본 카에덴 델피니움의 눈살이 와락 찌푸려졌다. 원래도 비 때문에 가늘게 뜨고 있던 눈매가 한층 더 가늘어졌다.
요한에 품에 파묻히듯 안겨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그의 눈은 똑똑히 알아보았다. 리세트의 옷이 바뀌었다는 걸. 조금이라도 편해지라고 잠옷으로 갈아입힌 듯했다. 그 정신머리로 옷은 또 언제 갈아입힌 것인지.
여러 말을 하는 대신 그는 조금 옆으로 물러나 길을 비켜 주었다.
망설임이 길 줄 알았던 그의 생각을 비웃듯 요한은 단번에 호수로 발을 내렸다. 수면은 한 번도 꿈틀대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쏴아아아-
그사이 더욱 거세진 빗소리가 숲에 내렸다.
❖ ❖ ❖
이번에야말로 요한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보이는 족족 틈새로 몇 번이고 뛰어내렸지만 리세트는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숨이 막히고 불이 옮겨붙은 양 몸이 뜨거웠다. 고통스러웠지만 리세트는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이곳을 빠져나가려 할 때마다 몸을 타고 오르는 열기가 점차 더 번지는 듯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잠깐이라도 멈춰 서면 환영에 먹힐 것 같았다.
멀리서 기다리기만 하던 엄마 아빠가 이제는 지척에 와 리세트를 안고 있었다. 몸을 감싼 그들의 팔을 떨쳐 내고 발걸음을 뗄 때마다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리세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전해졌다. 귓가로, 피부로, 점점 더 멍멍해지는 정신으로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고개를 털며 리세트는 다시 눈앞에 나타난 틈새로 뛰어내렸다.
이 까마득한 통로를 벗어나기 전에만 요한의 마력을 마주칠 수 있었다. 허공에 넓게 퍼져 있기만 하던 마력은 이제 동물의 형상으로 변해 리세트를 가지고 놀았다.
어서 잡아 보라는 듯이 꼬리로 리세트의 어깨를 툭, 세게 치고 달아났다. 거대한 무언가로 변했다가 강아지로, 그러다 고양이로, 이제는 무엇으로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작은 동물인 듯했다.
초점이 흐려져 리세트는 손등으로 눈 주변을 거칠게 문질렀다.
무작정 뛰어내리기만 한 건 아니었다. 리세트는 몇 가지 알아낸 사실을 되새기며 방어 마력을 끌어 올렸다. 통로 끝에 다다를 때쯤 그 마력이 모습을 바꾼다. 그 찰나의 시간, 마력의 기운이 잠시 약해지는 그때가 지금으로선 유일한 기회였다.
발끝이 바닥을 딛고 선 것과 동시에 리세트의 입술 끝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휘어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리세트는 억세게 힘을 실어 주먹을 쥐었다.
하아, 긴 숨을 내뱉자 울컥 속에서 무언가 치밀었다. 리세트는 목구멍을 밀고 나오려는 것을 꾸역꾸역 삼켜 내며 숨을 골랐다. 입꼬리에 맺혀 있던 새빨간 것이 턱 끝을 지나 발등으로 툭 떨어졌다.
손을 찢어발길 듯 날뛰는 마력이 손가락을 기이하게 꺾을 것만 같아 리세트는 더욱 세게 주먹을 틀어쥐었다. 손등에 불거진 핏줄이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다 잡지도 못해 겨우 꼬리만 붙잡았을 뿐인데도 팔이 후들거렸다.
“잡힌 주제에 왜 이렇게 날뛰어.”
그 말이 아니꼬웠는지 동물의 모습을 한 마력의 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러게 방심하지 말았어야지.”
당장이라도 꺼질 듯이 목소리는 느릿느릿 이어졌다.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모르고서 리세트는 흩어져 있는 생각들을 하나씩 모아 나갔다.
“가만히 있어. 널 어떻게 할지 내가…… 생각 좀 하게.”
어렵게 잡긴 했는데 이다음은 어떻게 하지? 지금 내 마력으로 이걸 누를 수 있을까.
이 순간에도 리세트의 몸을 엄마 아빠가 끌어안고 있었다. 방어 계열의 마력은 미쳐 날뛰는 이 마력을 잡느라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얼마나 마력이 남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의식을 잡고 있느라 그마저도 힘들었다.
리세트는 떨리는 손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벌써 엄마를 도와주는 것인지 아기는 똑똑하게 치유 계열의 마력만 흡수하고 있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마력이 빠져나가는 게 무서울 정도로 생생했다. 그러다 리세트는 문득 떠올렸다. 요한의 마력을 받아들이던 순간의 그 느낌을.
기억을 뒤져 가며 리세트는 쥐고 있던 마력을 조금씩 몸속으로 이끌어 보았다.
죽을 것처럼 심장이 쥐어짜지는 듯해 멈추려 했지만, 엄마 아빠의 모습을 꾸민 환영이 점차 멀어졌다. 어둡기만 하던 공간에 아주 적은 양이지만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리세트가 가진 본래의 마력이 뿜어내는 빛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리세트는 한 손으로 목을 부여잡았다. 불꽃을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찢어질 듯 뜨거웠다.
이대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그 전에 몸이 타 죽을 것 같았다.
의식이 꺼지고 다리가 꺾여 바닥으로 주저앉으려던 순간, 리세트의 몸을 고통스럽게 조이던 열감이 차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리세트는 바닥나기 직전인 마력을 그러모아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요한의 마력을 쥐고 있던 손끝에 은사처럼 가느다란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파란색 마력을 가둬 버린 은색 구체가 리세트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리세트는 그것을 꽉 움켜쥔 채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