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믿을 수 없어
“왜요?”
“숨겨 놓은 공책, 내놓으라고.”
“그런 거 없어요.”
“나한테 준 거 말고, 숨겨 놓은 거 있잖아.”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카에덴 델피니움의 손은 여전히 노바르의 코앞에 와 있었다.
“공책은 갑자기 왜 찾으시는 건데요?”
“너희 둘이 머리를 맞대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서.”
일전에 내준 공책은 실패작으로 전락한 식만 담겨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걸 옮겨 적은 공책은 아직도 노바르가 가지고 있었지만, 더는 쓸모를 다할 수가 없어 그가 본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노바르는 선선히 공책을 가져다주었다.
공책을 건네받은 카에덴 델피니움은 터벅터벅 걸어가 소파에 누워 버렸다. 공책을 휘리릭 넘기는 소리가 꽤 빨랐다.
“뭐야.”
마법식을 고치는 데 몰두해 있던 노바르는 그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막 한숨이 나오려던 찰나였다.
“너희 지금껏 내 연구 자료를 토대로 마법식을 만든 거야?”
핏기가 싹 사라진 것처럼 노바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럴 수는 없다.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노바르는 하나 남은 희망을 간절하게 붙잡았다.
“이름……. 이름의 머리글자가 다르잖아요.”
“저걸 발표할 때만 하더라도 요한이 영지에서 나를 내쫓지 못해 안달이었거든. 몰래 발표를 해야 해서 가명을 썼지.”
“……안 돼.”
속삭임에 가까운 노바르의 애처로운 음성은 공책을 넘기는 소리에 묻혀 카에덴 델피니움에게 닿지 못했다.
노바르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환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동안 그 연구를 완성한 대단한 학자에게 품어 왔던 동경은, 언제가 꼭 찾아가 제자로 받아 달라고 부탁하려던 소망과 함께 뒤섞여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내가 지금껏 카에덴 델피니움을 존경했다니.
“말도 안 돼. 어쩌다 이런…….”
머리를 세차게 털어 가며 부정해 봐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오랜만에 본 자신의 연구를 살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흘리듯이 얘기했고, 그건 연구자 본인이 아니면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알 수 없는 일화였다.
노바르는 막막한 현실을 이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인 건 맞지만 카에덴 델피니움이 학식이 깊은 학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알고는 있었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했다.
노바르의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그토록 만나기를 고대하던 사람의 제자 비슷한 것이 되어 연구를 돕고 있으니.
좋게 말해야 제자고, 현실적으로 노예에 가까워 보이지만 그것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좋게 생각하고 포장해야만 노바르의 정신을 지킬 수 있었다. 아무래도 리세트에게는 나중에 알리는 게 나을 듯했다.
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야. 훌륭한 연구자야.
노바르는 이제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 ❖ ❖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도 깊어지는 정적을 몰아내 주지는 못했다. 사락사락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연구실에서 멀어질수록 리세트의 어깨를 감싼 손에 실려 있던 힘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제는 가볍게 잡고만 있었다.
리세트는 눈동자만 슬쩍 옆으로 돌렸다. 대화가 끊겨도 불편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조금 눈치를 보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시선의 높이는 요한의 어깨와 맞물려 있었다. 어깨를 지나 목,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듯한 턱을 스친 시선이 슬금슬금 위를 향해 갔다.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너무 놀라 리세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무례한 말에 일일이 대꾸해 줄 필요 없어.”
요한은 아직도 카에덴 델피니움의 말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정작 리세트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혼자만 표정이 심각했다.
질문이 끝날 줄 모르고 이어져 피곤하고 귀찮았던 것뿐이지 카에덴 델피니움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슬픈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리세트는 일단 요한이 원하는 답부터 건넸다.
“알겠어. 적당히 무시할게.”
못 믿겠다는 듯 요한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럴 때면 그 남자와 더욱 닮아 보인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정원에 들렀다 갈까?”
충동적인 질문을 던진 리세트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가고 싶어?”
“응.”
저택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과 정원으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두 개의 그림자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해가 하늘의 중앙에 위치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지 않는 시간대였다.
어깨를 감싸 쥐고 있는 손을 떼어 낸 리세트는 재빠르게 팔짱을 꼈다. 잠깐 저택을 바라본 요한이 먼저 발걸음을 돌려 주었다.
영지로 온 후 요한에게 버릇이 생겼다. 창가에 서서 가만히 정원을 내려다보는 것이 첫 번째 습관이었다. 요한이 눈길이 리세트를 떠나가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추억이 깃든 곳이라 그런 걸까.
정원 초입에 다다랐을 무렵 리세트는 골똘히 요한을 보았다. 추억을 회상하는 얼굴이 저럴 수는 없을 텐데.
다소 무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요한의 얼굴에는 표정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꽃 한 송이 피어 있지 않은 정원은 푸르렀다. 정원이라기보다 숲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물씬 풍기는 풀 내음이 상쾌했다.
그 끔찍한 사고가 휩쓸고 가기 전만 해도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고 했다. 그걸 알려 주던 집사장의 눈길에서는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쓸쓸함이 묻어났다.
정원에는 꽃을 심지 말 것. 저택을 복구할 때 아무런 말이 없던 요한의 명령은 그것이 전부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눈을 떼지 못하면서.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파란 눈동자가 리세트를 직시했다. 너무 갑작스러워 리세트는 아무런 말이나 해 버렸다.
“매일 아침마다 꽃은 어디서 가져오는 거야?”
“근처 가게에서.”
“역시. 그럴 것 같았어.”
멋쩍은 듯한 웃음소리를 흘리던 리세트의 입술이 살며시 다물렸다. 팔짱을 낀 손을 쥐었다 폈다 꼼지락거리고 있는 것을 본 요한은 피식 웃으며 이마에 입 맞추었다.
“리세트. 이제 쿠키 먹으러 갈까?”
리세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묶지 않은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을 따라 방정맞게 흔들렸다.
요한 본인이 말을 돌리고 싶을 때, 혹은 어떤 질문을 꺼낸 리세트가 당황해 우물쭈물할 때면 쿠키를 찾는 것. 요한에게 생긴 또 하나의 버릇이었다.
❖ ❖ ❖
침실을 밝힌 불빛은 침대에 나란히 앉은 연인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수도에서 보내오는 소식 전부는 집사 로드니의 손을 거쳐 왔다. 편지에는 예정보다 이르게 유리온실이 완성될 것 같다는, 근래 들어 가장 기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소식을 듣지 못한 셀번 밀란과 케서린 로티가 같은 날에 찾아왔다가 헛걸음했다는 내용을 마지막으로 편지는 끝이 났다.
편지를 태워 없앤 요한은 문득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초를 세던 요한의 어깨에 가벼운 무게감이 툭 닿았다. 잠에 빠져들어 간 리세트가 뺨을 어깨에 문지르며 눈을 찡그렸다. 뺨에 닿는 옷의 감촉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요한은 리세트의 손이 아직도 놓지 않고 있는 공책을 먼저 빼내 협탁에 올려놓았다. 며칠 전 아침, 바닥에 떨어져 있는 공책을 보고 리세트가 속상해하던 것을 떠올린 탓이었다.
리세트의 반대편 손에는 오늘도 쿠키가 쥐어져 있었다. 요한은 그것도 조심스럽게 빼냈다. 그의 허벅지 위에 두었던 접시에는 아직 포도잼 쿠키가 다섯 개나 남아 있었다.
이걸 다 먹어야만 잠이 들었던 리세트가 쿠키도 잊은 채 눈을 감았다니.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었다.
요한은 공책 위에 접시를 포갰다. 먹다 만 쿠키에는 조그맣게 베어 문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앙증맞은 흔적에 결국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 손으로 리세트의 머리를 받친 요한은 조심스럽게 침대 머리에서 등을 떼어 냈다. 편하게 눕게 해 주자 리세트의 입가에 사르르 미소가 맺혔다. 입술에는 쿠키 부스러기를 잔뜩 묻힌 채로, 뭐가 그리 좋을까.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입술을 털어 주던 요한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말캉한 입술에 쪽, 작은 소리만 남기고 떠나가려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요즘은 깊게 잠이 드니 이 정도로 깨지는 않겠지.
조심스러웠던 움직임은 어느새 대담해졌다. 요한은 오물거리는 입술을 한입에 삼켰다.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요즘 리세트가 끼고 사는 그 쿠키의 맛처럼,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았다.
한참 만에야 고개를 든 요한은 침대를 벗어나 창가에 섰다. 쌀쌀한 날은 아니지만 창문을 여는 건 내키지 않았다. 요한은 창틀에 몸을 기대어 포근한 어둠이 깔린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꽃을 심어 둘 걸 그랬나.
정원에 핀 꽃을 보고 기뻐할 사람이 없어 그랬을 뿐, 다른 뜻이 있어 꽃을 심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건 아니었다. 더 이상 필요치 않으니까, 정원을 조성할 이유가 없었다.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어느덧 가을의 초입. 어차피 꽃을 심어 두었다 해도 지금쯤은 시들었을 테지만 아쉽기는 했다.
시간에 맞추어 꽃을 안겨 주고, 곁을 지키고. 리세트에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그것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무력감을 다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랑하는 여자가 아파하는 걸 지켜보며 부디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시간이라니. 심지어 그 아픔의 원인이 이 지긋지긋한 가문, 그 자신이라니.
노바르 로슈만조차도 제 할 일을 부여받아 충실하게 수행하는 데 반해, 요한 혼자서만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우두커니 자리만 지켰다.
리세트의 마력과 몸 상태를 확인하는 건 카에덴 델피니움이, 리세트가 물어보는 질문에 대한 답은 노바르 로슈만이 주었다. 샅샅이 둘러보아도 별채의 연구실에서는 그가 할 일이 없었다.
‘너는 쓸모가 없다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무게 잡지 말고 그 잘난 얼굴로 좀 웃고 있어. 인상 쓰지 말고. 네 아내가 조금이라도 힘을 내길 바란다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
카에덴 델피니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니까.
이불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려와 요한의 생각이 멈추었다. 요한은 침대로 돌아가 뒤척이고 있는 리세트 곁에 몸을 누였다. 품에 안아 등을 토닥여 주자 리세트의 움직임은 잠잠해졌다.
불안한 마음에 좀처럼 감을 수 없던 눈에 조금씩 잠기운이 번졌다.
서로를 꼭 끌어안은 연인에게도,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공책과 그 위에 둔 접시에도 포근한 빛이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