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가지가지 하네
아무리 물을 많이 마셔도 목이 갈라지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리세트는 물 한 잔을 더 비워 내며 입가를 닦았다. 잠옷 소매에 요란하게 묶인 리본의 매듭이 물을 먹어 본래의 빛깔보다 진해졌다.
침대에 앉아 있던 리세트는 팔만 협탁 쪽으로 뻗어 물병을 잡으려고 했다. 손가락 끝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
깨어난 직후에 본 요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리세트는 그를 부르지 않고 혼자 해결해 보려 했다.
팔을 늘이는 게 불가능하니 몸을 더 움직이면 되었지만 골반 밑부터 감각이 없어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하필 요한이 침대 정중앙에 내려 줘서 협탁과의 거리가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입술을 앙다물며 쭉 팔을 뻗던 리세트는 털썩 몸을 웅크려 누웠다.
이대로 옆으로 굴러가면 되지 않을까.
막 그런 생각을 끝내고 반 바퀴 정도 돌았을 때였다. 요한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리세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물 마시고 싶어?”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킨 듯해 민망해져 리세트는 고개만 빠르게 끄덕였다. 요한이 건네는 물잔을 받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사이 하녀들이 들어 아침 식사를 차린 후 물러갔다.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은 침대에 바짝 붙어 있었다. 리세트를 안아 그 앞으로 옮겨 주려던 요한은 아직도 물잔을 꼭 움켜쥔 하얀 손을 톡 건드렸다.
“식사할 수 있겠어?”
“응.”
“정말, 괜찮겠어?”
“당연히 괜찮지.”
“너, 어제…….”
말을 하다 만 요한의 입술이 서서히 닫혔다.
리세트는 요한에게 안겨 테이블 앞으로 옮겨졌다. 조금도 춥지 않은데 요한은 이불을 가져와 어깨에 둘러 주었다. 리세트는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테이블 위를 살폈다.
배가 조금 무거운 듯하고 입맛은 없었지만 무언가 먹기는 해야 했다. 그것이 리세트와 아이를, 그리고 요한의 심신을 이롭게 하는 일이니 말이다.
비장한 얼굴로 스푼을 든 리세트는 우선 김이 나는 수프를 크게 떴다. 말간 국물에 야채가 잔뜩 들어가 가벼운 맛이었다.
수프 다음에는 샐러드. 식사 순서를 차근차근 따라갔지만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입 안이 까끌까끌해 진도가 더뎠다. 떫은맛이 강한 야채도 곧잘 먹었는데, 오늘은 쓴맛이 유독 강렬하게 느껴져 혀가 오그라들었다.
음식을 차례대로 둘러본 리세트는 편안한 얼굴로 식사를 이어 가는 요한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먹기 좋은 크기로 빵을 뜯는 손을 지나쳐 온 시선은 당연하다는 듯이 쿠키와 케이크가 담긴 접시로 향했다. 주어진 몫을 먹어야만 저 달콤한 포상을 쟁취할 수 있다. 스푼을 쥐고 있는 손에 강한 힘이 실렸다.
초콜릿이 콕콕 박힌 쿠키를 이만 외면하고 제자리로 돌아간 리세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접시가 사라졌다. 앉은 순간 코를 막을 뻔했던 고깃덩어리도, 텁텁한 풀 맛만 나는 샐러드도 없었다.
그대로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리세트는 슬금슬금 눈동자만 위로 굴렸다. 리세트 몫으로 나온 접시가 모조리 요한 앞에 옮겨져 있었다.
리세트 앞에 남아 있는 건 접시 하나뿐이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묽은 수프 표면에 리세트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이 일을 꾸민 범인은 당연히 한 사람이고, 누군지도 훤히 알고 있지만 선뜻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짚이는 바가 전혀 없으므로. 고민이 깊어지던 리세트의 콧잔등이 씰룩거렸다.
“억지로 참아 가며 먹지 않아도 돼. 먹고 싶은 걸 말해.”
“그럼 디저트…….”
“속에 편한 거로 골라.”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톡 쏘아붙일 뻔한 리세트는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빵을 마지못해 가리켰다. 요한의 분위기가 하도 가라앉아 있어 저절로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그래도 잼은 발라 달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 생각을 읽었는지 요한은 접시에 놓인 빵들 중 하나를 집어 잼을 듬뿍 발라 주었다. 리세트의 입가에 대 주는 순간에도 눈빛은 잠잠하기만 했다.
먹으라는 듯 빵으로 입술을 톡톡 건드리는 느낌이 너무 간지럽고 이상해 리세트는 빵을 콱 물어 가져갔다. 한입에 넣고 꼭꼭 씹었다. 고행길 같은 식사 시간이 끝날 무렵에나 맛볼 수 있는 포도의 풍미가 혀를 간지럽혔다.
한 조각을 꿀꺽 삼키자 이번에는 묽은 수프가 입 속으로 쏙 들어왔다. 모이를 받아먹는 새처럼 리세트는 오물오물, 요한이 가져다주는 걸 먹었다.
❖ ❖ ❖
리세트는 간밤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는 것과 배가 꼬이는 것처럼 아팠다는 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잠이 들고 나서의 일은 하나도 몰랐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올 때마다 꽃이 없는 정원에는 상쾌한 풀 냄새가 돌아다녔다. 오늘은 연구실로 가지 않고 정원에서 모이기로 했다. 리세트의 상태를 고려해 며칠 쉬어 가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커다란 원형의 테이블 위에는 자료를 정리한 공책 여러 권과 리세트가 끼고 사는 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 테이블을 쓰는 사람은 리세트와 노바르뿐이었다. 요한과 카에덴 델피니움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리세트는 테이블에 내려놓고 보던 공책을 세워 들었다.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몇 분 정도 기다렸다. 마법식을 보는 척하며 공책 위로 눈만 살짝 들어 요한을 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기 직전에는 공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한이 이상하다. 행동이며 표정 하나하나가 죄다 이상했다.
말을 하려다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왜 그러느냐 물어보면 미소를 지을 뿐 답을 해 주지도 않고, 더군다나 불만 한 번 표하지 않고 카에덴 델피니움과 함께 물러가 주다니. 그토록 싫어하는 카에덴 델피니움과 둘이 있어도 괜찮다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다니!
마법식이나 그 옆에 적힌 현란한 도형은 리세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오자 괜히 등 뒤가 허전해 무심결에 배를 만졌을 때였다.
“리세트, 아파?”
언제 다가온 것인지 요한이 리세트 옆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마를 짚어 체온을 확인한 손이 뺨을 부드럽게 문지르고 목덜미를 감쌌다.
지금 입술을 열면 옆에 있어 달라고 어리광을 부릴 것 같아 리세트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전했다.
“아프면 말해.”
포근한 손길과 함께 요한이 떠나갔다. 카에덴 델피니움 곁으로 돌아간 그가 자리에 앉는 것까지 지켜본 후 리세트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노바르가 공책을 넘기며 설명을 해 주었지만 리세트는 통 집중하지 못했다. 눈과 귀가 전부 다른 곳에, 요한의 주위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요한의 손길이 지나갔던 부분만 열이 번진 듯 뜨거웠다. 착각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느낌은 그랬다.
결국 참지 못한 리세트는 공책을 내려놓았다.
다시 요한을 보았지만 그는 카에덴 델피니움과 대화를 하느라 이쪽으로는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할 일에 집중하는 거, 좋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시무룩해져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에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 ❖
가지가지 하네.
카에덴 델피니움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티스푼을 요란하게 휘저었다.
놀고들 있네.
찰랑거리는 찻물은 얼마 남지 않아 테이블을 더럽히는 불상사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정말 유난스럽다. 쟤네 둘 다. 눈만 마주치면 실실 웃는 병에 걸린 거 아니야? 시간은 저 멀리 흘러가는데 아주 잘하는 짓이다.
술래잡기를 눈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뭐.
제일 나쁜 건 이놈이다. 요한 델피니움. 한순간도 제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조카 녀석이 기가 막히게 고개를 돌릴 때가 있었다. 아내의 눈길이 제게로 돌아올 때만 쏙쏙 골라서.
일부러 저러는 게 확실하다.
이쯤 되니 그는 정말로 궁금해졌다. 저럴 거면 왜 따로 앉은 걸까.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게 곤욕스러웠다. 온몸의 털이란 털은 죄다 쭈뼛 곤두서는 듯했다.
꼬박 밤을 새운 게 분명한 요한의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걸 보는 게 별로 달갑지 않았다.
뭐랄까…….
고민하던 그는 마땅히 표현할 단어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 기분, 이 감정, 이 느낌을 어떻게 한 단어로 표현할까. 확실한 하나는 눈 뜨고 보기 거북할 정도로 거슬린다는 것.
“언제쯤이면 끝날 것 같아?”
요한의 말에 대꾸해 주는 대신 카에덴 델피니움은 테이블에 턱을 괸 채로 하품을 했다.
“아. 다행이다. 나를 잊지는 않았구나?”
“리세트 몸에 마법식을 새겨 넣는 작업, 언제 끝나.”
“리세트가 잘 버티면 금방 끝나지.”
리세트 델피니움. 일부러 그 이름을 불러 보면 어김없이 요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티스푼에서 손을 뗐다. 가벼운 물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제법 경쾌했다. 바닥이 보일 정도로 드러나 있는 찻잔 안에 담긴 은제 스푼이 투명한 햇빛을 반사했다.
“아프지 않게, 최대한 빨리 끝내 줘.”
부탁인지 명령인지. 참으로 애매한 분위기였다. 표정을 보면 부탁, 말투나 고압적인 자세를 보면 명령 같았다.
제 아내를 제외하면 부탁이라는 걸 평생 해 본 적 없는 놈이라 저렇게 삐딱한가 싶었다. 물론 저게 요한의 최선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니.
썩 기분이 괜찮아진 카에덴 델피니움은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다 큰 조카와 친해져 볼 요량으로 머리를 굴려 보았다. 대화 주제가 하나씩 떠오르기는 했지만 적절하지는 않았다.
가족 얘기.
이 자리를 파멸로 이끌겠지.
그렇다면 역시 사랑하는 아내 얘기가 그나마 낫지 않을까. 사실 리세트를 제외하고서는 대화를 이어 나가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이 사태를 불러온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끄집어내기로 했다. 이것이 그나마 아내에게 정신이 팔린 놈의 시선을 끌어올 수 있을 터이니.
“애초에 걱정할 일을 만들지 않았으면 되잖아.”
리세트가 맛있다며 꼭 먹어 보라고 권한 쿠키를 조금 베어 물며 그가 말했다.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건 우리 조카님. 그래서 피해를 보고 있는 사람은 조카님의 아내와 아내분의 동기, 선량한 나.”
덕분에 가족의 정을 끈끈하게 나누는 것 같지 않으냐고 덧붙이려던 순간에 그는 보았다.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같이 꽁꽁 얼어 버린 듯한 요한의 얼굴을.
음. 아무래도 대화 주제를 선정하는 데 실패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