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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20)화 (120/151)

120화
목소리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뜬 요한은 얼굴에 맺힌 물방울을 손으로 쓸어 냈다. 잠을 자지 못해 눈이 뻐근한 탓인지, 아니면 수증기 때문인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요한은 눈썹 뼈 부근을 매만지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머리를 울리던 지긋지긋한 통증이 가셨다.

이마와 목덜미를 훑어 내려간 따듯한 물방울이 가슴과 복부를 지나 밑으로, 더 밑을 향해 내려가다 바닥으로 추락했다. 물방울이 그려 내는 궤적을 따라 알싸한 통증이 번져 갔다. 그가 딛고 선 바닥 위로 붉은빛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몸에 남은 상처들과 그 상처로 인해 생긴 통증이 그려 내는 현실감이 없었다면 미쳐 버렸을 것 같다.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요한은 눈을 떴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노바르 로슈만의 염려가 단번에 이해될 정도로.

‘그런 모습으로 리세트를 만나실 겁니까? 눈을 뜬 그 애가 공의 얼굴을 보고 놀라 기절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리세트는 눈을 뜨지 못했다. 서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저 잠이 든 사람처럼 보였다. 벌써 이틀이나 지나 버렸다는 건 노바르 로슈만이 종알거리지 않았으면 몰랐을 터였다.

내 앞에서 당당하게 이름으로 부르다니. 그놈도 어지간히 정신이 없던 모양이지.

노바르 로슈만은 어느 정도 기본적인 눈치는 있어서 그가 함께 있을 때는 리세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무심코 이름을 부르다가도 화들짝 놀라 곧바로 정정하곤 했다.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던 모습이 꼭 어린 날의 그 거슬리던 기억을 불러와 요한은 건조한 웃음을 지었다.

얼굴이나 몸을 가릴 것 없이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관골 언저리와 가슴팍을 길게 벤 상처가 유독 깊었다. 아직도 핏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물을 끼얹어도, 마른 수건으로 눌러 닦아 내도 멎지 않았다.

노바르 로슈만은 제발 부탁이니 의사에게 상처를 보이라고 했다. 치유 마법사를 부르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고.

내키지 않아 거절했다.

물론 의사를 만날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당연히 상처를 치료할 생각이었다. 단시간에 씻은 듯이 상처를 없애려면 의사보다 치유 마법사를 부르는 게 낫지. 하지만 그는 끝내 의사나 치유 마법사를 부르지도, 따로 찾아가지도 않았다.

혹시. 그 근거 없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만일 리세트가 눈을 떠 그를 보았을 때, 이 상처들을 보면 너무 놀라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을 것 같으니.

그가 다쳐 오면 리세트는 많이 슬퍼했다. 한껏 다정하게 상처를 치유해 주고도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상처가 있던 부위를 만지며 몇 번이고 그것들이 지워졌다는 걸 확인하곤 했다.

이번에도 그러겠지.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하는 제 모습이 한심했지만, 이런 것에라도 매달려야 하루를 버틸 힘이 생겼다.

요한은 그만 옷을 갖춰 입고 욕실을 떠났다.

별채의 1층에서 대기 중이던 하녀들에게 다가가자 그녀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필요한 일이 생기면 직접 갈 테니 별채를 비워. 이 근방으로는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고, 폭발음이 들리거나 불길이 치솟아도 이쪽으로는 오지 마.”

사색이 된 하녀들은 차마 이유를 묻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주인의 명령이니 군말 없이 따르는 것이 사용인의 도리였다. 마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 것인지, 별채를 사용하던 두 분의 얼굴은 또 왜 그리 심각한 것인지 물어서는 안 됐다.

물러가려는 그녀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명령이 하나 더 내려졌다.

“쿠키를 가져와.”

도무지 저 얼굴로, 표정 하나 없이 고요한 그 남자가 할 법한 명령 같지 않아 하녀들은 멍하니 눈만 끔뻑거렸다.

“네? 쿠키요? 마님께서 드시던, 그 쿠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용기를 낸 하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공작은 이렇다 할 대답을 하는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돌렸다.

쿠키라니.

이 상황에서 웬 쿠키지?

의아했지만 하녀들은 명을 수행하기 위해 별채를 떠났다.

❖ ❖ ❖

나흘째가 되어서야 카에덴 델피니움이 움직였다. 살아 있기는 한 것인가 의심이 될 정도로 움직임이 없던 그였다. 첫날에는 지켜만 봐도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책을 뒤적이더니 이튿날이 되었을 무렵부터는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나.

창가에 당도한 카에덴 델피니움은 이 사건의 시작점으로 또다시 돌아가 반추해 보기 시작했다.

그가 고안해 낸 마법식은 완벽하다. 완벽하지 못하다 해도 식은 식일 뿐, 실패를 한다면 그저 종이에 남은 쓰레기가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 식을 전개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고.

그런데 왜?

리세트는 왜 저런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는 걸까.

결국 또 제자리. 무슨 생각을 하든 언제나 끝은 리세트로 귀결되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그게 제일 싫었다.

리세트가 잘못된다 해도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데도 마음이 이상했다.

이게 다 저 이상한 여자 때문이다. 리세트 델피니움. 궁금한 게 많고, 시끄럽고, 요한을 사랑하는 저 여자가 문제였다.

나중에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나. 포도 말고는 먹고 싶은 게 없었는데 나중에는 쿠키랑 케이크가 자꾸 눈에 밟혔다고, 그러더니 요즘은 빵과 야채도 수월하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고 했지.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 낯설기만 했던 대화가 어느새 일상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아기가 요한을 닮는 게 좋을지, 자신을 닮는 게 이로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리세트가 웃기고 황당했다. 건강하게만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마법식이 온전한 형태로 제 몸에 새겨지니 욕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트반 크리프가 또 무슨 조언을 건넸다고도 했지.

하하, 건조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나도 다 잘될 줄 알았지.

카에덴 델피니움은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내리눌렀다.

이 일이 원만하게 끝나면 그의 연구는 성공하는 것이고, 그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난 요한의 코도 납작하게 눌러 줄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린 날에 그 상처받은 눈을 하던 꼬마에게 더 이상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는데, 그 무거운 마음을 훌훌 털어 낼 수 있을 줄만 알았다.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지만.

희뿌연 달빛이 창가에 기대선 그를 비추었다. 더 이상 리세트를 볼 수가 없어 카에덴 델피니움은 혼란스러운 눈길을 돌렸다.

이 늦은 시간에 야참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연구 자료를 뒤적이는 노바르 로슈만이 갈 곳 잃은 혼란의 표적이 되었다.

“맛있어? 넌 그게 넘어가?”

둘도 없는 친구처럼 굴 때는 언제고.

“쟤는 아무것도 못 먹고 저렇게 잠만 자는데, 너 진짜 친구 맞아?”

“그래서요?”

“뭐?”

“끼니도 거르고 멍청하게 허공만 보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어야 합니까?”

그에게 시선 한 번 보내지 않고 노바르는 오이 하나를 통째로 씹어 먹었다. 와사삭, 상쾌하고 시원한 소리가 짧게 찾아든 정적을 물리쳤다.

“리세트가 버터랑 잼을 발라 준 빵 있잖아요. 엄청 맛있었어요.”

뜻을 읽지 못할 말을 한 노바르는 슬쩍 그의 책상을 눈으로 가리켰다.

“저대로 놔두면 상할걸요.”

카에덴 델피니움은 그제야 자신의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리세트가 준 빵을 집어 들기까지는 수 분이 흘렀다.

맛도 없고 너무 퍽퍽하고. 맛이 없는 것보다는 이상하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상한 게 분명한 빵을 그는 전부 먹어 치웠다. 빈 접시 위에는 갈색 부스러기만 남았다.

마음이 너무 허전한데, 아직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 ❖

어떠한 작은 변화도 없이 시간이 흘러 어느새 일주일이나 지났다. 의자에 앉아 있던 요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마력이니 제어가 가능하지 않을까.

며칠간 생각을 거듭한 끝에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를 공격하더라도 리세트에게는 상처 하나 남기지 않는 것을 확인한 덕에 마음이 편했다.

마력을 끌어 올린 요한의 주변으로 방어 막을 씌우듯 불길이 휘몰아쳤다. 그를 보호하듯 움직이던 마력이 서서히 앞으로, 리세트를 감싼 그 마력의 영역으로 흘러 들어갔다.

구분이 무의미한 힘이 충돌하자 상쇄가 되어 사라졌지만 요한은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사라진 마력의 양만큼 리세트의 몸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온 탓이었다. 또다시 경고를 하듯 마력은 크게 원을 그리며 요한이 딛고 선 바닥 위로 불에 그슬린 듯한 자국을 만들고 되돌아갔다.

그토록 죽고 싶어 발악할 때는 훼방을 놓더니. 이제는 그를 죽이려 달려들지를 않나, 죽고 싶지 않으면 다가오지 말라는 듯 경고를 하는 꼴이 황당했다.

리세트에게 준 마력은 한정적이었고, 요한의 마력은 방대했다. 휴식을 취하면 얼마든지 마력을 회복할 수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준 마력이 고갈되면, 리세트가 가진 본래의 마력을 끌어다 쓰지 않을까.

문득 찾아온 의문에 요한은 단숨에 마력을 거둬들였다. 그것에 만족했는지 리세트를 감싼 마력도 더는 사납게 꿈틀대지 않았다.

“누가 네 마음대로 이런 짓을 하라고 했어?”

상황을 지켜보던 카에덴 델피니움이 다가와 목소리를 높였다. 요한은 며칠 새 해쓱해진 몰골을 일별하고 느슨하게 팔짱을 꼈다.

가만히 생각을 더 해 보려는데 카에덴 델피니움이 자꾸만 타박했다. 보다 못한 요한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넌 언제까지 그것만 잡고 있을 생각이지?”

요한은 손끝으로 그가 쥐고 흔드는 연구 자료를 건드렸다.

“이미 실패한 거 아닌가. 그걸 붙잡고 있어 봤자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반론하지 못하는 그를 내버려 둔 채 요한은 다시 리세트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마력을 끌어 올려 탐색하듯 리세트 주변에 뿌려 놓자, 그것이 무척이나 거슬렸는지 본래 그의 것이었던 마력이 다시 사납게 몸을 떨었다. 가까이 다가간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도 요한의 뺨을 할퀴었다.

짧게 혀를 차며 뺨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훔쳐 내던 그 순간에 요한은 보았다. 리세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며칠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뭐가 달라졌지?

요한은 금세 알아낼 수 있었다. 가만히 자리를 지키던 그가 오늘은 마력을 통해 리세트에게 다가갔고, 그러다 상처를 입은 것. 유일한 차이는 이것뿐이었다.

설마…….

문득 뇌리를 스치는 의문에 확신을 얻기 위해 요한은 리세트에게 달려갔다. 당연하게도 마력이 달려들어 그를 할퀴고 밀어 냈다. 그사이 리세트의 떨림이 더욱 커졌다.

멀리 밀려나고도 그저 좋아 웃음이 나왔다. 핏방울이 맺힌 요한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리세트. 내 말,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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