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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22)화 (122/151)

122화
얼굴을 보고 있어도

몰아치듯 공간을 휘돌아다니는 마력의 움직임은 거센 울림이 되어 별채를 뒤흔들었다. 요한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내 말이 들리면, 손끝이라도 한 번만 움직여 줄래?”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리세트.”

그 간절한 목소리를 지우려는 것처럼 별채를 울리는 소리가 더욱 드높게 퍼졌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그 경계선을 넘어오지 않던 마력이 쏜살같이 요한에게 달려들었다. 공격을 튕겨 내려면 얼마든지 그리할 수 있었지만 요한은 손 하나 까딱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요한의 몸이 마력에 집어삼켜졌다. 거친 파도에 휩쓸리는 것처럼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마력은 요한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마음껏 활개 쳤다. 다시 몸으로 흡수할 수도 없고 상쇄시키기에도 어려운 듯 보였다.

무의미한 저항을 하는 대신 요한은 순순히 몸을 내맡겼다. 리세트를 둘러싼 마력을 없애려 펼쳐 두었던 마법진도 전부 파훼해 버렸다.

예상에 없던 행동에 당황했는지 공격을 퍼붓던 마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다시 리세트에게 돌아가 상황을 보듯 느릿하게 공간을 배회했다.

위협적으로 느껴질 때만 공격하는 건가.

얼굴의 반이 피로 덮인 탓인지 시야가 마치 노을빛에 잡아먹힌 것만 같았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그 찰나의 시간이 지났을 때 요한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보일 수 있었다.

리세트의 몸은 흔들림 없이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달라진 게 있었다. 그가 다가갈 때마다, 그 여파로 상처를 입을 때마다 리세트의 감긴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눈을 감고 있어도,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는 없어도 의식이 있는 게 확실해졌다.

행복해 미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요한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살며시 내리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요한의 입술에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목덜미를 뜨겁게 적신 피를 닦아 낸 손을 가볍게 털어 내며 숨을 길게 내쉬기를 반복했다.

다시 달려가려는 걸 눈치챘는지 공기의 흐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주변을 빠르게 휘돌던 마력은 불꽃으로 변모했다.

파랗게 물든 불길이 번지기 전에 요한이 마법진의 장막을 펼쳤지만 움직임을 봉쇄하기는커녕 힘이 합쳐져 위력이 거세졌다. 노바르가 곧바로 방어 마법진을 펼쳐 주변을 에워쌌다.

“얼마나 더 유지할 수 있겠어?”

요한은 방어 마법진에 마력을 쏟아 내고 있는 노바르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넓게 그려진 마법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노바르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움직임에 반응하듯 마법진도 흔들렸다.

“이제, 이제는 정말 한계입니다. 더는……!”

방어 마법진으로 뛰어 들어간 요한은 기억을 더듬어 마력의 성질을 가다듬었다. 일전에 아트반 크리프와 함께 마력을 합쳐 마법진을 유지했던 경험을 되살렸다.

평생 호흡을 맞춰 온 아트반, 생전 처음 협업하게 된 노바르 로슈만. 실패할 가능성이 높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내 말 잘 들어, 로슈만. 너의 마법진 위로 내 마력을 씌울 거야. 최대한 약하게 흘려보낼 테니 조절해서 써.”

“뭐라고요? 아니 지금, 잠깐……!”

다급히 소리치던 노바르는 제 마법진 안으로 침투한 낯선 마력을 느끼고는 이를 꽉 사리물었다.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공작을 쳐다보다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카에덴 델피니움을 부르려던 요한은 하, 기가 막힌다는 듯 탄식했다. 어떻게 요한의 생각을 읽었는지 그는 벌써 마법진을 전개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요한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카에덴 델피니움은 알아서 따라왔다. 노바르의 마법진을 엄호해 뒤에서 따라붙어 공격을 가하는 마력을 저지했다. 저쪽은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거라는 판단이 서자 요한도 제 일에 몰두했다.

가늘고 길게 마력을 다듬어 방어 마법진에 녹여 냈다. 노바르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제법 요한의 마력을 잘 다뤘다.

쫓고, 달아나고, 붙잡고 다시 꼬리를 잡아 거칠게 날뛰는 불길 같은 마력을 노바르의 마법진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바닥에 넓게 펼쳐져 있던 방어 마법진은 구 형태로 변해 허공으로 높이 떠올랐다. 꿈틀거리는 구체에 손을 올린 요한은 반항의 기색이 사라진 마력을 상쇄해 없애 버렸다.

노란빛을 뿜어내던 구체가 새하얀 조각으로 부서져 서서히 사라졌다.

“주, 죽지 않고 살았네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노바르는 찢어질 듯한 갈비뼈 부근을 누르며 숨을 헉헉 들이마셨다. 카에덴 델피니움의 꼴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지만 바닥에 쓰러지는 추태를 보이지 않으려는 듯 벽면에 기대섰다.

요한은 끈질기게 리세트를 둘러싸고 있는 마력을 보고 있었다. 무엇을 더 할 생각은 없는지 마력은 그저 고요하게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다가갈지, 조금 더 지켜봐야 할지 고민했지만 선뜻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기다리세요.”

아직도 일어설 기운이 없는지 노바르 로슈만은 무릎걸음으로 기어 와 요한의 바짓단을 움켜쥐었다.

“놔. 당분간 지켜볼 거니까.”

한동안 믿을 수 없다는 눈길을 보내던 노바르 로슈만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졌다. 당장 정신을 놓을 준비를 마치려는 듯 그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연구가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했네요.”

“저걸 성공이라고 봐도 되나?”

싸늘하게 빈정거린 요한의 반응에도 노바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마법식이 정상적으로 마법진의 형태를 갖추었으니 반은 성공이지요. 리세트가 저 상태가 된 건…… 명백한 실패고요. 또…….”

“나한테는 실패나 다름없어.”

요한은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끊어 냈다.

다 죽어 가는 얼굴이니 그만 기절해 버리든가 잠이나 잤으면 좋겠는데 노바르 로슈만은 기를 쓰고 눈을 부릅떠 버티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카에덴 델피니움은 벽에 기댄 채로 잠들어 버린 듯했다.

“제가 며칠 동안 생각을 해 봤거든요. 연구 자료도 다각도로 살펴보고 다른 자료도 취합해 봤어요. 우리 연구의 핵심은 비전 마법을 끊어 내는 거잖아요. 리세트가 마력을 조절해 억누르면서 마법진을 파훼하는 게 그 방법이고요.”

대꾸하지 않는 요한의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듯 노바르가 후들거리는 발로 바닥을 두 번 굴렀다.

리세트를 살피는 데만 온 신경을 기울이던 요한의 눈길이 느릿하게 소음의 근원지로 향했다. 잠기운에 잠식당해 이성과 겁이 사라진 모양이지?

“리세트가 마력을 제어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노바르는 제발 무모한 짓은 더 이상 하지 말라며 거듭 당부했다.

“믿고 기다리세요.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에요.”

❖ ❖ ❖

하나부터 열까지 바깥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통해 리세트는 비로소 현실감을 되찾았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이 났다. 판판하게만 느껴지던 배가 볼록한 것도 지금에서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아기의 존재도 잊고 있었을까.

마치 꼭 눈에 무언가 씐 것처럼 까맣게 몰라보았다. 리세트의 손에 우악스러운 힘이 실렸다. 허벅지 옆에 꼭 붙여 놓은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하.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요한! 내 목소리 안 들려?

목을 쥐어짜듯 힘을 주어도 소용없었다. 누군가 목구멍을 막는 것처럼 쇳소리만 입 밖으로 삐져나올 뿐이었다. 하긴, 제 귀에도 들리지 않는 걸 요한이 들을 방법은 없겠지.

리세트는 체념 어린 한숨을 내쉬며 다가오는 마력을 노려보았다. 어서 다시 기분 좋은 꿈을 꾸러 가자며 마력이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저것들 때문에 요한이 다쳤다.

쏟아지는 잠기운을 단번에 몰아내는 그 말을 리세트는 되새기고 또 생각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회유가 실패하자 마력은 사납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공간을 울리는 흐름만으로도 살기가 느껴졌지만 리세트는 눈을 부릅뜨며 위압감을 버텨 냈다.

이 세상에 후계자를 내놓으려면 섣불리 공격하지는 못하겠지. 그 예상은 역시나 맞아떨어졌다. 리세트가 가까이 다가가자 사납던 마력의 기운이 한결 약해졌다.

저 마력의 기세를 눌러야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걸 계속해서 되뇌며 리세트는 도약하듯 바닥을 강하게 딛고 달려 나갔다. 손바닥에는 저 마력을 가둘 방어 마법진을 그려 놓은 채였다.

❖ ❖ ❖

아무래도 공작이 미친 것 같다.

며칠간 유심히 그를 지켜본 노바르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공작의 일과는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일단 손에서 쿠키를 놓는 법이 없었다. 사람이 저것만 먹고 살 수 있나 싶어 식사를 권했지만 그는 물과 쿠키만 먹었다. 리세트를 바라보면서, 그저 묵묵히 씹고 삼켰다.

그것뿐이면 나았을 텐데.

공작은 눈을 감고 있는 리세트에게 말까지 걸었다. 처음에는 혼잣말인가 싶었지만 그가 내뱉는 말들은 전부 리세트에게 향해 있었다.

‘그런 자세로 잠이 들면 힘들 텐데. 괜찮아?’

소름이 절로 돋을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가 외로운 대화의 시작을 알렸다. 사실 대화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대답해 줄 이는 눈을 뜨지 못하고, 오직 질문을 건네는 사람만 있으니.

배가 고프지는 않은지, 춥지는 않은지, 쿠키가 먹고 싶지는 않은지. 일상적인 물음만 던지던 공작은 점점 대화에 살을 붙여 나갔다. 계절이 변해 이제는 포도를 구경하기 힘들어졌다며 안타까워했고,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먹게 해 줄 걸 그랬다며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거기까지만 했더라면 미쳤다고 표현하지는 않았으리라.

부끄러움 같은 건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지 공작은 낯 뜨거운 말도 술술 내뱉었다.

“보고 싶어.”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저랬다.

“얼굴을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리세트.”

처음부터 공작이 저런 짓을 한 건 아니었다. 잠을 자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던 노바르가 새벽녘에 눈이 떠지는 바람에 일찍 연구실로 걸음 했고, 하필 그때 피할 새도 없이 리세트에게 말을 걸던 공작과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안고 싶어. 입 맞추고 싶어.

너무 놀라 얼어붙은 그를 발견했으면서도 공작의 입술은 닫히지 않았다.

사랑해.

가장 보편적이고 흔한 애정 표현이지만, 요한 델피니움의 목소리로 빚어낸 그 말은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얼굴 때문인가. 울림이 깊은 목소리 때문인가.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듣고 있으면 저절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날부터 공작은 그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리세트에게 말을 붙였다. 저토록 저돌적인 인간이었을 줄이야.

헛기침을 수차례 하며 노바르가 손부채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리세트를 감싸고 있던 마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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