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네가 닿지 않아
사방이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앞으로 걸어 나가 보고 뛰어 보기도 했지만 방향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가고 있기는 한 것일까. 뒤로 더 멀리, 가면 안 되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나마 바닥의 색깔이 새하얘 상하를 구분할 수는 있었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어느 것이 바닥이고 하늘인지. 내가 딛고 선 게 땅인지조차도.
천천히 멈추어 선 두 다리에 힘이 탁 풀려 넘어질 뻔했지만 리세트는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역시나 어둠뿐이었다.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뒷걸음질 치던 리세트는 그저 캄캄하기만 한 주변 풍경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전신을 휩쓸었다.
자신의 손과 몸이 보이는 것의 전부였다. 빛 하나 없는데 이거라도 보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 하얀 바닥이 보이기도 하지.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불안감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두렵고 무서웠다.
노바르와 카에덴 델피니움의 비명이 언뜻 들리는 것 같았다. 매일같이 듣던 목소리인데도 너무나 낯설게만 느껴져 리세트는 두 귀를 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거세게 울리는 심장 박동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제 완전한 어둠의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눈을 뜨면 제 몸은 볼 수 있을 테지만, 눈을 떠 그 어둠을 목도하는 것이 더 무서워 리세트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불안정한 호흡이 점점 더 위태롭게 널뛰던 순간, 몸에 기이한 열감이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열기에 리세트는 온몸을 떨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만해. 그만. 나 좀, 여기서 꺼내 줘.
숨이 턱 막혀 와 양손으로 목을 부여잡았다. 쿨럭거리며 기침을 쏟아 내 보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요한. 요한. 요한. 요한.
그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리세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듯 헝클어트렸다. 여기서 잠이 들거나 정신을 놓게 되면 다 끝일 거라는,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 스쳤다.
요한. 요한!
더 크게, 온 힘을 다해 외칠 때마다 손아귀의 힘이 거세졌다. 그에 비례해 호흡이 마구잡이로 널뛰었다.
거짓말처럼 몸의 떨림이 멎은 건 순식간이었다. 파르르 눈을 뜬 리세트는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다. 붉은 피. 제아무리 새까만 어둠일지라도 잡아먹을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그 색이 손에 가득 묻어 있었다.
그 손을, 온몸을 감싼 빛무리가 보였다. 파란빛이었다. 너무 많이, 오랫동안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요한의 색. 안정을 되찾은 리세트의 입가에 막 미소가 담기려던 찰나, 마력을 타고 무언가 전해졌다.
리세트의 발 주변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소리가 없던 세상에 그 피가 만들어 내는 섬뜩하고 기묘한 소리가 천천히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리세트의 곁을 지켜 주듯 맴돌던 마력이 손길을 건네는 것처럼 뺨과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러니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리세트는 불현듯 시선을 내렸다.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인지하고 나서야 리세트는 알 수 있었다. 이 피가 누구의 것인지,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
리세트에게서 뿜어져 나온 이 마력 때문이었다. 본래 요한의 것이었던 그 마력이 지금 요한을 상처 입히고 있는 게 느껴졌다.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검을 다루는 기사가 된 양 제 손으로 검을 뽑아 들고 요한의 몸을 베어 내는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번져 왔다.
리세트는 토기가 몰려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속에 든 것을 다 끄집어낼 듯이 구역질을 하고 가슴을 쳐 봐도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은 멀어지지 않았다. 요한을 다치게 하는 그 느낌은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갈수록 선명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리세트.”
요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 뜨지 마.”
그 말을 유일한 희망처럼 붙잡았다. 눈을 질끈 감으며 리세트는 두 손을 맞잡아 가슴 앞에 모았다. 이 공간을 이루는 중심이 어긋나는 것처럼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쿵. 쿵. 쿵. 그 소리는 조금씩 더 가까워지다 한순간 멀어지기도, 또다시 가까워졌다가 더 멀리 밀려나기도 했다. 그런 순간이 반복될 때마다 리세트의 다리에 무언가 닿았다. 뜨겁고 끈적한 것. 새빨간 피였다. 요한의 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만져지지도 않는데. 요한이 달려오고 있는 것만은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만해. 하지 마!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리세트는 들을 수 없었다.
다가오지 않아도 돼.
그만해.
제발.
아무리 힘껏 외쳐 보아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간헐적인 숨이 삐져나오고 짐승의 것처럼 울부짖는 소리만이 리세트가 토해 낼 수 있는 전부였다.
리세트는 머리카락 끝에 묻은 핏자국을 쓰다듬듯 조심스럽게 쥐어 보았다. 머리카락 어느 곳에도 피가 묻지 않았는데, 손에 쥔 이 부분만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뺨을 타고 턱으로, 목으로, 더 밑으로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과 손목에도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바닥을 짚고 있던 손으로 눈물에 젖은 손목을 만져 보고 나서야 리세트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멈추고 싶은데, 멈추어지지 않았다.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 단어 하나 뱉어 낼 수가 없었다.
그만하라고, 요한에게 그 말을 전해 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무너지고 깨지는 소리가 번개처럼 내려치던 폭풍 같던 시간이 거짓인 양 갑작스럽게 사방이 고요해졌다. 이제 더는 요한이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다 끝났다고 리세트가 안심한 찰나에 바닥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까.
덜컥 겁을 먹은 리세트는 긴장감에 등허리를 빳빳이 굳혔지만 다행히 세상은 다시 조용해졌다. 드문드문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노바르가 요한을 다그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다행이다.
이제 요한이 다칠 일은 없겠구나.
빠르게 번진 안도감은 눈물을 그치게 해 주었다. 여전히 리세트의 세상은 어두웠지만 전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리세트는 천천히 일어섰다. 바닥에 고여 있던 피도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중심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머뭇머뭇 앞으로 다시 걸어가 보았지만 리세트는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듯한 기분만 들어 우뚝 멈추어 섰다.
굳이,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까. 벗어나야만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부드러운 바람결처럼 뇌리에 스치듯 찾아왔다. 리세트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제 다 괜찮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안락하고 포근했다. 그러니 이대로 더 머물러도 좋을 것 같았다.
걱정도 근심도 없는 세상.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었다.
노바르와 카에덴 델피니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잘 들리는 데 반해 요한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을 수가 없었다. 요한은 원래 말수가 적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내심 속상했다.
요한의 목소리만 계속 들을 수 있다면 이곳에 남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리세트는 편하게 그 자리에 앉았다. 끝이 안 보이는 앞을 멍하니 바라보며 요한의 목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렸다.
노바르의 권유로 요한이 씻으러 가 버렸다.
많이 다쳤을까. 그래서 노바르가 그런 말을 한 게 아닐까. 그런 것쯤은 내가 다 치유해 줄 수 있는데. 여기서 나가면…….
문득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리세트는 깜짝 놀라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어서 나가야 한다.
머릿속에서는 빨리 일어나라며 매섭게 다그치는데 몸은 자꾸만 축 처졌다.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리세트는 다시 안락한 평화에 빠져들어 갔다.
잠은 쏟아지고 주변은 따듯했다. 리세트는 조심스럽게 몸을 누였다.
흐릿해지는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리세트는 뺨을 비비며 바닥을 한번 쓸어 보았다.
이상하다.
아. 작은 탄식조차 흘러나오지 못하는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언제 발밑도 어두워졌을까?
아닌가……. 원래 그랬나.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바닥을 만지던 손이 서서히 느릿해져 갔다.
원래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무거운 눈꺼풀이 스르륵 닫히기 시작할 무렵에 세상이 소란스러워졌다. 안락한 세상에 다시 거센 폭풍이 밀어닥쳤다. 하지만 리세트는 일어날 힘도 없어 그 자리에 누운 채로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이대로 잠이 들고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 계속 리세트의 의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 좀 내버려 둬. 잠들 수 있게 해 줘.
모든 게 귀찮아 리세트는 몸을 돌려 누웠다. 이 소란이 멎길 바라며 귀를 틀어막았지만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리세트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주변을 지켜 주던 마력이 더 가까이 다가와 리세트의 몸을 감싸 주었다. 따스한 느낌에 생긋 미소 지어졌다.
고마워.
인사를 전하듯 손을 펼쳐 흔들어 주었더니 마력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손바닥 위에 올라와 동그란 구 형태로 뭉쳐졌다. 그것을 콕콕 찔러 보자 마력이 팔목까지 감싸듯 길게 휘감았다.
이제 귀를 못살게 구는 소음만 사라지면 잠에 들 수 있을 텐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얌전히 몸을 말고 있던 마력이 한순간에 허공으로 튀어 올라 뱅그르르 돌아다녔다. 어딘가로 뻗어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리세트를 감싸고, 그러다 또다시 사납게 으르렁대며 허공을 찢듯 사납게 움직였다.
왜 저러는 걸까.
마력을 관찰하듯 뒤를 따라다니던 리세트의 눈길이 조금씩 흔들렸다. 파란색으로 물들어 있는 마력에 붉은 기운이 차츰 번지다 이내 사라졌다.
빨간색. 피를 떠올리게 하는 색.
갑작스레 인지할 수 있게 된 그 색을 보며 리세트는 벌떡 일어났다. 이제 바깥세상의 소리가 생생하게 귓가를 타고 흘러들었다.
리세트는 정신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닿을 수조차 없는 무언가를 잡듯 손을 뻗으며 달려 나갔다. 휘적거리며 허공을 가르기만 할 뿐 소득 없는 발악이었지만 리세트는 간절하게 팔을 휘저었다.
“리세트.”
또다시 그였다. 요한 델피니움. 너무나도 사랑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내 말, 들려?”
들린다고, 너무도 또렷하게 들린다고 리세트는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