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17)화 (117/151)

117화
어렵게 굳힌 결심

“혹시 요한, 레이나 기억해? 나를 피해 다녔다는 아이 말이야. 사실 그 애랑 되게 가까워졌거든. 방학할 때 나한테 고맙다고 사탕도 줬어. 포도 맛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서 되게 뿌듯했어. 덕분에 하고 싶은 일도 생겼고.”

“어떤 건데?”

“계속 공부해서 선생님이 되면 어떨까? 재미있을 것 같아.”

“그래. 수도로 돌아가면, 다시 공부를 시작해.”

무언가 또 다른 게 떠올랐는지 리세트가 키득거렸다. 선생님이 되겠다는 포부를 드러낼 때와는 달리 천진한 아이 같은 미소였다.

“아트반이 준 이플로 상점 아이스크림 교환권도 써야 돼.”

“……교환권?”

아이스크림 교환권이라니. 그런 게 있었다니. 그가 몰랐을 리 없지 않은가. 심지어 그걸 선물한 게 아트반 크리프라…….

교환권과 아트반 크리프를 번갈아 떠올려 보자 요한은 금방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걸 억지로 만들어 내라고 시킨 게 분명하다. 이런 데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니.

너무나 그 녀석이 할 법한 깜짝 선물이라 웃기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다시금 걱정되기도 했다.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너도 몰랐지?”

리세트는 신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

“교환권은 초콜릿 맛밖에 없으니까,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내가 사 줄게.”

“초콜릿밖에 없다고?”

“응. 인기가 제일 좋은 것만 만든 게 아닐까?”

“글쎄. 과연 그럴까?”

“일부러 안 만들었을 리는 없잖아.”

그 말의 어느 부분이 웃겼는지 요한은 피식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약아빠진 놈. 중얼거리는 걸 토대로 짐작해 보았지만 리세트는 여전히 의문스러울 뿐이었다.

“요한, 너는 따라오기만 해. 내가 다 사 줄게.”

“또 다른 건?”

“뭐가?”

“하고 싶은 게 많이 생겼다며.”

요한은 그만 리세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리세트가 부디 아트반 크리프의 이름이 거론될 만한 주제를 꺼내지 않기를 바랐다.

“데이트하고 싶어. 호수로 놀러 가니까 너무 좋더라. 멀리 여행도 가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에 정원에 누워 하늘을 보면서 쉬고 싶어.”

리세트의 말을 세심하게 경청하는 요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대단한 소원이라도 말할 것 같은 표정으로 리세트는 사소한 바람을 내비쳤다. 특별할 게 없는, 연인이라면 일상적으로 누리는 평범한 일들.

“그리고 또 다른 건?”

“음……. 일단 이것까지만. 다 얘기해 주면 재미가 없잖아.”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은 얼굴로 리세트가 망설였다. 입술을 열었다가 도로 닫아 버리고, 괜히 쇄골 모양을 따라 손장난을 치기도 했다.

아기에 관한 것이려나.

요한은 원하는 걸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리세트를 사랑했다.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해 주는 리세트를 사랑했다. 그 순간의 미소를, 목소리를, 눈동자를 사랑해 왔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터였다.

“리세트.”

“왜?”

“바보.”

“뭐어, 바보? 바보라고? 나한테 하는 소리 맞아? 착각한 거 아니야?”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지 하나씩 읊어 주는 리세트의 얼굴이 아주 볼만했다. 어찌나 열성적으로 목청을 높이는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럴 때의 리세트가 좋았다. 이런 꾸밈없는 반응을 원했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러워하는 걸 보기 위해 연인이 된 게 아니었다.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건 더더욱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기와 함께하고 싶은 건 없어?”

“……어?”

갑작스러운 주제에 너무 놀랐는지 리세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요한 너는, 하고 싶은 게 있어?”

“잘 모르겠어.”

솔직한 진심을 전하자 리세트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가 고백했을 때도 이런 모습이지 않았나.

“그럼 생각해 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래.”

“꼭이야. 꼭 생각해 봐!”

편안하게 풀어지던 리세트의 표정이 돌연 심각해졌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려나.

짐작 가는 바가 없어 요한이 오물거리는 입술만 응시하고 있을 무렵, 리세트가 벌떡 일어나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을 접어 힘을 주더니 제 어깨를 탁, 강하게 치기까지 했다. 잠옷에 달린 새하얀 프릴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영지에서 보낸 시간을 통틀어 오늘이 제일 힘든 날인데 나 엄청 건강해 보이지 않아? 살도 조금씩 찌는 것 같아.”

“리세트.”

무슨 말을 꺼낼지 예상이 되어 요한이 그만 대화를 자르려고 했지만 리세트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요한,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런 적 없다고,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묻고 싶은데 요한의 입술을 건조한 실소만 흘릴 뿐이었다.

“떠나야 할 때는 망설이지 마. 여기에는 노바르랑 연구원님이 있어. 물론 연구원님이 좀 많이 특이하셔서 걱정이기는 한데 나쁜 분은 아니잖아. 힘든 고비도 다 넘겼으니까, 나 잘할 수 있어.”

“…….”

“네가 내 곁에 남아 너의 일을 포기하는 걸 원하지 않아.”

❖ ❖ ❖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카에덴 델피니움은 시계를 보며 초를 세듯 팔걸이를 두드렸다.

하나, 둘, 셋. 손끝으로 정확하게 세 번을 치자 문이 열렸다. 오늘도 약속한 시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시나 우등생다운 출석이었다.

“저 왔어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리세트는 곧장 제자리로 갔다. 항상 뒤에 달고 다니는 요한은 보이지 않았다.

“너희 싸웠지?”

그는 반쯤 확신을 담아 물었다.

“아니요. 저희가 왜 싸워요?”

“안 싸웠어?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첫째, 어제 네가 걱정돼서 찾아가 봤는데 요한의 얼굴이 완전히 썩어 있었어. 네가 멋대로 일정을 앞당긴 건데 나한테 바락바락 대들더라. 화를 낼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지. 그리고 두 번째, 연구실에 나타나지 않았어.”

하나씩 손가락을 펼쳐 설명하던 그가 어디 한번 반박해 보라는 듯 느슨하게 다리를 꼬았다.

“사람 얼굴을 보고 썩었다고 하시다니.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리세트는 들고 온 바구니를 소리 나게 책상에 탁 올려놓았다. 불쌍한 쿠키가 바스러지고도 남을 만큼 둔탁한 소리였다. 케이크가 들어 있다면 크림이 사방에 튀었을 거다.

“요한은 원래 연구원님을 볼 때는 표정이 곱지 못하잖아요. 연구실로 오지 않은 이유는 제 부탁을 들어줘서 그런 거예요.”

“따라오지 말라는 말이라도 했어? 그런 부탁이라면 들어줄 리가 없는데.”

“공적인 일이라 자세히 알려 드릴 수는 없구요.”

“사적인 일도 알려 줄 의향이 없으시잖아.”

“어쨌든요. 수도에 편지를 보내느라 못 온 거예요. 요한에게는 요한의 일이 있으니까요.”

리세트는 책상 귀퉁이에 일렬로 세워 놓은 약병 중 하나를 들어 꿀꺽꿀꺽 삼켰다. 그 순간에도 그를 보는 눈빛은 퍽 사나웠다. 남편 얼굴 좀 흉본 게 그리 싫었나.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다고 말하듯 리세트는 거칠게 의자를 빼 앉았다.

수도라…….

요한이 수도에 보낼 편지는 보나 마나 뻔하다. 그에게도 제국에 전운이 감도니 대기하라는 명이 담긴 황제의 친서가 어제 도착했으니. 그 안에는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여러 정보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리세트는 과연 그 일을 알고 있을까. 이를테면 서부 지역으로 향한 조사원들이 몰살당했다던가, 후발 주자로 파견을 떠난 아트반 크리프가 실종되었다는 일들 말이다.

아마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요한의 등을 떠민 것이겠지. 이러다 정말 요한이 수도로 떠나면 어쩌려고 저러는 것인지 모르겠다.

리세트 혼자 남아도 괜찮을까. 지금처럼 잘 견딜까.

이런 걱정을 하는 제 모습이 이상한데 멈출 수가 없어 미칠 노릇이었다. 고민하던 카에덴 델피니움은 코를 박을 것처럼 책에 집중한 리세트의 눈앞을 불쑥 손바닥으로 가렸다.

“놀랐잖아요!”

“잠깐 나 좀 따라올래?”

단번에 거절할 게 뻔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나가 버렸다.

❖ ❖ ❖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을까.

리세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뒤따라갔다. 어디로 가려나 싶었는데 카에덴 델피니움은 바로 옆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노바르에게 비밀로 해야 하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넌 요한을 사랑하잖아. 아니야?”

리세트가 문을 닫자마자 질문이 던져졌다. 저 입에서 또 어떤 소리가 나올지 몰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당연하죠.”

“같이 있고 싶은 게 정상 아니야?”

“그렇지만 계속 제 곁에 있어 달라고 떼를 쓸 수는 없잖아요.”

“요한은 그걸 바랄 텐데?”

“알아요.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요.”

카에덴 델피니움은 리세트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세심하게 관찰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너는 정말 이상해. 뭐가 그렇게 복잡해?”

리세트는 기가 막혀 대꾸하려다가 입술을 닫았다.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은 말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싶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못해 없다 봐야겠지만.

“어서 연구실로 가요.”

“안 돼. 너한테 묻고 싶은 게 더 남아 있어.”

“뭔데요?”

차라리 빨리 끝내고 돌아가는 게 나을 듯했다.

리세트는 여기서 끝을 볼 작정으로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휘말리지 말자. 빨리 대답하고 벗어나자. 주문을 외우듯 빠르게 속삭였다.

“요한이 수도로 가 버리면 어떻게 할 거야?”

“저는 여기 남아서 하던 일을 마저 해야지요.”

“넌 뭐가 그렇게 쉬워? 너 혼자 남는 거야. 요한 없이 혼자.”

“제가 왜 혼자예요. 연구원님도 있고, 노바르도 여기 있잖아요.”

“우리랑 요한이 같아?”

그가 어떤 걸 염려하는지 리세트는 조금 알 것만 같았다. 설마, 나를 걱정하고 계신 건가? 정말 믿기지 않아 뺨을 한번 꼬집어 보고 싶어졌다.

“요한은 요한의 일을, 저는 저의 일을 하면 돼요.”

못마땅한 듯 구겨지는 얼굴이 그와 굉장히 어울리지 않았다. 무심코 웃음을 터트릴 뻔해 리세트는 표가 나지 않게 입술의 여린 점막을 살짝 당겨 물었다.

“더 궁금한 건 없으신 거지요? 이제 그만 가요.”

리세트가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잠깐만 기다려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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