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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13)화 (113/151)

113화
예쁜데

리세트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혼자만의 외출 준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뜻을 받들어 요한은 잠시 자리를 비워 주었다. 저택 안에서 기다려도 되지만 별채의 연구실, 카에덴 델피니움의 영역으로 찾아갔다.

“즐거워 보이네.”

먼저 놀러 가라고 등을 떠민 장본인치고 카에덴 델피니움의 얼굴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요한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덕분에.”

짧게 그를 일별한 요한은 책장에 꽂힌 책을 두 권 뽑아 들었다. 외피가 가죽으로 되어 있든 빳빳한 종이든, 죄다 어두운색뿐인 이곳에서 유일하게 튀는 책들이었다. 밝은 색상이라는 것도 한몫하지만 제목 때문에 특히 그랬다.

<아이는 어떻게 키우면 좋을까요>

<훌륭한 엄마가 되는 방법>

두 권 다 리세트가 수도에서 가져온 책이었다.

다소 진부한 내용만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지만 요한은 참을성 있게 끝까지 읽었다. 두께가 얇아 읽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책장을 덮은 요한의 시선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계로 향했다. 벽에서 떨어진 시계가 용케 망가지지 않고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리세트가 당부한 시간까지 여유가 남아 있었지만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듯했다.

“고맙다고는 안 해?”

카에덴 델피니움이 계속 그런 말을 해 이곳에 있기 피곤했으므로.

❖ ❖ ❖

협탁 옆에 팔짱을 끼고 선 리세트는 침대 위에 일렬로 늘어놓은 옷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었다. 제법 진지하고 매섭기까지 한 눈이었다.

배가 나오기 시작했을 무렵부터는 바지를 잘 입지 않았다. 허리가 조금이라도 조이는 느낌이 들면 불편하고 숨쉬기 힘들었다.

품이 널널하고 기장이 긴 원피스 다섯 벌은 제각기 화사한 색감을 뽐내고 있었다. 마치 여름 햇살을 받아 활짝 피어난 꽃 같았다. 하얀 시트를 배경 삼은 덕인지 색감의 대비가 확실해 눈이 다 즐거울 정도였다.

리세트는 일단 연보랏빛 원피스를 옆으로 치웠다. 화려한 장식이 가장 많이 들어가 있는 옷이라 아무래도 활동성이 떨어질 것 같았다. 호수에 들어가 놀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편안하게 입고 싶었다.

메이가 옆에서 종알종알, 예쁘지 않으냐며 강력하게 추천해 주는 원피스도 슬쩍 들어 연보랏빛 원피스 위에 포갰다. 이 주황색 원피스는 방금 치운 그 원피스만큼이나 요란했다. 새빨간 원피스도 곧 먼저 배제된 다른 원피스들과 운명을 같이했다.

남은 두 개의 원피스를 보는 리세트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하필 그 무렵에 창문 틈새로 바람이 불어왔고, 그 바람은 리세트 주변까지 흘러 들어와 꽃향기를 흠뻑 마시게 했다. 이 싱그러운 냄새의 근원은 협탁 위에 놓인 화병이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요한이 가져다준 분홍색 장미꽃 향기가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해 주었다.

리세트의 고민은 화병을 본 순간에 끝이 나 버렸다. 연두색 원피스까지 치워 버린 손은 분홍색 원피스를 집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옆에서 메이가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는 체하지 않았다. 메이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리세트는 재빠르게 원피스를 입고 치맛단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다리를 스치는 옷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머리는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거울 앞에 리세트를 앉힌 메이는 비장한 얼굴로 빗을 들었다.

옷을 골랐더니 이제는 머리 모양이 문제였다.

리세트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그리고 다시 왼쪽으로 돌려 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머리 모양이 없었다. 풀고 가면 바람에 날려 헝클어질 게 뻔하고, 공부할 때처럼 하나로 묶는 건 어쩐지 아쉬웠다.

도움을 구하듯 돌아보자 메이는 고개를 젖혀 가며 웃었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드레스 룸을 쿵쿵 울렸다.

“마님, 저만 믿으세요. 그 근방에서 제일 예쁘게 만들어 드릴게요.”

장담하듯 말했지만 메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공작의 눈에는 지금 모습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리세트가 며칠 동안 씻지 못해 꾀죄죄한 상태로 나가도 공작은 그저 좋아 어쩔 줄 모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즈음 메이의 손이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지금,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열성적으로 일을 한단 말인가.

아직 공작에게 쌓인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에 나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손에서 살짝 힘을 빼 볼까도 싶었지만 그 순간 리세트와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쳐 버렸다. 하마터면 메이는 빗을 놓치는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와아. 고마워, 메이. 나 오랜만에 좀 예뻐진 것 같아.”

아직 메이가 생각한 모양을 갖추기까지 채 반밖에 머리를 손보지 못했는데도 리세트가 수줍은 듯 웃었다. 머리를 느슨하게 땋아 가던 메이는 깊은 한숨을 목구멍 뒤로 쑥 넘기며 미소 지었다.

“한참 멀었어요. 원래도 예쁘셨지만 더 예쁘게 만들어 드릴게요. 기대하세요.”

이게 아닌데.

마음속으로는 피눈물을 삼키며 메이는 열과 성을 다해 손을 움직였다. 결과물은 당연히 훌륭했다. 땋은 머리채를 낮게 말아 올려 고정하고 진주로 장식된 핀을 적절한 위치에 꽂아 넣었다.

은색 머리카락에 뽀얀 진주라니. 자칫하면 장식이 묻힐 수 있는 색 조합이지만 각자 다른 매력이 있어 조화롭게 어울렸다.

주인님께서 아주 좋아 죽으시겠구나.

부글부글 끓어넘치기 직전인 질투심은 리세트의 환한 미소 한 번에 사르륵 녹아 버렸다. 저렇게 좋아하니 됐다 싶었다. 공작을 위한 게 아니라, 리세트의 행복을 위해서. 메이는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다.

메이의 손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걸작이 시계를 확인하더니 종종걸음으로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저대로 공작을 기다릴 모양이었다.

“앉아서 기다리세요. 다리 아프잖아요.”

“하나도 아프지 않아.”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다시 한 소리 하려던 메이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약속한 시간보다도 빨리 온 공작이 노크를 했다. 그가 문을 열기 전에 리세트가 먼저 문손잡이를 돌렸다.

“빨리 왔네.”

요한은 말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멈춰 서 있었다.

얼굴에 닿는 시선이 따가워 리세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발돋움을 했다. 키가 큰 요한에게 맞춰서, 조금 더 자세히 이 모습을 봐 줬으면 해서 그랬다.

“나 괜찮아?”

리세트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가 보이는 몸이 적응되지 않아 문득문득 걱정이 솟았다. 요한이 계속 예쁘게 봐 주었으면 하는데, 과연 그럴까 싶어서. 요즘은 특히나 아파서 땀을 흘리고 끙끙 앓는 모습만 보여 주어 더욱 신경이 쓰였다.

“배가 좀 나와서 전처럼 옷이 잘 어울리지는 않지?”

민망해진 리세트가 뺨을 살살 긁적이고 있을 때였다.

“예뻐.”

단호한 목소리만큼이나 얼굴도 진지했다.

“너무, 많이.”

리세트의 걱정을 단숨에 지워 주는 마법 같은 말이었다.

요한은 아직도 애꿎은 뺨을 괴롭히고 있는 리세트의 손을 살며시 잡아 제 손안에 가두었다. 두 사람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스몄다.

❖ ❖ ❖

가을마다 철새들이 돌아온다는 호숫가는 걸어가 보아야 고작 삼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리세트는 산책을 겸해 걸어가자고 했는데 요한이 극구 만류해 마차에 오르게 되었다.

삐져나온 잔머리를 매만지는 리세트의 시선은 흘러가는 풍경에 고정되어 있었다.

녹색이 절정에 이르는 계절이 지면 혹독한 겨울이 닥쳐온다.

저택 밖으로 나오니 계절의 변화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리세트는 길가에 늘어선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영지로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무성한 녹음을 자랑했던 나뭇가지에 빈틈이 생긴 것처럼 느껴졌다. 착각은 아닐 것이다. 바닥에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있었으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그것을 깨닫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리세트.”

“……어?”

한참 뒤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걸 알아차린 리세트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불렀으면 무어라 말을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요한은 그저 빤히 리세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예쁘네.”

잔머리를 배배 꼬고 있던 손이 움찔거렸다. 리세트의 속눈썹이 깜빡깜빡 느릿하게 움직였다.

요한의 말 한 마디에 거짓말처럼 불안감이 잦아들었다. 예쁘다고 말해 줘서,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이라서 그런 걸까. 바보처럼 마음이 널뛰는 제 모습이 싫은데, 리세트는 결국 웃고 말았다.

요한의 손이 귓가를 스쳐 지나 곱게 말아 놓은 머리채를 슬쩍 건드렸다.

“안 돼. 망가진단 말이야.”

짐짓 엄하게 경고를 주었지만 요한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망가졌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창문에 비치는 제 모습을 확인한 리세트는 그제야 깨달았다. 메이가 열심히 만져 준 머리 모양이 엉망이 되었다는 걸. 반은 풀려 있고, 나머지 반쪽은 간신히 핀에 의지해 고정되어 있었다.

“이거 왜 이래?”

“네가 열심히 만졌잖아.”

“내가? 나?”

“손으로 헝클어트리던데.”

멋쩍어진 리세트가 허둥지둥 머리 모양을 고쳐 보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질끈 올려 묶는 것 외에 직접 머리를 만진 적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오랜만에 꾸민 모습으로 나들이를 가는데 이렇게 되어 버려 속상했다.

“말리지 그랬어. 나는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 줄 몰랐단 말이야.”

“신경 쓰여?”

“당연하지.”

리세트 옆으로 옮겨 앉은 요한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기세로 움직이는 손을 붙잡았다.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춘 후 놓아주자 리세트는 얌전히 손을 마주 잡아 무릎 위에 올렸다.

요한은 엉켜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핀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종종 해 본 일이라 손놀림이 꽤 능숙했다. 어느새 리세트의 손바닥에 크림빛 진주로 장식된 핀이 가득 올라갔을 무렵 마차가 멈춰 섰다.

요한은 리세트의 허리를 덮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에 감아 보았다. 이 모습도 예쁜데 리세트는 속이 잔뜩 상한 모양이었다. 그를 보지 않고 진주 장식을 문지르는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머리 모양이 그렇게나 중요한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예쁘기만 한데.

한 번 더 알려 줄까 하다 요한은 마음을 접었다. 속상한 얼굴이어도 예뻐. 못다 한 말은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전해 보았다.

때마침 한 무리의 새들이 호숫가 주변으로 날아왔다. 리세트의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한 아름다운 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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