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너에게로
무언가 넘칠 것처럼 턱밑까지 차올랐다. 그것은 과연 숨결일까 혹은 다른 무엇일까.
리세트.
먼 곳에서라도, 닿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면 불안한 현실이 눈앞에 닥쳐올 것 같아 요한은 그저 달릴 뿐이었다. 아닐 거라고, 아무런 일도 없을 거라고 간절히 빌며.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동안 주변을 집어삼킬 것처럼 요동치던 마력이 힘을 잃어 가는 듯 서서히 빛이 옅어졌다.
연구실로 뛰어 들어간 요한은 문 앞에 멈추어 선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만 빼고 보면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주위가 온통 파랗게 물들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무언가를 발견한 요한의 시선은 현실을 외면하듯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쿠키를 담은 커다란 접시 하나가 중앙을 차지한 책상. 깔끔하게 정돈된 그 책상 옆에는 바구니가 있었다. 평소 요한이 들고 오던, 어제와 오늘은 리세트가 들고 간 그 바구니. 그 안에는 쿠키가 들어 있겠지. 리세트의 자리이니.
조금 떨어진 곳에는 책 하나만 펼쳐 놓은 황량한 책상이, 바로 그 옆에는 무슨 용도로 쓰이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어질러진 책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눈에 익은 그 모든 것을 느릿하게 훑은 요한의 시선은 다시, 어렵게 외면한 현실로 돌아갔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갖추어져 있는데 오직 사람만이 달랐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노바르 로슈만과 카에덴 델피니움은 그의 존재도 눈치채지 못하고 어느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요한의 시선도 그곳에서 멈추었다.
부정하던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었다. 문을 연 순간, 악몽처럼 불어닥친 현실을. 리세트, 파란빛의 마력이 마치 온몸을 휘감은 듯한 그의 아내를.
리세트를 눈에 담은 채 요한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그 말이 방아쇠가 된 것인지 줄곧 침묵에 잠겨 있던 카에덴 델피니움이 일어섰다.
“내 계산은 틀리지 않았는데 왜 저러는 거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왜? 도대체 왜…….”
중얼거리는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얼이 빠져 버린 듯한 카에덴 델피니움을 스쳐 지난 요한의 눈길은 방금 막 몸을 일으켜 세운 노바르에게 옮겨 갔다.
“리세트가 마법식을 전개해 보자고 했습니다. 실패한다고 해도 식일 뿐이니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기가 막히고 화가 났다. 하지만 도저히 누구에게 그 감정의 찌꺼기를 쏟아 내야 할지 모르겠다.
노바르 로슈만? 카에덴 델피니움?
둘 다 아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도 이곳에 없던 그가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둘이서 리세트 한 사람을 말리지 못한 것이냐며 책임을 물을 자격이 요한에게는 없었다. 그 순간 그가 이곳에 있었다고 해도, 리세트의 의지를 꺾지 못했을 것이므로.
그것을 깨닫자 힘을 이기지 못해 바르르 떨리던 주먹 쥔 손이 맥없이 풀렸다. 요한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상황을 살펴 나가기 시작했다.
마력의 기운이 거세기는 하지만 물리적인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그랬다. 리세트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마력은 그저 고요하게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잔잔한 파도처럼 꿀렁거리는 마력을 보던 요한은 불현듯 깨달았다. 이 마력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다름 아닌 요한 본인의 마력이었다. 리세트에게 준, 아이에게 전달된 그것.
눈을 감고 있는 리세트의 몸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두 발은 바닥을 딛고 있지 않았다. 허공에 조금 떠 있는 상태로, 마치 마력이 리세트의 몸을 지탱하듯 동여매고 있었다. 언뜻 고치 속에서 깨어날 날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생명체의 모양새였다.
“다가가도 되는 거야?”
카에덴 델피니움에게 물었지만 그는 요한을 보고 있지 않았다. 대답은 노바르 로슈만에게서 들려왔다.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이유를 묻는 대신 요한은 걸음을 옮겼다. 노바르 로슈만의 말을 곱씹어 본 후에 내린 결정이었다. 묻는다 해도 어차피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올 리 만무하니 직접 다가가 볼 수밖에.
조금씩 리세트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밤이 와서, 졸음이 쏟아져서 잠이 든 그 얼굴처럼 안온해 보였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를 남겨 둔 채로 요한은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주인을 알아본 듯 얌전하던 마력이 갑자기 회오리치듯 그를 밀어 냈다. 한꺼번에 발화한 빛이 너무나도 밝아 요한은 팔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잠시간 흔들리던 눈동자는 곧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멈추어 있던 걸음도 다시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멈춰! 그만하라고, 요한 델피니움!”
뒤에서 들리는 외침을 무시한 채 요한은 묵묵히 나아갈 뿐이었다.
“내 말 안 들려? 당장 멈추라고!”
노바르 로슈만이 무어라 더 외쳐 댔지만 요한에게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듣지 않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들을 수 없었다. 이명처럼 윙윙 울리는 정체 모를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점도 있는 액체가 눈썹 옆을 타고 흐르는 듯했지만 요한은 개의치 않았다. 리세트와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얼마 안 되는 거리임에도 도무지 간격을 좁힐 수가 없었다. 걸음을 떼 바닥을 내딛는 감각은 분명히 느껴지는데 몸은 계속 뒤로 밀려났다.
팔과 목이 찢겨 나가는 통증이 번졌지만 요한은 멈추지 않았다. 마력은 마치 꼭 칼날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베어 버릴 듯 사납게 회오리쳤다.
요한은 굳어져 제 기능을 상실한 것 같은 팔을 힘겹게 옆으로 옮겼다. 팔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한쪽 눈가에 시린 빛이 고였다.
거센 파동에도 리세트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저 고요하게.
다행이다.
안심한 요한은 다시 걸음을 내디뎠지만 몸은 점점 더 리세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무언가 후드득 떨어져 검붉은 자국이 남았다. 계속해서 밀려나는 탓에 발에 밟히고 뭉개진 자국들로 인해 바닥은 붉게 물들어 버렸다.
끈질기게 버티고 서 있던 요한은 마력이 움직이는 방향을 읽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 예상한 그 지점에 틈이 벌어졌고, 요한은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간절하게 손을 뻗었지만 리세트의 머리카락을 스쳤을 뿐, 요한의 몸은 더욱 멀리 밀려나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요한은 잇새로 비집고 나오는 것을 울컥 뱉어 내며 다시 일어섰다.
꼴이 형편없겠네. 비릿한 맛을 느끼고 나서야 요한의 시선은 제 팔을, 더 밑으로 내려가 복부와 다리를 지나갔다. 옷이 여기저기 찢겨 볼품없이 난잡해진 모습이었다.
큭큭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입술이 새빨갰다. 요한은 뻣뻣하게 굳어 버린 듯한 다리에 힘을 실었다.
아까보다 멀리 떨어져 있어 리세트의 상태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파란빛이 스며든 은색 머리카락의 한쪽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력이 방해하는 탓에 흐릿해진 초점을 간신히 잡으며 요한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리세트의 뺨이 젖어 있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아무것도 보지 못할 텐데,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리세트의 눈가를, 뺨을, 입술을 적신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리세트, 눈 뜨지 마.”
요한은 남은 힘을 그러모아 다시 한번 마력의 틈새로 뛰어들었다. 곧바로 침입자를 죽이려 달려든 마력이 요한의 몸을 튕겨 내 최후의 발악을 무산시켰다. 천장까지 튀어 올라간 몸은 단숨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헐떡이는 호흡을 가다듬은 요한이 바닥을 짚고 일어선 찰나에 마력이 단단한 갑옷처럼 리세트에게 둘러졌다. 요한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더 이상 다가가면 안 된다는 걸. 마력이 경고를 주고 있었다.
본래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이라 그런 걸까. 이런 걸 느낄 수 있다는 게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뭐?
경고든 뭐든 어쩌란 말인가.
요한에게는 반드시 리세트를 저곳에서 끌어내야만 한다는 생각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제정신으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가야지. 너에게로.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쓰라린 옆 이마를 한 번 훔쳐 낸 요한이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간 순간에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아 세웠다.
“제발 그만하라고!”
노바르 로슈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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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으니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며 기다리기로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씻듯이 얼굴을 쓸어내린 노바르에게는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미친 사람처럼 리세트에게 달려들던 공작을 막았으니까. 그 혼자서, 끙끙거리며.
평소에는 낄 데 못 낄 데 구분하지 않고 끼어들던 카에덴 델피니움은 거들어 주지 않았다.
차라리 입이라도 다물고 있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입은 또 쉬지 않고 움직여 댔다.
왜 저러지. 그럴 리가 없는데. 눈을 뜨긴 하겠지?
카에덴 델피니움은 미쳐 버린 사람처럼 그런 류의 말만 허공에 대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더해 갈수록 무표정한 공작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해 노바르가 황급히 달려가 시끄러운 입을 막고 나서야 소란이 완전히 진압되었다.
미친 자들끼리 싸움까지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에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둘 다 서로에게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공작은 리세트를, 카에덴 델피니움은 리세트와 연구 자료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노바르는 그 사이에 끼어 기민하게 상황을 살피고 조율해야 했다.
불편한 기류는 노을이 질 때까지 이어졌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카에덴 델피니움은 책장을 뒤엎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책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연구 자료를 살피고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그 순간 노바르는 보고 말았다. 완벽한 모양의 도형을 그려 내던 그의 손이 지금은 선 하나를 똑바로 긋지 못해 허둥거리는 걸.
그 후로도 카에덴 델피니움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공작은 피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자리를 지켰다. 마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리세트에게 가장 가까이 닿을 수 있는 그 자리에 서서.
침착한 쪽이 공작이라니. 공작과 카에덴 델피니움의 영혼이 뒤바뀐 건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든 찰나에 노바르는 문득 공작의 손을 보게 되었다. 여전히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 손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듯해 노바르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창 너머로 별이 빼곡히 박힌 하늘이 보였다.
온 세상이 까맣게 물들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