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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18)화 (118/151)

118화
빵 한 조각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을 구분하는 건 그에게 난제나 다름없었다. 어디까지가 말해도 되는 범위일까.

아트반 크리프의 소식은 모르는 편이 좋겠지. 보아하니 요한도 철저하게 함구하는 것 같으니. 그런데 그렇게 따지자면 아무것도 알려 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그는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시선을 다시 리세트에게로 돌렸다.

하여튼 저 눈이 문제였다. 올곧고 투명한 눈.

“아무것도 아니야. 그만 가자.”

“감사해요.”

예기치 못한 인사가 다시금 그를 고민의 수렁에 빠트려 버렸다.

“나는 그런 인사를 들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저를 도와주고 계시잖아요.”

그거야 당연하지. 내 연구를 위한 일이니까.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면 왠지 이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단숨에 끝나 버릴 것만 같아 그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아……. 그래, 뭐.”

“이제 가요.”

문을 연 리세트는 먼저 나가지 않고 그를 빤히 보았다. 언뜻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기다리다니. 착각인 게 확실하지만 카에덴 델피니움은 재빠르게 리세트의 뒤로 다가섰다.

이상해.

눈을 부릅뜬 채로 리세트를 따라가던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앞이 아니라 뒤에서, 혼자가 아니라 둘이.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 ❖ ❖

연구실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오후를 맞이했다.

각자 흩어져 할 일을 하던 세 사람은 식사 시간이 다가올 무렵 원형의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다 같이 자리에 모이기까지 작은 다툼이 있었다.

항상 요한과 따로 먹던 리세트는 당연히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다. 그리고 그게 다툼의 발단이 된 것이다.

“혼자 먹으면 맛이 없잖아. 같이 먹어.”

예의상 하는 말일지라도 카에덴 델피니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선뜻 대꾸하지 못하고 굳어 있던 리세트와 노바르는 한참 만에야 깨어났다.

“말씀은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아직 음식 냄새를 맡는 게 힘들어서요. 옆방에서 먹고 올게요.”

“냄새가 안 나는 걸 먹으면 되잖아. 안 그래?”

동의를 구하듯 카에덴 델피니움은 눈을 끔뻑거리는 노바르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길들여진 노바르는 냉큼 고개를 끄덕여 의견을 보탰고, 문 앞에서 어리둥절하게 서 있던 리세트는 그들과 합석했다.

냄새가 나지 않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하였더니. 테이블은 마치 텃밭 하나를 통째로 옮겨 놓은 듯한 음식이 차려졌다.

작게 잘라 손질한 야채가 종류별로 접시에 담겨 있었다. 푸릇푸릇 신선해 보이기는 했지만 저게 과연 식사인가 싶었다. 하녀들은 초식 동물의 먹이를 준비하는 듯해 재미있었다는 말을 남기고 그만 물러갔다.

리세트 앞에는 최근에 먹을 수 있게 된 빵과 우유가 준비되었다. 노바르와 카에덴 델피니움의 몫은 채소가 전부였다. 진정으로 초식 동물이 될 작정인지 두 사람은 하나씩 접시를 비워 나갔다.

홀린 듯 그 특이한 광경을 지켜보던 리세트는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빵을 막 집어 들던 손이 움찔 떨렸다.

“넌 왜 안 먹어? 야채 냄새도 역겨워? 오이가 싫어? 치워 줄까?”

“아니요!”

당장 치울 기세로 접시를 드는 그를 리세트가 다급하게 소리쳐 막았다. 가뜩이나 든든하게 속을 채울 만한 게 없는데 오이까지 치우면 무얼 먹으려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먹으려고 했어요. 지금요.”

미심쩍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리세트는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보세요. 빵 들고 있잖아요.”

“그러면 됐다. 먹어.”

뭐가 되었다는 건지 그는 뿌듯하게 웃으며 접시를 내려놓았다. 노바르는 되찾은 식량을 제 앞 접시에 가득 옮겨 담았다. 녹색 잎채소가 땅을 이루고 그 위에 오이의 산이 만들어졌다. 카에덴 델피니움의 접시도 별다를 바 없었다.

리세트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이 나는 빵에 버터를 얇게 펴 바르고 그 위에 잼을 듬뿍 올렸다. 군침이 절로 돌려던 찰나에 리세트는 보고야 말았다. 강렬하게 빵을 응시하는 시선을. 그 시선의 주인은 카에덴 델피니움이었다.

“드릴까요?”

“너 안 먹어?”

“먹긴 할 건데요. 다 못 먹을 거 같아서요.”

먹고 싶어 하는 게 너무도 잘 보이는 표정을 하고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한번 반응을 살펴보는 게 나을 듯했다.

리세트는 우선 들고 있던 빵을 다 먹었다. 그사이 시선이 하나가 더 늘어나 있었다. 노바르와 카에덴 델피니움은 흘끔흘끔 리세트를, 정확히 리세트가 들고 있는 빵을 쳐다보았다.

“맛있어요. 드셔 보세요.”

리세트는 먼저 카에덴 델피니움에게 빵을 하나 주었다. 곧바로 버터와 잼을 발라 노바르에게도 건넸다.

“고마워. 잘 먹을게.”

노바르가 맛있게 먹는 걸 본 리세트는 미소를 띤 얼굴로 다른 한 사람을 보았다. 말 한마디 없이 접시에 빵 한 조각을 올려놓은, 그저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는 카에덴 델피니움을.

별로 드시고 싶지 않았던 걸까.

식사 시간이 차차 마무리될 무렵까지도 그는 노려보듯 빵을 지켜보기만 했다.

리세트는 그만 관심을 거두고 식사에 집중했다. 깔끔하게 접시를 비운 후 자리를 정리하다 문득 그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골칫거리를 보듯 팔짱을 낀 채로 빵을 보고 있었다. 테이블을 치우러 온 하녀들이 들자 그는 빵을 올려놓은 접시를 들고 자신의 자리로 가 버렸다.

설마 저걸로 실험을 하지는 않으실 텐데.

의아했지만 리세트는 굳이 질문을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차나 물을 마시는 소리, 바사삭 쿠키가 부서지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오는 걸 제외하면 연구실은 대체로 조용했다.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마법식을 그려 본 리세트는 새 종이를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한 번 깊이 숨을 들이쉬고 펜을 쥔 손을 움직여 나갔다. 삼각형을 기본 골조로 해 중앙에서부터 각기 다른 모양의 도형을 채우는 작업이었다.

그만 펜을 내려놓은 리세트는 덮어 둔 채로 멀리 치워 놓았던 공책을 펼쳐 들었다. 그 안에는 리세트의 등에 새긴 마법식이, 반드시 외워야만 하는 그것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그린 마법식과 본래의 마법식을 비교해 보던 리세트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차올랐다. 한 군데도 틀린 게 없었다. 보고 그린 것처럼 똑같았다.

리세트는 종이를 여러 장 가져와 다시 마법식을 그려 보았다. 완전히 몰입해 빠져들었다. 후우, 긴 한숨을 흘리며 펜을 그만 떠나보냈을 때는 손날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본래의 마법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연구원님!”

기분이 좋아 큰 소리로 그를 불러 본 리세트의 시선이 막 옆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언제부터 있던 건지 카에덴 델피니움이 의자 바로 옆에서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리세트는 당황하지 않고 종이를 모아 그에게 내밀었다.

“역시 우등생. 똑똑하네.”

“그럼 한번 해 볼까요?”

“뭘?”

“식을 전개해 보는 것 말이에요.”

칭찬을 아끼지 않고 손뼉까지 쳐 주던 그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씰룩거리던 입꼬리도 점점 밑으로 기울어졌다.

“시험 삼아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리세트는 그 반응을 못 본 척하며 반문했다.

“나중에 해.”

“실패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차라리 지금 빨리해 보고, 실패를 하면 새롭게 식을 고쳐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건 그런데…….”

한 자 한 자 느리게 뱉어 내던 그가 갑자기 리세트가 들고 있던 종이 하나를 낚아채 갔다. 유심히 그걸 보고, 그러다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히다 펜까지 빼앗아 들었다. 그는 종이 위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다가 밑줄을 죽죽 그었다. 무언가 성에 차지 않는지 그런 행동을 반복했다.

“내가 왜 이러지?”

거의 사십 분 만에 그가 시선을 옮겨 리세트를 보았다.

“왜요?”

“모르겠어. 이렇게 완벽한 식인데 왜 불안할까? 네가 잘못되면 요한이 나를 죽일 것 같아서 그런가. 그런데 그건 또 아니거든. 나는 원래 삶에 크게 미련이 없어. 아, 왜 자꾸 불길할까. 왜 불안한 거지?”

두서없이 말을 쏟아 낸 그는 자신의 책상을, 그 위에 조심히 올려 두었던 접시를 잠시 바라보았다. 리세트는 전에 없이 불안해 보이는 그를 안심시키려 입술을 열었다.

“마법식은 실패를 하면 자연히 버려지는 수순을 밟잖아요. 그 식을 전개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치구요.”

“그건 알아. 나도 아는데…….”

그의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이 혼재되어 있는 듯 보였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노바르가 리세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한번 해 보죠. 저는 준비가 끝났어요.”

“네가 할 게 뭐가 있어. 제일 쉬운 방어 마법진이나 유지하면 되는 일인데.”

곱지 않은 눈으로 노바르를 쏘아본 그가 찢을 듯 움켜쥐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는 것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리세트는 노바르의 마법진 중앙에 당도해 눈을 감았다. 언뜻 은색이 섞여 있는 듯한 파란빛의 마력이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조금씩 마력을 끌어 올려 리세트는 기억하는 그대로 도형을 차곡차곡 쌓아 마법식을 그려 나갔다. 어느덧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식을 완성하고 눈을 떴을 때였다. 시야로 들어오는 빛이 온통 새파랬다.

“리세트 델피니움!”

파랗게 물든 시야 너머로 카에덴 델피니움과 노바르가 달려오고 있었다. 리세트가 입술을 채 떼기도 전에 그 빛이 리세트의 몸을 집어삼켰다.

❖ ❖ ❖

직접 명단을 작성한 요한은 한 번 더 나열된 이름들을 확인했다.

전투 계열 둘. 방어 계열 셋, 그중에서도 수색에 특화된 자들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 치유 계열 마법사를 다섯 명이나 포함시켰다.

편지에 명단을 동봉하는 것으로 요한은 그만 수도의 일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편지를 받아 든 집사가 물러가고 나자 요한도 곧바로 별채의 연구실로 향했다. 리세트를 홀로 보낸 탓인지 걸음을 재촉하게 되었다. 어느새 요한은 뛰어가고 있었다.

발걸음이 불현듯 멈추어 선 건 별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연구실로 쓰이는 공간의 창문을 뚫고 나온 파란빛은 요한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리세트 델피니움.

그 이름도, 그 이름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도 마찬가지.

의식하지 못한 새 다리가 움직였다. 땅을 박차고 달려가는 소리가 평온했던 숲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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