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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12)화 (112/151)

112화
혹시 질투해?

연구는 쉽고, 공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카에덴 델피니움은 사람이 너무나도 어려웠다.

태생적으로 사람과 부대끼는 걸 질색했다. 가족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것도, 자신이 대화의 문을 여는 것도 싫었다. 후자의 경우 거의 없다시피 해 사람을 피하기만 하면 굳이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억지로 대화를 이어 나갈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각자 사색에 잠겨 시간을 죽이면 그뿐. 리세트와 노바르의 공부가 끝나면 각자 제 사람들을 데리고 길을 떠나면 되는데, 그는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여기 모인 사람들이 좋았다. 좋다 싫다, 호불호의 기준으로만 나누면 분명 좋은 쪽이었다.

리세트는 똑똑해서 말을 잘 알아듣고 성실했다. 그에 비해 조금 뒤떨어지는 아이지만 노바르도 리세트 못지않게 성실했다. 요 며칠 새 태도까지 공손해져 꽤나 마음에 들었다.

요한에게는 당연히 신경이 쓰였다.

가족이라 그런 건가.

이 근본 없는 배려의 원인을 찾아봤지만 아직도 영 모르겠다. 가족에 의미를 두었다면 죽어 버린 아버지 어머니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야 정상인데, 그러진 않았다. 타인이나 다름없는 의미일 뿐.

그런데 왜, 요한 저 녀석은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걸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보다 지금은 눈앞에 놓인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이 망가진 분위기를 어쩌면 좋나. 무어라 지껄여도 상황을 전환하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나도 알아.”

굳은 표정의 요한이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뭘?”

“다 나 때문이라는 거.”

당최 말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어 카에덴 델피니움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 어찌 되었든 대화가 끊기지는 않았고, 심지어 요한의 얼굴이 좀 전보다 사납진 않으니 괜찮은 것 같았다. 아마도.

어린 녀석이 먼저 용기를 내었으니 어른 된 자의 도리로 충고라도 해 줘야 하지 않나.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그랬니.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어야지. 즐길 거리는 충분하지 않니. 방법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부족하다면 만들면 되잖아. 혹시 몰랐다면 내가 가르쳐 줄 걸 그랬나. 그런데, 그런 것까지 알려 줘야 하나.

남편을 흘끔흘끔 훔쳐보는 리세트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그의 생각이 댕강 잘려 나갔다. 시선이 얽히자마자 리세트가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기 남편을 보듯 다정하게 보아 주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 당연히 사양이다. 이쪽에서 거절한다. 그런데 못 볼 걸 봤다는 저런 반응은 조금 부적절하지 않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요한은 말이 없었다. 리세트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과거를 되짚어 보기라도 하는지 그저 조용히 나무 하나만 응시하고 있었다. 회한에 찬 눈길이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티스푼을 만지작거리며 다리를 꼬았다.

하긴. 요한이 쉽게 욕망에 굴복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리세트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아이를 가질 만한 일을 만든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이니.

무성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테이블의 정적을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

하필 그때 그는 보고야 말았다. 자신을 봐 주지 않는 남편을 오래도록 지켜보다 끝내 고개를 떨구는 리세트를. 축 처진 어깨와 눈꼬리, 그래도 굴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 펜을 쥐어 드는 손이 사람의 마음을 울렸다.

“호수로 놀러 가는 건 어때?”

충동적으로 말했지만 꽤 훌륭한 제안인 것 같았다.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듯한 요한에게 그는 다시 제 의견을 피력했다.

“이제 당분간 그럴 시간도 없을 거야. 둘이 놀러 갔다 와.”

“시간이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

돌연 말을 멈춘 요한의 고개가 살며시 돌아갔다. 어느새 리세트가 그들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했다.

“놀러 가도 돼요?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잖아요. 우리가 여기 놀러 온 것도 아니고…….”

그런 말을 할 거면 목소리는 조금 더 엄숙하게 내라던가, 눈빛에 번진 기대감을 지우라는 충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선심을 쓴다는 듯 자애로운 어른의 미소를 보내 주었다.

“약초 정리도 해야 하고 마법식에 필요한 재료들을 한 번 더 점검해 봐야 하니까, 하루는 쉬어.”

지금 네 얼굴이 썩 좋지 않다는 말도 눈치껏 삼켰다. 낯빛이 파리한데 해맑게 웃어 언뜻 보면 처연하기까지 했다. 저러니 안 좋은 소리를 할 수가 있나.

요한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문득 궁금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고개는 리세트 쪽으로 둔 채로 눈동자만 슬쩍 움직였다.

역시나. 아까의 못마땅한 표정은 어디다 갖다 버린 건지 모르겠네.

“리세트, 호수에 가고 싶어?”

목소리도 딴사람 같았다. 귓가에 난 솜털이 바짝 곤두서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요한의 신경은 완전히 리세트에게 돌아갔지만, 예의를 아는 리세트는 그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연구원님은 늦게라도 오지 않으실래요? 연구실에만 계시면 답답하잖아요.”

빈말이라도 듣기 좋은 법이다.

따라오지 말라는 듯한 요한의 얼굴을 보니 잠시 심술궂은 장난기가 샘솟기도 하였지만, 그는 리세트를 봐 조금 더 신경을 써 조언까지 했다.

“가을에 돌아오는 새들이 호숫가에 많이 돌아다닐 시기야. 깃털 색깔도 다양해 보는 재미도 쏠쏠할걸.”

❖ ❖ ❖

리세트는 다시 노바르 로슈만에게로 돌아갔다. 공부에 완전히 몰입했는지 이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시선이 잠시 스치는 경우도 없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조금 허전해 요한은 무심코 찻잔을 쥐었다. 입술을 대고 나서야 잔이 비었다는 걸 알았다.

그가 차를 따르기도 전에 카에덴 델피니움이 찻주전자를 가져가 버렸다. 요한은 미련 없이 고개를 틀었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차를 마시려던 것뿐이니 괜히 말을 붙여 보아야 좋을 게 없었다.

바람은 적당히 선선했고 햇빛은 포근한 오후. 녹음이 우거진 숲속에 들어온 것만 같은 경관까지. 그 싱그러운 풍경 속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아내를 지켜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오늘처럼 멀리 떨어져 바라본 건 꽤 오랜만이었다.

요한은 제삼자가 된 듯한 기분으로 리세트를 관찰해 나갔다.

잠옷에 비해 단출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옷에 달린 리본의 존재감은 컸다. 무릎 아래까지 오는 샛노란 원피스는 어지러운 무늬 하나 없이 깔끔했다. 거대한 리본은 아카데미의 교복처럼 목 아래에 반듯하게 묶여 있었다.

임신을 하면 몸이 붓는다고 들었는데, 리세트의 몸은 그다지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기껏해야 배가 조금 봉긋해진 정도. 가슴은 기억보다 커진 것 같기도 했지만 잘 모르겠다.

키가 줄어들었을 리가 없는데 전보다도 한 뼘은 작아진 것 같다. 리세트가 들으면 화를 낼 테니 내색할 수는 없지만 요한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날이 갈수록 뼈대가 가늘어지는 듯해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집중하느라 꾹 다문 입술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시선이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예뻤다.

저 눈으로 나를 보아 준다면.

공책이나 종이 더미가 아닌 나를, 한 번만 돌아봐 줘.

그 간절한 바람이 통하였는지 리세트가 고개를 들었다. 안타깝게도 그와 시선이 엮이지는 않았다. 스치지도 못했다.

리세트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노바르 로슈만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연신 웃고 손뼉을 쳤다. 아무래도 오늘 치 분량의 암기를 끝낸 모양이었다. 집중해 보았지만 리세트의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도 않았는데, 노바르 로슈만의 목소리는 쓸데없이 귓가에 쏙쏙 들어왔다.

정말 대단해. 역시 넌 똑똑하구나. 그걸 다 외웠어? 벌써? 역시 리세트 델피니움.

틀에 박힌 칭찬이지만 리세트는 성취감을 제대로 느끼는 듯했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편안하게 낮추고. 이제는 뭐, 정말 친구라도 된 것 같았다. 성가시고, 짜증이 나게.

나직이 한숨을 내쉰 요한은 찻잔을 쥐었다. 손끝에 번지는 온기조차 거슬렸다. 단숨에 반이나 비워 낸 후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요한의 한쪽 눈썹이 슬쩍 위로 들렸다.

무심코 맞은편을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카에덴 델피니움이 손을 흔들었다. 반대편 손에는 찻주전자를 살며시 든 채였다.

“저쪽을 쳐다보는 얼굴이 무시무시하네. 혹시 질투해?”

대꾸할 가치가 없는 말에 요한은 그만 고개를 돌렸다. 리세트는 여전히 신이 난 채로 노바르 로슈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는 두 사람이 손뼉을 부딪쳐 서로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노바르. 너 정말 대단하다. 이걸 하루 만에 했어?

하필 리세트가 감탄하는 말은 너무나도 잘 들렸다. 특히나 노바르. 그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꽂히듯 파고들었다.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며 동의를 표하는 노바르 로슈만의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걸 하나하나 다 따지고 있는 제 모습이 한심해 죽겠는데, 그래서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눈과 귀는 모조리 리세트에게 향해 있었다. 더불어 노바르 로슈만에게도.

수도에서 보내오는 일은 적잖게 많았다. 이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집사가 보낸 편지와 서류도 다 챙겨 왔다. 그런데 편지나 서류 봉투는 하나도 뜯어보지 못한 채로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라와 있기만 했다. 다른 곳에 집중 좀 하자고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지만, 쥐고만 있는 상태였다.

또다시 차를 마시려다 말고 요한은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뜯었다. 글자는 그저 글자로만, 여백은 여백으로만 보였다. 서류 위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시선은 다시, 결국 리세트에게로 돌아갔다.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건 우리 조카님. 하필이면 카에덴 델피니움의 얼굴이 저 두 사람 사이의 빈 공간에서 떠올라 버렸다.

피해를 보고 있다는 그 세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성대한 결혼식을 끝낸 날의 저녁, 그 아름답고 무력했던 밤의 기억이 불쑥 머릿속에 찾아왔다. 침대로 그를 이끌어 갑작스럽게 입을 맞춘 리세트가, 설마 그대로 잘 것이냐며 다그치던 리세트가, 공부는 다 끝냈다며 당돌하게 턱을 치켜들던 그 사랑스러운 여자가.

만약 이 모든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지금과 다른 결과가 기다릴까.

리세트를 스쳐 지나온 바람이 그를 덮쳤다. 자문하던 요한은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노바르 로슈만을 보며 웃고 재잘대는 리세트. 빈 찻잔을 채워 주며 실실 웃는 카에덴 델피니움. 헛된 상상을 진지하게 해 보는 그 자신. 리세트의 체취를 실어 오는 달콤한 바람의 냄새.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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