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규칙 위반
오늘은 사뭇 연구실의 분위기가 달랐다. 카에덴 델피니움이 지정해 준 자리에 앉으면서도 리세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맞는데, 정확히 딱 꼬집어 무엇이 달라졌다고 말하기가 애매했다.
리세트는 뒤편에 선 요한을 힐긋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들기가 무섭게 눈이 마주쳤고 요한은 리세트의 눈가를 문질러 주며 안심하라는 듯한 미소를 보내 주었다. 여기까지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요한을 떠난 리세트의 시선은 카에덴 델피니움 쪽으로 옮겨 갔다. 저 사람이야말로 변한 게 없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껏 같은 모습을 고수하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사람 속을 뒤집고 제 할 일은 척척 해내고, 궁금한 건 절대 못 참고.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거지?
리세트는 마지막으로 노바르를 보았다. 제일 의심이 가지 않았던 사람이 그였는데, 아무래도 단단히 잘못 짚은 듯했다. 연구실 분위기가 달라진 이유는 놀랍게도 노바르였다.
왜 굳이 저렇게까지 움직이나 싶을 정도로 노바르는 바쁘게 돌아다녔다. 보는 사람이 숨이 찰 정도였다.
“연구원님, 여기에 두면 될까요?”
“아니. 나한테 가져와.”
“네!”
카에덴 델피니움에게 책을 가져다주는 노바르의 행동 하나하나가 무척 공손했다. 시키지 않아도 물을 가져다주고 펜촉을 다듬어 주고. 어제까지만 해도 저러지 않았는데. 예의를 지켰지만 딱 그 범위를 넘어가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시키는 것만 했다. 하기 싫은 티를 살짝살짝 내면서.
저 혼자만의 착각일까 싶어 리세트는 요한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 흔들었다. 반문하듯 바라보는 요한에게 고개를 숙여 보라며 손짓했다.
“좀…… 이상하지 않아? 노바르 말이야.”
요한의 귓가에 바짝 입술을 붙인 채 리세트는 속삭이듯 말했다.
“뭐가?”
귓가를 스치는 요한의 목소리도 리세트만큼이나 작았다. 평소라면 간지럽다며 웃었을 테지만 리세트의 눈은 여전히 노바르에게 가 있었다. 그 덕에 리세트는 요한의 눈동자에 살벌한 기운이 실리는 걸 미처 살피지 못했다.
“연구원님한테 은근히 대들 때도 있었잖아. 그런데 지금은 너무 공손하지 않아? 나만 그렇게 느껴?”
“글쎄…….”
요한은 기습적으로 리세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약점이라도 잡혔나 보지. 신경 쓰지 마.”
조금 붉어진 리세트의 뺨을 엄지로 쓸며 요한은 그만 허리를 세웠다. 때마침 준비를 마쳤는지 카에덴 델피니움이 약병을 들고 다가왔다.
손에 쥔 약병을 허공으로 던지고 놀던 그가 불시에 약병을 던졌다. 그것을 안정적으로 잡은 요한은 마개를 따 리세트에게 주었다. 자신에게 약병을 던진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였다.
“위험하게 그걸 왜 요한에게 던지세요?”
리세트는 입 안에 약을 털어 넣는 순간에도 카에덴 델피니움을 쏘아보았다.
“그냥.”
그처럼 황당한 대답에 약병을 쥔 손의 손등에 핏줄이 올라왔다.
“재수가 없어서?”
그가 태연하게 덧붙이는 말이 리세트를 더욱 황당하게 했다.
“그러다 다치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우등생. 전쟁 영웅이라 추앙받는 놈이 유리병 하나 못 피하는 게 말이 돼?”
그 말의 뜻은 합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세트가 구겨진 표정을 풀지 않자 그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시키지 않은 짓을 하잖아. 여기는 내 공간이니 내 명을 따라야지.”
“요한이 언제 규칙을 어겼는데요?”
카에덴 델피니움이 정한 규칙이 몇 개 있었다. 연구에 집중할 것. 액체로 된 건 반입 가능. 즉 마실 것만 가져와 열심히 연구를 도우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중에 요한이 어긴 규칙은 하나도 없었다. 리세트는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턱 끝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카에덴 델피니움의 잇새로 실소가 흘렀다.
“귓속말했잖아.”
불쑥 그 뒤에 벌어진 일까지 생각난 리세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건요…….”
“애정 행각 하고.”
“…….”
“이래도 어긴 게 없어?”
카에덴 델피니움은 낚아채듯 리세트가 쥐고 있던 약병을 가져갔다. 부부가 키스를 하든, 그보다 더한 짓을 하든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도움이 된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지적하고 나선 이유는 순전히 리세트 때문이었다. 저 순진한 반응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방금까지 제 남편을 두둔하던 여자의 시선은 바닥에 박혀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덕분에 얼굴뿐만 아니라 목덜미까지 빨개진 게 훤히 보였다. 그는 역전된 상황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아무리 부부라지만 조심 좀 합시다.”
“……네.”
“여기에는 아직 짝이 없는 불쌍한 노바르 로슈만도 있으니까.”
갑자기 제 이름이 나와 노바르가 화들짝 놀라 바로 반박했다.
“제가 왜 불쌍합니까? 그렇게 따지면 연구원님도 미혼이시잖아요.”
“나는 짝이 있기는 한데?”
“네에?”
비명 같은 외침은 리세트의 입을 비집고 나온 것이었다. 노바르는 너무 놀라 말을 잊어버려서 입술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누군데요?”
“왜. 궁금해?”
“네.”
“너희 선생님.”
“……어떤 선생님이요?”
“리세트 너랑 노바르 로슈만의 선생님. 미혼은 한 사람밖에 없지 않나.”
시선을 교환한 리세트와 노바르의 입술이 동시에 벌어졌다.
“로티 선생님이요?”
“어. 케서린 로티.”
워낙 큰 소리에 귀가 따가워져 카에덴 델피니움은 슬쩍 귀를 가렸다가 손을 뗐다. 불시에 괴물이라도 목격한 듯한 얼굴로 리세트와 노바르가 빠르게 말을 주고받았다. 사실일까?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당사자를, 심지어 방금 사실을 밝힌 사람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시끄러운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어느새 결혼까지 흘러가 있었다. 상상력이 대단히 풍부한 수석과 차석이구나. 지금까지 잠자코 무시했던 그였지만 결혼에 관한 건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듯싶었다.
“결혼이라니. 나는 그런 거 안 해.”
“연인이라면서요.”
“누가 그래? 연인이라고.”
“방금 연구원님께서 직접…….”
“서로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는 관계야. 밤에.”
그는 심상한 얼굴로 툭 말을 뱉으며 리세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마력을 확인하기 시작하자 어색하게 대화가 중단되었다.
마력을 거두어들인 그의 입술이 만족스럽다는 듯 휘어졌다. 리세트의 마력은 거의 다 채워진 상태였다. 시키지 않아도 그 쓴 약을 들이켜더니. 이렇게 빨리 회복할 줄이야.
매일 노바르에게 시켰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그가 직접 책상으로 가 마법식을 고쳤다.
“잘됐네. 요한, 너한테도 드디어 할 일이 생겼어. 네 아내 좀 안아 줘 봐.”
합법적으로 애정 행각을 벌여도 되는 시간이 왔다며 카에덴 델피니움이 키득거렸다.
“이제 엄청 아플 거거든.”
❖ ❖ ❖
리세트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아픈 거에는 이골이 날 정도로 면역이 생겼다. 참는 게 일상이 된 날들을 견뎌 왔으니 오늘도 괜찮겠지.
밀란 선생님의 치유 마법을 받고 나서도 죽을 만큼 아팠고, 매일매일 요한의 마력을 받아들이는 그 고통의 시간 덕분에 그리 긴장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카에덴 델피니움, 마치 가벼운 산책이라도 나가는 듯한 그의 말투 덕분에 더더욱 그러했다.
‘시작한다?’
그 간결한 질문이 떨어짐과 동시에 고난이 찾아왔다.
리세트의 예상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요한의 마력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또 달랐다. 몸의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아픔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생살을 찢어발기는 듯한 감각이었다.
마법식을 몸에 새겨 넣는 작업이라고 했다. 델피니움가의 비전 마법과 아기를 떼어 놓기 위해 카에덴 델피니움이 만들어 냈다는 그 마법식.
요한의 품에 안긴 채로 리세트는 카에덴 델피니움에게 등을 내 주었다.
‘기절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돼. 정신 똑바로 차려. 너무 힘들면 요한 머리채라도 잡아. 잡아서 뜯어 버려.’
리세트의 등을 손으로 살며시 짚은 그가 남긴 경고이자 충고였다.
마력을 흘려 보내면서도 종알종알 그가 계속 말을 해 주는 듯했지만 리세트의 의식까지 닿지는 못했다. 리세트가 느낄 수 있는 건 제 몸을 끌어안은 팔의 떨림뿐이었다.
한 번에 끝내자. 한 번에.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리세트는 입 안의 연한 살을 당겨 물며 견뎌 냈다. 경직된 요한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어 주기도 했다. 요한이 무슨 말을 해 주기는 하였는데 기억에 남는 건 하나도 없었다.
마력으로 식을 그려 넣고 있는 게 맞나. 칼로 도려내는 게 아니라?
흐릿해지는 머릿속으로 잡다한 물음이 샘솟았다. 찔려 본 적은 없지만 정말 칼에 베인다면 이런 느낌일 것만 같을 정도로 생생한 아픔이었다.
카에덴 델피니움이 혹시…… 나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제법 신빙성 있는 의문에 리세트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다 곧 깨달았다. 자신이 이상한 망상에 빠졌다는 걸. 그걸 두고 볼 요한이 아니라는 건 리세트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을 때 리세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낮에 시작된 고통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마침내 끝이 났다.
요한에게 안겨 연구실을 나서던 리세트는 앞으로 이 짓을 최소 다섯 번은 더 겪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지만 그걸 표현하지는 않았다. 카에덴 델피니움에게 무어라 따져 묻는 요한의 얼굴이 무척 지쳐 보였으니까.
여기서 기절하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으로 버텼던 것 같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하늘은 역시 예뻐. 요한, 네 머리카락색이랑 비슷해. 조금 더 어두워져야 하긴 하지만. 그렇지?”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 줄도 모르고 리세트는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정신 줄을 붙잡는 데 꽤나 큰 도움이 되었다.
식사 전까지 자라는 요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리세트는 꿋꿋이 눈을 뜨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요한의 손을 빌려 샤워도 했다. 직접 포크를 들고 음식도 먹었다. 흘리는 게 더 많아 나중에는 요한이 먹여 주었지만 치솟는 구역질을 참아 가며 음식을 씹고 삼켰다.
괜찮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약한 모습을 드러낼수록 요한은 아기를 싫어하게 될 테니까.
“우와아, 이거 맛있는 거 같아. 더 줘, 요한.”
재촉하듯 입을 크게 벌린 리세트는 입 속으로 쏙 넣어지는 고깃덩어리를 꼭꼭 씹었다.
턱은 움직이는데 감각은 없었다. 비릿한 맛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다 괜찮은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