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23)화 (123/151)

123화
괜찮을 거야

마력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것은 회유와 겁박을 번갈아 사용하며 지독하게 리세트를 몰아세웠다.

어느 날은 아름다운 꿈을 보여 주었다.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이제는 영원히 보지 못할 사람들이 나오는 꿈. 어렸을 적 가장 행복했던 그 시기의 기억은 꿈으로 되살아났다. 너무나도 달콤해 이대로 눈을 감고 싶었다.

엄마. 정말 내 옆에 있는 거야?

리세트가 물어보면 엄마는 사르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언제나 우리 아가 곁에 있을 거야. 그 목소리는 리세트의 기억 깊은 곳에 머문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너무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았던 목소리였는데, 들은 순간 곧바로 기억이 났다.

아빠도 내 옆에 있을 거지?

그런 질문조차 황당하다는 듯이 아빠는 껄껄 웃으며 리세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농기구를 잡는 손 특유의 투박함과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손길은 어린 리세트에게는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것 중 하나였다.

리세트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달려가려던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낯선 목소리가 찾는 사람은 리세트였다.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저토록 내 이름을 애달프게 부르는 걸까.

리세트가 다가오지 않자 부모님이 채근하듯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와 안기라는 그 품으로 달려가고 싶었는데,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데 다리가 바닥에 박힌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이상했다.

리세트 하리펜을 찾는 게 아니라 리세트 델피니움을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찾는 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도 리세트는 좀처럼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메아리처럼 그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조금씩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리세트 델피니움이라는 여자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 여자는 지금 이상한 자세로 자고 있나 보다. 쿠키도 엄청 좋아하는 듯했다. 포도도 좋아하고. 그리고……. 생각을 이어 나가던 리세트의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저 사람은 뭐 저런 말을 굳이 입 밖에 내는 걸까?

입을 맞추고 싶다든가, 안고 싶다든가 하는 말들은 약한 축에 속했다. 다소 낯 뜨거워 도무지 듣고 있어 주기 힘든 말도 서슴없이 했다. 그런데 막상 듣고 있자니 또 설레고 좋았다.

그 말들 속에서 리세트는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 같았다. 보고 싶다는 말도. 이마와 뺨에, 온몸 곳곳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말도.

괜스레 부끄러워 손을 꼼지락거리던 리세트는 불현듯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가 뜬금없이 쿠키 얘기를 꺼낸 탓이었다. 원하는 만큼 쿠키를 먹게 해 주겠다는 말이 너무 웃겼다.

사랑하는 사이면 먹는 것에도 간섭을 하는 걸까?

남자는 선심이라도 베푸는 듯한 말투로 마음껏 먹으라고 말했다. 당사자가 아닌데도 리세트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져 팔짱을 꼈다. 씰룩이는 콧잔등에 주름이 움푹 졌다.

어째서 저 목소리가 갑자기 듣기 싫어진 걸까?

이상한 일이었다. 너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등을 팡팡 두드리고 싶어졌다. 베개가 있었더라면 그걸 무기처럼 휘두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리세트의 분노를 녹였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에 이처럼 기분이 살랑거릴 수 있다니. 연애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구나.

듣지 않는 척 애꿎은 바닥을 발로 문지르듯 차며 리세트는 가만히 귀 기울였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람의 고백은 설탕에 절인 색색의 과일처럼 달콤하고 예뻤다. 그 사람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워 꼭 안락한 꿈을 선사해 줄 것만 같았다. 참 좋은 목소리였다.

이런 목소리의 주인이라면 분명 예쁘겠지?

예쁘지 않으면 큰 사고라도 벌어질 것처럼 리세트는 돌연 심각해졌다. 설마, 이런 목소리로 이상한 얼굴이면 안 될 텐데. 자신의 것도 아닌 남자에게 가지기에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걱정거리를 리세트는 진지하게 짚어 나갔다. 그 황당한 생각은 머지않아 끝이 났다.

저런 사랑을 받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문득 그 여자가 부러워졌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게 웃겨 리세트는 작게 키득거렸다.

이게 다 저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 그런 것이라고, 리세트는 웃음을 갈무리하며 생각했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아 서운함마저 느껴졌다.

리세트는 그 목소리를 뒤로한 채 걷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걸음이 차츰 빨라졌다. 포근한 품속으로 막 뛰어들려는 찰나에 다리가 우뚝 멈추었다.

보고 싶어.

그 말을 전하는 목소리에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

지금껏 행복한 과거를 추억하는 듯했던 목소리가 조금 다르게 들려와 리세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푸르른 나무가 빼곡히 늘어선 숲속의 작은 오두막, 채소를 길러 먹는 작지만 소중한 텃밭, 그리고 너무나도 소중한 엄마 아빠. 숲속 마을의 정다운 이웃들까지. 그 모든 것이 급작스럽게 두려워졌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그것을 깨닫자 머리가 찌르르 울렸다. 리세트는 통증이 휩쓸기 시작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평화로웠던 주변 풍경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엄마 아빠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미안해, 엄마. 정말 미안해요. 아빠…… 너무 보고 싶었는데 미안해.

어렸을 때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제 리세트에게는 너무나 멀어진 두 사람이었다. 아무리 그리워하고 애타게 불러도 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돌아가야 해.

정교한 환영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 리세트는 그 말을 되뇌었다. 끊임없이 말을 건네주는 요한의 목소리는 큰 힘이 되었다.

보고 싶어, 요한. 나도 네가 너무 보고 싶어.

간절하게 요한의 이름을 불렀을 때, 리세트의 눈에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의 몸을 감싸고 있는 파란빛의 마력이 또렷하게 보였다.

제발, 제발, 제발.

절박하게 외치며 리세트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자신의 몸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본래의 마력에 집중했다. 제발, 내 목소리 좀 들어 줘.

그 애타는 바람이 닿았는지 익숙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리세트의 손에 은색 마력이 감돌기 시작했다. 리세트를 이곳에 가둬 버린 마력이 폭풍우처럼 다가왔지만 이미 방어 마법진이 완성된 후였다.

“그만 좀 사라져!”

멀쩡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놀란 리세트의 몸이 순간적으로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렸다.

천둥이 치듯 우르르 울리던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금이 쩍쩍 가는 소리가 음산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리세트는 도리어 활짝 웃으며 발로 바닥을 쿵쿵쿵 굴렀다. 그것도 모자라 마력을 쏘아 쉼 없이 내려쳤다.

마침내 틈새가 벌어지고 몸이 기울어졌다. 리세트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그 틈새로 지체 없이 뛰어내렸다. 이제 제 몸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어둠에 시야가 먹혔다. 불길이 휘감듯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히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 순간에도 리세트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요한의 얼굴이 보일 테니까.

요한이 받아 줄 테니까.

❖ ❖ ❖

눈을 뜨고 있는 게 힘들 정도로 환한 빛이 연구실 내부를 밝혔다. 가늘게 눈살을 찌푸릴 뿐, 요한은 잠시도 리세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리세트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마력이 한 겹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요한의 보폭이 커졌다. 허공에 높이 떠 있던 리세트의 몸이 점점 기울어졌다. 그가 리세트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 빛이 폭발하듯 주위가 새하얘졌다.

요한은 바닥으로 추락하는 리세트의 몸을 받아 냈다. 폭발의 여파를 버티지 못해 요한은 리세트를 품 깊숙이 감추고 바닥을 굴렀다. 사람이 아니라 불덩어리를 끌어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리세트.”

조심스럽게 불러 보았지만 리세트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살갗을 찢고 튀어나오려는 것처럼 핏줄이 꿈틀거렸다 잠잠해지기를 반복했다. 가느다란 목과 팔, 축 늘어진 두 다리. 시선이 닿는 모든 부분이 그랬다. 요한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리세트의 맥박을 확인했다.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기라도 한 양 박동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가까이 다가온 노바르와 카에덴 델피니움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노바르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겠다며 방어 마법진을 준비했고, 카에덴 델피니움은 리세트의 몸을 타고 빠져나오는 마력이 없는지 확인했다.

“아직 리세트가 완전히 마력을 누른 게 아니야. 아마도…… 이제 시작인 것 같아.”

절망적인 말에 노바르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요한은 그의 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무어라 답하지 않았다.

“요한. 내 말을 듣고 있기는 해?”

“호수.”

한참 만에야 리세트에게서 시선을 돌린 요한이 뜬금없는 말을 뱉으며 그를 보았다.

“네가 그랬잖아. 불의 힘을 누를 수 있는 건 물뿐이라고.”

요한의 말이 불러일으킨 기억에 카에덴 델피니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래, 맞아. 내가 그랬지! 어서 준비하자. 호수로 가야 해.”

❖ ❖ ❖

카에덴 델피니움과 노바르는 준비를 마친 뒤 먼저 출발했다. 그들과 함께 가려고 했지만 리세트가 몸이 흔들릴 때마다 아픈 듯 신음을 흘려 요한은 느리게 모는 마차에 올랐다.

호수로 가는 지름길이 있지만 돌과 자갈이 많아 마부는 평지로 말을 몰았다. 노바르와 카에덴 델피니움이 탄 마차는 지름길로, 요한과 리세트가 탄 마차는 평지를 달려갔다.

리세트의 몸이 흔들리지 않게 요한은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바깥을 살폈다. 느리게 변하는 풍경에 미치도록 초조해졌지만 리세트의 어깨를 감싸 쥔 손에는 부드러운 힘만 실려 있었다. 리세트를 내려다보는 시선 또한 그랬다.

“괜찮아. 조금만…… 리세트, 조금만 참아. 곧 도착이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요한은 끊임없이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거칠어진 숨결이 리세트의 입을 비집고 흘러나올 때마다 요한은 더욱 그 말에 매달리게 되었다.

괜찮을 거야.

더 이상 마차가 움직이지 않자 요한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리세트와 함께 가을의 철새를 구경하러 왔던 그 아름다운 호수가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