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불길한 편지
환한 달빛이 내린 숲에 괴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도 동물도 아닌 전혀 다른 것.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드높아졌다.
아트반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달렸다. 팔등부터 어깨까지 이어진 상처 주변에는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피와 땀의 흔적이 남았다.
거대한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아트반은 복부에 동여맨 옷을 더욱 세게 조였다. 앓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오려는 입술을 짓씹으며 숨을 죽였다. 지축을 흔드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앞은 캄캄한데 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져 갔다.
막막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지만 그 흔한 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별도 없었다. 그래서 더 어두운 건가. 언뜻 하늘이 검붉게 물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곧 의식 저편으로 모든 감각이 멀어졌다.
아트반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릿한 통증과 혀에 번지는 비릿한 맛이 정신을 다독여 주었다. 그럴 리 없는데, 방금까지도 없었는데 하늘에 떠오른 달을 희미하게 본 것도 같았다. 그사이 땅의 울림이 거세졌다.
달이…… 뜨긴 했나.
모르겠다.
무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어느 때보다도 크고 환한 달이 높이 떠오른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아트반의 얼굴은 피와 찐득한 녹색 체액에 젖어 있었다.
동굴 안쪽에 숨어 있던 몬스터들에게 기습을 당해 정신없이 빠져나왔다. 함께 온 동료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아트반이 동굴 주변 숲에서 맞닥뜨린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갔을 때는 이미 동굴 외벽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후였다.
선발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선발대와 합류해 서부 지역에 관한 조사를 진행하는 게 이번 임무의 핵심이었다. 아트반은 꺼져 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트반이 몸을 숨긴 근방에 다다른 오우거 세 마리가 고개를 쳐들며 길게 포효했다. 투실투실한 배가 요동치듯 흔들렸다. 육중한 몸체를 가진 오우거는 얼마간 나무와 땅을 헤집다 더욱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발이 아트반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숲이 평온을 되찾았을 때 아트반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 냈다. 입술을 비집고 나온 한숨이 밤공기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아직 겨울이 오려면 멀었는데…….”
제국에서 가장 일찍 겨울이 찾아오는 척박한 땅이라 그런 건가. 녹슨 칼로 온몸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바람이 차갑고 매서웠다. 기침이 새어 나오자 피가 후드득 쏟아져 정복과 땅을 적셨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선발대와 합류하는 건 글러 먹었으니 어서 수도로 가 추가 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가까스로 일어났지만 몇 걸음도 채 떼지 못하고 아트반의 몸은 땅에 처박혔다. 뻣뻣한 잔디와 축축한 흙이 뺨에 닿고 나서야 아트반은 자신이 볼썽사납게 엎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리세트나 요한이 본다면 깔깔거리며 놀리려나. 상당히 볼품없게 넘어진 것 같은데. 아니지. 리세트는 걱정하며 달려올 테고 요한은 팔짱이나 끼고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겠지. 인정머리 없는 녀석이니.
울컥 차오르는 피를 토해 내며 아트반은 저릿한 복부를 손으로 눌렀다. 손바닥을 적시는 뜨거운 액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사위가 어두워 그저 까만색으로만 보였다.
점점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아트반은 개의치 않았다. 달이 없으니까, 어디론가 숨어 버렸으니까 그런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게 괜찮아졌다. 큭큭 웃어 보니 이제는 배가 더 아프지도 않았다.
멀리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아트반.
반가워 손을 흔들고 있는 리세트의 목소리였다.
아트반 크리프.
썩 꺼지라는 듯이 눈을 치켜뜨고 있는, 하지만 그를 내쫓지는 않는 요한의 목소리였다.
소중한 친구들이 어렸을 적 모습으로 나타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그 손을 잡을 뻔한 아크반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소리 내 웃었다.
“이 가짜들, 어서 사라져.”
이런 환영까지 볼 정도면 제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었다. 어서 가라고, 감각도 없는 손을 휘저어 보아도 그 사랑스러운 작은 환영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 약속했는데…….”
❖ ❖ ❖
큰일이 날 것만 같다는 기이한 예감과 함께 눈을 뜬 로드니는 한동안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꿈자리가 사나웠다. 평소처럼 얼마 안 가 잊히면 좋을 텐데 꿈의 내용이 생생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침을 먹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늘 해 오던 일은 어렵지 않게 끝마칠 수 있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나리라고, 꿈은 단지 꿈일 뿐이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럴 줄만 알았다.
로비로 들어서던 로드니는 빠른 걸음으로 편지를 가져온 하인에게 다가갔다. 황궁에서 보내온 편지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새빨간 봉투를 본 그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편지를 건네는 사람도, 그것을 받아 드는 사람도 복잡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그만 돌아섰다. 서재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주치는 사용인들에게 간밤의 안부를 물어보며 로드니는 서재로 들어왔다. 문을 닫는 순간 간신히 유지하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편지를 단단히 봉한 실링을 떼어 내는 주름진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편지 안에 담긴 내용을 읽어 나갈수록 심장이 아프게 고동쳤다.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만 가다 로드니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은 공작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펜을 들었지만 로드니는 좀처럼 펜촉을 종이에 올리지 못했다. 글자를 쓸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로비를 뛰어다니고 정원을 가로지르며 사고를 치던 아이들의 모습이 편지지 위로 겹쳐졌다. 마치 꼭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무런 걱정 없이, 그 아이들이 웃고 떠들던 그때로.
맑은 날이면 유독 햇살을 닮은 듯한 금발의 소년이 그를 보며 손을 흔들어 줄 것만 같았다.
간신히 편지의 첫머리를 쓴 로드니의 손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최대한 사실만, 있는 그대로 사견을 배제해 나가는 것만 생각했다.
로드니는 편지에 동봉되어 있던 사망자 명단을 잘게 찢어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행여 나쁜 기운이 빠져나갈까 싶어 주머니를 한번 꼭 쥐어 보았다. 그는 따로 보고서에 올라왔다는 작은 종이를 공작에게 보낼 편지에 묶어 보냈다.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 ❖ ❖
모처럼 작은 다툼이 벌어지던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웬일로 혼자 왔어?”
리세트가 막 연구실 안으로 들어오던 참이었다. 노바르의 잔소리에 질려 버린 카에덴 델피니움은 구세주를 만난 양 신이 나 문 앞으로 마중하러 갔다.
“수도에 일이 생겼나 봐요. 요한에게 편지가 왔어요.”
리세트는 가지고 온 바구니를 내밀었다.
“별일 아니니 금방 오겠네.”
바구니에 들어 있는 쿠키를 본 카에덴 델피니움은 흐뭇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별일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아세요?”
“정말 큰일이라면 나한테도 연락이 오거든. 나도 어쩔 수 없는 전투 계열 마법사라.”
그의 말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여러 개 있었다. 리세트는 바구니를 등 뒤로 숨기며 하나하나 따져 물었다.
“전쟁 때 연구원님을 본 기억이 없어요. 전쟁보다 큰일은 없을 텐데 소식을 못 들으신 거 아니에요?”
“다치는 게 싫어서 도망갔어.”
“잡으러 오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요.”
“나를 잡으러 온 놈들보다 내 실력이 더 뛰어나니까.”
“…….”
“순순히 잡혀 주기도 싫고.”
카에덴 델피니움은 황당해하는 리세트의 뒤로 빙 돌아가 바구니를 빼앗아 갔다. 리세트가 반항하지 않아 손쉽게 쿠키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들은 먼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차를 마셨다. 곧이어 책장을 정리하던 노바르까지 합류했다.
리세트는 빠른 속도로 쿠키를 해치우는 카에덴 델피니움을 응시했다. 요한과 무척 닮았는데 식성은 정반대인 것 같았다. 차 한 모금 마시지 않았지만 그는 막힘없이 쿠키를 삼켰다. 조그맣게 한 입 먹은 노바르는 콜록거리며 차를 마셨다.
쿠키와 차가 동날 때까지도 요한은 오지 않았다.
리세트의 시선은 햇살이 비춰 드는 창가에서 떠나갈 줄을 몰랐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힐긋 노바르를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연애 경험이 전무한 얼간이는 뭣도 모르고 책이나 보고 앉았다.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는 이따금 대화에 집중하는 듯하다가도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일쑤였고. 그토록 좋아하던 쿠키에는 손 한 번 대지 않고서. 그 모습에 괜히 그가 다 불편해졌다.
얘는 왜 이리 늦는 거야.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굴더니만.
어쩔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그는 손뼉을 쳐 주변의 시선을 모았다.
“일단 우리끼리 먼저 시작하자. 너무 늦었어.”
❖ ❖ ❖
어렸을 때는 글자를 깨우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 후에는 혼자가 된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 처음 보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알아듣기도 힘든 공부를 하는 게 무척이나 괴롭고 힘들었다. 하지만 리세트는 그 어려운 걸 다 해냈다.
그런 리세트에게 매일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생겼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아픔이었다.
혼자라서. 몸을 지탱해 주는 온기가 없어서. 그래서 더 아픈 것 같았다. 게다가 불안했다. 요한이라면 절대 리세트 혼자 아프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연구원님, 저 괜찮아요. 더 할 수 있어요.”
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움켜쥐어 버티던 리세트는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안 돼.”
단호하게 돌아서는 그의 옷자락을 리세트가 힘껏 그러쥐었다.
“내일이면 끝이 나잖아. 뭐가 문제야?”
“오늘 다 끝내면 좋잖아요. 요한이 없을 때, 차라리 지금 빨리 끝내 주세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면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리세트의 눈빛이 하도 고집스러워 카에덴 델피니움은 결국 마법을 재개했다.
“와아, 리세트 너는 정말…….”
마침내 모든 작업이 끝이 났을 때 카에덴 델피니움은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어 바닥에 털썩 앉았다. 말할 기운도 없었다. 방어 마법을 전개하던 노바르도 비슷한 모습으로 주저앉았다.
상처에 소독약을 들이부은 것처럼 마법식이 자리 잡은 등이 따끔거렸지만 리세트는 힘을 내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걸음이 창가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어느덧 노을빛마저 어둠에 삼켜지는 시간. 여전히 요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