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새벽의 소동
여름이 지나갔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 게 피부로 느껴지는 시기였다.
낮과 밤의 온도 차가 극명해지고 있었지만 기분 좋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뿐, 아직 추위를 탈 날씨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게 추워 리세트는 눈을 떴다. 무거운 눈꺼풀이 다시 감기려고 해 힘을 주어 버텼다. 느릿하게 깜빡거리는 속눈썹의 그림자는 요한을 닮은 파란빛이었다.
몸을 안아 주듯 감싸는 파란 불빛의 그림자가 체온을 떨어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포근하다고 생각했던, 요한과 마찰이 생겨 침실에 감금당했을 때조차 차갑다고는 느껴 본 적이 없던 그 불빛인데도.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 올려 덮고 있었는데도 리세트는 오한이 드는 것처럼 추웠다. 물에 젖은 수건을 비틀어 짜는 듯 배가 뒤틀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아기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니었다. 리세트가 죽지 않는 한 델피니움의 비전 마법의 비호를 받는 아기는 절대 죽을 수 없다고, 카에덴 델피니움이 말해 주었다.
다행이다.
너무 아파 본능적으로 발가락이 곱아드는 와중에도 리세트는 웃을 수 있었다.
아마도 과식을 한 탓인 듯했다. 무슨 정신으로 그 많은 음식을 먹었는지 모르겠다.
요한이 몇 번이나 타이르고 말리기도 하였지만 리세트가 고집을 부렸다. 그래 보아야 고작 두 접시지만 그동안 먹은 양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많기는 했다. 평소에는 한 접시의 반도 채 비우지 못했으니까.
이 아픔의 원인도 알았고, 아기는 무사하고. 그러니 다시 잠들기만 하면 되는데…….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아도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리세트는 맥없이 늘어져 있던 손으로 배를 감쌌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봤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요한을 깨울까. 깨우는 게 나을까.
리세트는 요한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을 꾹 말아 쥐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말끔하게 털어 낼 수 있을 텐데 괜히 일을 키우게 될까 싶었다. 빈주먹을 쥐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려 요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잠을 청해 보려고 했지만 갈수록 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리세트는 무거운 몸을 조금씩 움직여 요한에게 더욱 꼭 붙었다.
피부에 닿는 요한의 몸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아픔이 차츰 옅어지는 것도 같았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불빛이 기이하게 일렁였다.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기 전, 리세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색감이었다.
❖ ❖ ❖
오랜만에 요한은 아주 깊게 잠이 들었다. 그러고 싶어 그런 건 아니었다.
긴 시간 동안 괴로워하는 리세트를 끌어안고 기다린 여파가 큰 듯했다. 겨우 그거 하나. 경직된 채로 몸부림도 치지 못하는 리세트를 안고 어서 빨리 그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을 뿐인데.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주제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택으로 돌아와 함께 씻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리세트가 음식을 잘 먹는 듯해 한시름 던 요한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먹는 것보다 흘리는 양이 많고, 과하게 억지로 먹고 있다는 걸.
그래야만 했던 리세트의 마음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괜찮다고, 얘기해 주고 싶어서 그런 것이겠지. 괜찮다고. 연구실에서도, 돌아오는 길에도 잠들지 못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은 당연히 음식을 제대로 담지 못했다. 멀쩡한 음식을 눈앞에 두고도 애먼 접시를 쿡쿡 찌르는 빈도가 늘었을 때 요한은 조심스럽게 리세트의 손아귀에서 포크를 빼앗아 갔다. 입가를 닦아 주며 그만 먹어도 된다고 했지만 리세트가 거부했다. 입을 앙 벌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너는 알까. 그 모습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워 보였는지. 지쳐 보였는지. 모르니까 계속 웃었겠지.
그만해도 된다고, 억지로 먹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던 요한은 결국 리세트가 만족스러워할 때까지 음식을 먹여 주었다.
테이블을 치우러 온 메이 하핀이 비명을 지르며, 의자 옆으로 기울어지는 리세트의 몸을 받아 들고 나서야 식사 시간의 막이 내렸다. 제 할 일을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리세트는 그 자리에서 곯아떨어졌다.
요한은 뒤척이는 리세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리세트가 평소보다 많이 움직였다. 끙끙거리며 품을 파고드는 몸을 안았을 때 요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손에 닿는 살결이 마치 불덩이 같았다.
“리세트?”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운 요한이 어깨를 붙잡아 흔들어 보았지만 리세트는 의식 없이 헐떡이기만 할 뿐이었다. 고요했던 저택을 깨우는 종소리가 드높게 울려 퍼졌다.
“의사를 불러와라. 카에덴 델피니움도 당장 오라고 해.”
리세트의 호흡을 확인하며 요한은 침실로 들어서는 하녀들에게 명했다.
갑작스러운 소란과 벼락같은 주인의 명령에 당황스러워하던 그녀들은 쓰러지듯 잠이 든 리세트를 보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뒤늦게 뛰어 들어온 하녀들은 마른 수건과 미지근한 물을 받아 왔다.
요한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아 주며 초조하게 문 쪽을 살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터벅터벅 걸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좀 가자는 핀잔 섞인 목소리도 함께였다.
“웬 소란이야. 시끄럽게.”
하품을 하며 안으로 들어온 카에덴 델피니움의 눈썹이 구겨졌다. 요한의 품에 안긴 채로 고개도 가누지 못하는 리세트를 본 그는 고개를 젖혀 한숨을 한 번 깊이 쉬고 곧장 달려왔다. 노바르 로슈만은 벌써 침대에 당도한 후였다.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오늘은 마력을 주지 말라고 했잖아.”
카에덴 델피니움은 리세트의 목을 한 손으로 감아쥐듯 잡았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준 적 없어.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리세트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어.”
“일단 알겠고, 이제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가.”
하녀들이 자리를 비우자 그는 옆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노바르의 등을 확 떠밀었다.
“너는 저 문 너머에서 누가 오는지 살펴. 마력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게 침대 주변에는 방어진을 그려 놓고.”
“알겠습니다.”
문에 등을 기댄 채로 노바르는 마법을 전개했다. 침대 바닥에 방어 마법진이 그려진 걸 본 후 카에덴 델피니움은 리세트의 몸으로 마력을 흘려 보냈다.
침묵의 시간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깨어졌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그만 손을 거둔 카에덴 델피니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이상한 게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빨리 끝난 거야. 마력 때문에 생긴 문제는 아니야.”
침실을 채우던 마법진이 파훼되자 눈이 아플 만큼 눈부신 빛이 한차례 폭풍처럼 휘몰아치다 일제히 사라졌다.
요한은 아직까지 눈을 뜨지 못하는 리세트의 몸을 다시 당겨 안았다. 힘없이 늘어지는 몸이 그날의 기억을 몰고 왔다. 아카데미에서, 리세트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그날의 풍경이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 괜찮다며 미소 짓던 그 파리한 얼굴까지도.
“이건 의사가 필요한 문제 같은데.”
카에덴 델피니움의 간명한 눈짓을 곧바로 파악한 노바르가 문을 열고 나가 하녀들을 찾았다. 의사는 언제 도착하느냐 묻는 목소리가 침실까지 울려 들어왔다.
“평소랑 다른 점은 없었어? 갑자기 이러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무릎을 굽혀 앉은 카에덴 델피니움은 리세트의 목덜미와 이마를 차례대로 짚었다. 열에 허덕이는 걸 보면 감기인 것 같기도 한데, 몇 시간 전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앓아눕는 건 상식적인 선에서 말이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마법의 여파를 의심했지만 리세트의 몸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마력은 평소와 똑같은 양상을 보였다. 그러니 분명 다른 문제가 있을 텐데.
그는 리세트를 가두듯이 안고 있는 요한을 보며 그만 허리를 폈다.
“다른 점은 없었냐고.”
다시 한번 묻자 그제야 요한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거야 원. 병자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었네. 오히려 혈색은 리세트가 훨씬 나아 보였다. 요한의 낯빛은 그저 창백해 무덤에서 기어 나온 시체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평소보다 음식을 많이 먹었어. 지나칠 정도로.”
“이유, 찾았네. 배탈 난 거잖아.”
“겨우 그런 걸로 이렇게 아파하는 게 말이 돼? 다시 확인해 봐.”
“말이 왜 안 돼. 체했으니까 마력은 정상인 것이겠고, 식은땀은 뻘뻘 흘리고. 게다가 손은 차갑잖아.”
리세트의 손바닥에 제 손을 겹쳐 본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간명한 답을 내려 주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체한 게 분명한데 요한은 또다시 확인해 보라고 닦달했다.
저 눈, 앓아누운 사람보다도 더 병자 같은 몰골을 하고 있으면서도 눈빛만큼은 형형한 저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귀찮다는 듯 요한의 면전에서 휘적이던 손으로 그는 리세트의 이마를 살며시 눌렀다. 역시 이번에도 마찬가지. 리세트의 마력은 지극히 안정적이었다.
“너무 정상이네. 오히려 낮보다 건강한 것 같은데?”
안심하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요한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바깥을 향해 외쳤다.
“의사는 아직인가?”
“지금 계단을 올라오고 있습니다!”
노바르의 외침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제대로 옷을 갖추어 입지도 못한 의사가 숨을 헉헉거리며 달려왔다.
❖ ❖ ❖
의사의 진찰 결과는 카에덴 델피니움이 낸 의견과 동일했다. 단순한 배탈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안심이 되지 않아 요한이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의사는 똑같은 말을 차분히 들려주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침실에는 나직한 한숨 소리만 외로이 떠돌았다.
아기 때문에 약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요한은 최대한 빨리 통증을 줄여 주는 약을 가져오라 명했다. 약을 가려 먹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 것에 당할 만큼 이 가문의 비전 마법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의사가 절대로 안 된다며 거듭 설득했지만 카에덴 델피니움까지 나서서 약을 가져오라고 하자 상황이 마무리 지어졌다.
약을 먹은 후 리세트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고르게 숨을 쉬었다. 열이 내리는 걸 확인한 요한은 땀에 젖은 몸을 닦아 주고 새 잠옷을 꺼내 입혀 주었다.
날이 밝아 올 때까지 리세트는 한 번도 뒤척이지 않고 곤한 잠을 잤다.
잘게 떨리는 손을 말아 쥔 채로 요한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봉긋하게 부푼 배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렀지만 손길이 향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