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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16)화 (116/151)

116화
하고 싶은 거

눈앞이 어지러워 리세트는 잠시 멈추어 섰다.

어깨에 두른 숄을 좀 더 꼼꼼하게 여몄지만 추위는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아직 그리 쌀쌀한 날씨가 아님에도 코끝이 찡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바람을 못 이기고 떠밀려 날아갈 듯했다. 차츰 시야가 또렷해져 리세트는 다시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나갔다.

데려다주겠다는 노바르와 카에덴 델피니움의 호의를 거절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면 사양하지 않았을 테지만 다행히 정신도 맑고 다리도 멀쩡히 움직였다.

연구실을 떠나기 전, 보란 듯이 기지개를 쭉 켜고 팔을 앞뒤로 힘껏 돌려 보았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불안감을 가중시켰는지 그들은 다시 강한 어조로 리세트를 타일렀다. 불신하는 눈으로 쳐다보던 두 사람이 떠올라 리세트는 조금 웃었다.

괜찮아 보이지 않았나.

실없이 킥킥거리다 보니 머리가 한층 더 맑아졌다.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왠지 요한이 올 것 같다는, 함께 보낸 오랜 세월이 가져다준 그런 예감.

언제나 그랬으니까.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다 나려고 하면 요한은 어김없이 나타나 주었다. 첫 실습을 나간 요한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도, 먼저 전장으로 떠난 요한을 생각하며 홀로 맞은 생일날이 되었을 때도. 그런 순간순간들이 모여 이 근거 없는 믿음을 견고하게 쌓은 셈이었다.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만은 개운했다. 이제 고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그러니 요한이 곁에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도망쳐 혼자 아이를 낳겠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는 덕분인지 그리 서운하거나 몸서리치게 외롭지 않았다.

아무래도 수도에 일이 생기긴 한 듯한데……. 임무를 떠날 요한이 다칠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혼자 남겨진다는 두려움은 없었다. 미약하게나마 불안감은 잔재했지만 이겨 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가장 고통스럽다는 난관은 오늘부로 끝이 났다. 마법식이 안정적으로 몸에 새겨졌으니 수도로 떠나야 하는 요한의 발걸음이 마냥 무겁지도 않을 터였다.

남은 건 여러 마력을 동시에 제어하는 일. 리세트가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이었다. 자신이 없다 해도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리세트는 불현듯 멈추어 섰다.

상쾌한 바람이 다가와 뺨에 달라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질수록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가슴에 번졌다. 싸늘하게 식어 가던 몸에 훈기가 도는 것 같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요한은 놀란 눈으로 리세트를 보았다.

이것 봐. 이번에도 네가 와 주었잖아.

꼭 미안하다고 할 것만 같은 얼굴이라 리세트는 얼른 달려가 요한의 손을 붙잡았다.

“같이 돌아가자, 요한. 나는 그거면 돼.”

언제 추위를 느꼈다는 듯 몸이 따듯해졌다.

❖ ❖ ❖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뻐근한 눈두덩을 꾹 누른 리세트는 침침한 눈으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어깨까지 폭 덮고 있는 이불이 부드러웠다. 천천히 되짚어 보니 기억이 하나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침실의 문을 연 순간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화병을 장식한 꽃향기. 그게 너무 안심되었다. 한 걸음도 채 떼지 못할 만큼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 요한에게 씻겨 달라 말하고 기절하듯 잠이 든 것 같았다. 다행히 침대까지는 제 발로 걸어간 기억이 있었다.

리세트는 조용히 돌아누웠다.

아늑한 파란빛으로 물든 침실은 고요하기만 했다.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요한은 책상 앞에 앉아 손을 깍지 낀 채로 책상에 올려 이마를 대고 있었다. 손과 팔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 때문에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리세트는 알 수 있었다. 요한이 무척이나 고민하고 있다는 걸.

수도에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그걸 내색하지 않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만약 두 사람의 입장이 바뀌었더라면 리세트 또한 그리했을 테니.

리세트는 미소 지으며 슬쩍 입꼬리를 만져 보았다. 이만하면 어색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요한.”

이름을 부르자 요한이 손을 내렸다.

그늘 밖으로 나온 얼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고민의 흔적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왜 깼어. 아침까지 푹 자지.”

작정하고 가면을 단단히 뒤집어쓴 것 같은 요한의 얼굴을 보아하니 긴 싸움이 될 듯싶었다.

리세트는 이불 속에서 주먹을 꾹 쥐었다 폈다. 침대로 다가온 요한은 상체만 살짝 숙여 리세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포근함을 되돌려 주듯 리세트가 뺨을 만지자 요한의 손길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식사는 했어?”

“응. 먹었어.”

“지금 주방으로 내려가서 물어봐도 돼?”

“서운하네. 그 정도로 나를 못 믿어?”

정말 먹었다면 요한은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어쩌면 고개를 저으며 마음대로 하시라는 듯 직접 문을 열어 주었을 테지. 주방장한테 같이 갔을 수도 있고.

안 먹었네. 안 먹었어.

리세트는 손가락에 힘을 살짝 실어 아프지 않게 요한의 뺨을 꼬집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요한이라니.

들으라는 듯이 포옥 한숨을 내쉰 리세트는 이불 왼편을 살며시 들었다. 평소였으면 곧바로 들어왔을 요한이 미동 없이 보고만 있어 침대를 톡톡 쳐 보기도 했다.

베고 누우라며 팔까지 길게 뻗어 침대에 올려놓자 요한은 그제야 올라왔다. 아쉽게도 요한이 리세트의 팔을 베개로 삼지는 않았다. 대신 제 품에 안으며 언제나 그랬듯 리세트의 머리를 팔로 받쳐 주었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너무 단단해.”

리세트의 장난스러운 속삭임이 기나긴 정적의 끝을 알렸다.

“조금만 말랑하면 좋겠어.”

리세트는 베고 누운 요한의 팔을 뺨으로 꾹꾹 눌렀다.

“막상 그러면 싫어할걸.”

“너무 말랑한 거 말고, 아주 조금만 말랑해지는 건 어려워?”

“별로 너한테 이로울 게 없잖아, 리세트.”

“왜?”

“자국이 오래 남을 테니까.”

“……자국이라니?”

미심쩍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 리세트의 눈이 경악에 차 동그랗게 뜨였다.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아 리세트가 황급히 요한의 입술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잇자국.”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과장된 말투로 딴청을 피우는 리세트가 귀여워 요한은 픽 웃으며 넘어가 주었다. 입술에 머물러 있던 미소는 오래 지나지 않아 옅어졌다. 하필 또다시 그 글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집사가 보내온 편지에 동봉된 보고서의 말미에 적힌, 그 믿을 수 없는 말이.

[실종자. 아트반 크리프.]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을 보았을 때는 저절로 숨을 죽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피식거렸고, 간신히 그 말을 받아들이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실종자……. 아트반 크리프.

멍하니 그 이름을 불러 본 것도 같았다.

아니겠지. 목숨이 얼마나 질긴 놈인데.

또 어디선가 다 죽어 가는 놈들을 어깨에 둘러메고 나타날 것이다. 원래 그런 녀석이니까. 혼자 남은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그 성정을 요한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볍게 웃어넘기고 싶은데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전장에서의 실종은 전사나 다름없는 부고였다.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었다. 시신이라도 발견하고 싶어 그 근처를 죽을 때까지 맴도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 그럴 리가.

그렇게 쉽게, 이토록 허무하게 죽을 놈이면 진작 죽었겠지.

요한은 입술을 삐죽이는 리세트의 몸을 당겨 안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그런 부질없는 바람을 되뇌는 순간에도 눈빛은 차갑게 날이 선 채로 굳어 버려 누그러지지 않았다. 모든 고민을 지워 내고 싶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떠나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어 괴로웠다.

내가 널 여기에 남겨 두고 갈 수 있을까.

집사의 편지를 본 순간부터 생각해 봤지만 그 답이 변하지는 않았다.

갈 수 없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가 태어나는 일이었다. 아기를 낳는다고 해도 리세트가 죽지는 않겠지. 당장은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직접 보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다.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제 눈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리세트의 출산에는 변수가 많다.

비전 마법을 끊어 낼 준비를 하고, 그와 상반되는 마법식을 만들어 몸에 새긴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리세트 홀로 두고 떠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카에덴 델피니움이 수차례 설명을 해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안심은커녕 오히려 불안을 부추길 뿐이었다.

“마법식이 제대로 자리 잡았대. 조금 쉬면서 마력을 보충하고 식을 전개해 보기로 했어.”

카에덴 델피니움에게 전해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소식이었다. 직접 리세트를 씻겨 주며 확인한 일이기도 했다.

가녀린 등을 빼곡하게 덮은 마법식을 손으로 만져 보았을 때 요한은 생각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듯한 그 느낌이 잊히는 날이 올까.

“내일이 마지막 날이었잖아. 왜 그리 급하게 굴었어.”

“그냥 돌아가 쉬기에는 몸이 너무 멀쩡했어. 이럴 때 빨리빨리 급한 일부터 해치워야지.”

“너 혼자 무서웠을 거 아니야.”

“뭐가 무서워. 하나도 안 무서웠어. 그리고 내가 왜 혼자야? 노바르랑 연구원님도 계셨는걸.”

요한의 등을 감싼 손이 위로를 건네듯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 요한. 내 직감이 말해. 다 잘될 거라고. 잘될 수밖에 없대.”

당연한 사실을 읊는 것처럼 리세트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그래서 더욱 요한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겁이 나고 무서울 텐데, 리세트는 어느 때보다도 밝게 웃었다.

“내 직감은 틀린 적이 없어. 너랑 결혼하라고 소리치던 것도 직감이었던 것 같아. 역시 그대로 따라가길 잘했어.”

억지로 웃지 마. 괜찮지 않잖아.

입술을 열면 한심하게 그런 소리만 할 것 같아 요한은 침묵을 지켰다.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최근에 더 많이 생겼어.”

뜬금없는 말을 던진 리세트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언제나 요한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 맑은 눈동자 가득 웃음이 스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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