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달콤한 오후
드넓은 호수 주변을 빼곡하게 둘러싼 나무들은 여전히 여름의 향기를 뿜어냈다. 푸릇푸릇한 잎사귀가 돋친 나뭇가지에 작은 새들이 올라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저택에 가까워 다른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고요한 자연의 소리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곳. 요한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사용인들을 대동하지 않은 덕분에 이 넓은 호숫가를 둘이서만 거닐 수 있었다.
왼손이 무거운 요한을 내버려 둔 채로 리세트가 호숫가로 달려갔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바람처럼 날렵하게. 경쾌한 발걸음을 따라 치맛자락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간밤의 일은 전부 거짓인 양 아픈 곳은 없어 보여 다행이었다.
요한은 문득 리세트의 손이 꼭 쥐고 있던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챙겨 온 짐이 가득 담긴 바구니 두 개를 한꺼번에 들고 있던 왼손에서 짐을 나누어 들었다. 양손에 나누어진 무게만큼 어깨가 가벼워져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
요한은 괜히 손잡이를 쓰다듬어 보았다. 잘 다듬어진 나무줄기를 선별해 만든 것이니 바구니의 촉감이 나쁠 리는 없었다. 요한의 객관적인 느낌으로도 그랬다.
방금까지도 오른손에 닿아 있던 리세트의 살결이 너무 부드러워서 그런 걸까. 바구니 손잡이의 표면이 상당히 울퉁불퉁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 걸지도.
요한은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다. 햇볕이 따갑지는 않은 날씨지만 그늘이 있는 편이 좋겠고 호수에서 그리 멀지는 않은 곳. 게다가 새들의 노랫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장소는 금방 눈에 띄었다. 선선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나무 그늘 아래에 요한은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잔디 위에 두꺼운 모포를 깔았다. 상큼한 레몬티, 포도잼 쿠키, 포도주스, 포도타르트. 그것도 모자라 포도잼까지. 바구니 하나에는 온통 포도로 만든 것들 천지였다. 요한은 하나씩 디저트를 꺼내 모포 위에 두었다.
요즘 포도를 제일 사랑하는 리세트가 보았다면 당장 달려올 정도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데, 아쉽게도 리세트의 시선은 호수를 떠날 줄을 몰랐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은빛 머리카락이 눈부셨다. 그 빛만큼이나 반짝이는 눈동자도 예뻤다.
리세트가 호수 주변을 맴도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요한은 지나온 길을 빠르게 되돌아갔다. 그가 언제 올까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마부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번쩍 들었다.
“다행입니다, 주인님. 성공하셨군요.”
그가 말하는 성공은 리세트 몰래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마부석에 실어 놓은 꽃다발을 받아 들던 요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걸 성공이라 해도 되나. 코끝에 감도는 달콤한 꽃향기가 잠시 든 의문을 지워 주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마부가 힘내라는 듯이 눈을 빛냈다. 피식 웃으며 그 마음을 받은 요한은 그만 발걸음을 돌렸다.
리세트가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보폭이 저절로 넓어졌다.
카에덴 델피니움의 말 한마디 때문에 시작된 나들이지만 막상 둘만 있게 되자 설레었다. 이럴 시간도 여유도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 힘든 일만 남았다고, 카에덴 델피니움이 그랬으니까. 그래서 더욱 이 시간이 소중했다.
뛰듯이 걸어간 요한은 호수 근처에 당도했을 무렵, 뒷짐을 져 자연스럽게 등 뒤로 꽃다발을 숨겼다. 가려지기 힘든 크기이지만 다행히 잘 숨길 수 있었다. 잔디가 돋아난 바닥 위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어디에서도 꽃다발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요한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상쾌한 가을 초입의 바람처럼 가벼웠던 발걸음이 서서히 속도를 잃고 우뚝 멈추어 섰다.
오랜만에 단둘만의 외출에 들뜬 건 아무래도 그 혼자뿐인 듯했다. 그가 사라진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리세트는 여전히 호수 근처에서, 두 눈을 빛내며 새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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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에 둥둥 떠다니는 새하얀 새들은 리세트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 다가오다 휙 고개를 돌려 돌아가 버렸다. 숲의 일부처럼, 마치 꼭 나무처럼 가만히 서 있으면 가까이서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새들은 눈치가 빨랐다.
“리세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리세트는 그제야 혼자 두고 온 요한을 떠올렸다. 급하게 달려가 보았더니 이미 소풍 준비를 다 끝내 놓은 상태였다.
괜히 미안해져 리세트는 모포에 올라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요한과 군침이 도는 디저트들을 내려다보았다. 구두 속에서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나 부르지 그랬어.”
“부를 시간은 줬고?”
리세트가 당황해 멋쩍은 듯 미소 짓는 걸 본 요한은 피식 웃어 버렸다.
“어서 올라와.”
굽이 낮은 구두를 벗은 리세트는 자리에 앉아 있는 요한에게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모포 가장자리에 나란히 놓인 구두 두 켤레는 사이좋게 붙어 있었다. 서로를 마주 본 채로 앉은 두 사람처럼.
요한이 건네는 쿠키를 입으로 받아 물며 리세트는 유리컵을 쥐었다. 포도주스가 찰랑찰랑 흔들리는 게 너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다 보니 목이 타는 것처럼 말랐다. 그대로 쭉 들이켜려던 리세트의 동작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추었다.
주스를 한 번,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따스한 눈을 깊이 바라보다 리세트는 비장한 얼굴로 컵을 내려놓았다. 무릎걸음으로 요한 곁에 다가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요한은 리세트의 입가에 다시 쿠키를 대 주었다.
“피곤해?”
리세트는 입술에 닿아 있는 쿠키를 슬쩍 밀어 냈다.
“피곤하진 않은데, 이대로 붙어 있고 싶어서.”
요한의 입술 새로 흘러나온 낮은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들이 만들어 내는 선율과 어우러져 더욱 감미로웠다.
리세트가 다시 제대로 앉으려고 했을 때 예기치 못한 유혹이 찾아왔다. 요한이 툭툭 제 허벅지를 손끝으로 치며 눈짓했다. 누워도 된다는 뜻이라는 걸 아는데, 왠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아기 몫까지 더해 무거워졌을 것 같으니까.
그런 걱정을 읽었는지 요한은 말없이 다시 눈짓했다.
몸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근래 들어 가장 좋은 상태라고 자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눕지 않아도 괜찮은데…….
리세트는 못 이긴 척 요한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았지만 쉽게 떨칠 수 없는 유혹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혼자 타협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옆으로 돌아눕자 호수가 보였다.
시야가 낮아진 덕분에 위에서는 보지 못한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호수에 앉아 유유히 수면을 떠다니는 새들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였다. 깨끗한 하얀색의 깃털이 한층 더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와 대비되는 새까만 눈은 온순해 보였다.
문득 고개를 돌린 리세트는 새들의 노랫소리에 집중했다. 그 맑은 소리가 크리프 후작저의 유리온실을 떠올리게 했다.
온실 얘기를 하려다 만 리세트의 시야에 불쑥 분홍색 꽃들로 만든 거대한 꽃다발이 들어왔다. 짓궂은 바람이 흔든 꽃송이에서 떨어진 꽃잎 한 장이 리세트의 눈꺼풀 위로 떨어졌다. 해마다 여름을 알리듯 수도의 저택에 피는 분홍색 장미꽃을 떠올리게 하는 색깔이었다.
“이 꽃 보니까 집에 가고 싶다.”
무심코 말을 한 리세트는 꽃다발로 얼굴을 폭 가렸다.
어쩌다 이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다. 일을 잘 마무리한 뒤에 돌아갈 곳인데. 뭐 그리 아쉽다고 새삼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인지. 여름마다 공작저에서 맡았던 그 익숙한 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요한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꽃다발을 빼앗아 갔다. 선물을 도로 가져가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반박하려던 찰나에 요한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갈등하던 리세트는 아직도 얼굴 가까이에 머무르는 요한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힘을 실어 내리자 요한은 저항 없이 고개를 내려 주었다. 귓가에 스치는 조금 부끄러운 소리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가려 주었다.
“리세트 넌 새를 좋아하잖아.”
장미 꽃잎처럼 붉어진 리세트의 뺨을 문지르며 요한이 물었다.
“작고 예쁜 새.”
뜻 모를 소리에 리세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꽃다발을 바구니 옆에 내려놓은 요한은 미소를 띤 얼굴로 리세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만지지 마. 가뜩이나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여기서 더 망가지면 안 된단 말이야.”
리세트는 머리카락 끝을 괴롭히고 있는 요한의 손가락을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순순히 잡혀 준 요한은 반대편 손으로 방금까지 만지고 있던 리세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규칙적이지 못한 모양으로 구불구불 말려 있는 머리카락을 리세트가 한 손에 잡아 제 머리 밑으로 쏙 숨겨 버렸다. 절대 뺏기지 않겠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손이 허전해진 요한은 타르트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맛이었다. 설탕을 쏟아부은 건가 싶게 달았다.
리세트는 먹고 싶어 죽겠는 얼굴을 하고도 끝까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것이 못내 흡족해 요한은 혀가 아린 걸 참고 타르트를 말끔히 먹었다. 열렬한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요한은 손가락에 묻은 끈적끈적한 잔여물을 손수건에 닦아 냈다.
“작고 예쁜 새가 노래까지 하면 어떨 것 같아?”
요한은 디저트에 시선을 뺏긴 리세트의 관심을 다시 돌려놓으려 했다.
“새는 원래 고유의 소리를 내잖아.”
짹짹. 포로롱. 찌르르르. 입으로 만들기 힘든 소리를 흉내 내며 리세트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전혀 비슷하지 않은 걸 아는 모양인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음악 소리를 따라 내는 새도 있어. 왈츠나 교향곡 같은 거. 제법 흉내를 잘 내.”
“그런 새가 있어? 정말?”
“실제로 보면 어떨 것 같아?”
“너무 신기하겠지. 사실 지금도 신기해. 새가 어떻게 악기를 따라 할 수가 있어? 너는 본 적 있어?”
“응.”
“어땠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울 것 같아.”
순수하게 감탄하는 리세트의 눈망울은 이슬이 맺힌 나뭇잎처럼 싱그러웠다. 그 반응과 관심을 독차지한 요한은 살며시 시선을 돌렸다. 계속 눈을 마주하다 보면 다 말해 버릴 것 같으니까.
“그거면 됐어.”
“응?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요한은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는 리세트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장난을 치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괴롭히자 리세트가 천천히 눈을 감아 주었다.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과 적절히 때를 맞추어 큰 소리로 우는 새들의 소리가 숲을 흔들었다.
요한이 대답을 회피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리세트는 넘어가 주기로 했다.
오랜만에 나누는 긴 입맞춤을 마음껏 누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