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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07)화 (107/151)

107화
숨기는 거

영지에서 보내는 일상은 수도에서의 시간과 비슷한 듯 다르게 흘러갔다.

저녁 시간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달이 떠오르면 리세트는 요한의 품에 안겨 마력을 받아들이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수도에서부터 일상이 되어 버린 일이었다.

낮 시간의 일과가 많이 달라졌다. 카에덴 델피니움의 주도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완벽해서 손볼 것이 많지 않다며 자신하던 카에덴 델피니움은 꼼꼼하게 리세트의 상태를 확인하며 마법식을 고쳐 나갔다. 그는 노바르에게도 공평하게 관심을 나누어 주었는데, 노바르가 극구 사양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나름의 재미를 주었다.

덕분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리세트는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노바르와 달리 리세트에게 주어진 임무는 간단했다. 카에덴 델피니움이 고친 마법식을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도록 외우는 것. 마법사로 살아오는 동안 늘 해 오던 일이라 처음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이처럼 난해하고 복잡한 식을 외우기란 쉽지만은 않았다.

리세트는 마법식을 외우는 데 총력을 기울였지만 몸이 따라가지를 못했다. 가뜩이나 마력을 받아들이느라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가 졸음까지 쏟아졌다. 집중하기에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게다가 문제는 다른 곳에서 또 발견되었다.

리세트가 본래 가진 마력을 회복하는 게 가장 시급한 안건으로 급부상했다.

“요한과 떨어져 지낸 시간도 길고, 아기의 존재를 숨겨 오는 동안 너의 마력을 흡수해 아기가 버텨 왔거든. 죽지 않은 게 용하지. 너는 일단 마력부터 회복해.”

카에덴 델피니움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약해진 마력을 되돌리기 위해 리세트는 우선 마력 회복에 좋은 약을 섭취하며 스스로 치유 마법을 전개했다.

그 마법진을 유지하는 건 온전히 리세트 몫이었다.

입이 무거운 치유 계열 마법사를 당장 구하기란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리세트 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녀 본인이기도 했다. 다른 마력의 개입은 최소화하는 게 좋다고 하니 더더욱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고 싶지는 않았다.

각자 제 할 일에 몰두했다. 겉보기에는 화목한 연구의 시간이었다.

실상을 파고들면 꽤나 다른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노바르와 카에덴 델피니움은 일방적인 관계였다.

한 명은 지시를, 다른 한 명은 그 지시를 따랐다. 의견 충돌이 잦기도 했지만 연구에 관한 건 아니었다. 연구실에 음식물을 반입해도 괜찮은지, 만약 괜찮다면 어디까지가 허용이 되는 범위인지. 일상적인 부분에서 크고 작은 싸움이 일어났다.

소리 없는 전쟁 같은 신경전은 요한과 카에덴 델피니움 사이에서 발발했다.

카에덴 델피니움이 입을 열기만 하면 요한의 표정이 구겨졌고, 요한의 얼굴이 펴지면 카에덴 델피니움이 불쾌해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둘 모두의 얼굴이 편안해진 적은……. 리세트가 기억하는 한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식사를 따로 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들이 영지에 도착한 첫날, 집사장은 당연히 식당에 음식을 차렸다.

식사를 끝내고 각자 방으로 돌아가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이조차도 비극을 맞고 말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흔한 말다툼도 하지 않았는데 분위기 자체가 불편해 자연스럽게 파했다.

아침을 챙겨 먹은 리세트와 요한은 손을 잡은 채로 별채의 연구실로 향하고 있었다.

“속은 괜찮아?”

요한은 리세트의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

“당연하지요. 이제 전처럼 메스껍지는 않아.”

“억지로 먹지는 마.”

“배고파서 먹은 거야. 걱정 마.”

사실 아직도 속이 더부룩하지만 그걸 티 내지 않고 참아 낼 정도는 되었다. 리세트는 굳이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의사나 임신 관련 서적에 따르면 슬슬 입덧이 가라앉을 시기라는데, 안타깝게도 리세트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래도 조금, 아주 미묘한 차이지만 헛구역질까지 할 정도는 아니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별채가 보이기 시작하자 리세트는 조금 걸음을 늦추었다.

영지의 저택에 연구실을 내줄 정도면 어렸을 때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나?

어제 오후, 점심시간이 막 지났을 즈음에 리세트와 노바르의 그 공통된 궁금증을 요한이 간단하게 풀어 주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지치지 않고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영지에 연구실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알아서 하겠노라고. 뒷일은 장담하지 못한다고. 꽤나 효과적인 협박인 건 확실하지만 요한은 무시로 일관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수도의 델피니움 공작저에는 편지가 빗발치듯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가문에서 보내온 항의 편지였다. 개중에는 아카데미에서 보낸 것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편지의 내용은 미리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발 좀 데려가라고, 카에덴 델피니움이 시작하는 연구 때문에 영지에 외지인들이 오지 않아 경제가 파탄 난다고 하소연했다. 그 와중에 카에덴 델피니움도 독촉 편지를 보냈다.

결국 요한은 저택을 복구하면서 별채를 하나 더 만들어 그에게 주는 것으로 이 기나긴 항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일이 이렇게 흐를 때까지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나, 그걸 방관하며 넘기고 버틴 사람이나 참 대단했다.

작게 고개를 젓는 리세트 등 뒤로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선선한 바람이 어서 연구실로 들어가라는 듯 등을 떠밀고 있었다.

❖ ❖ ❖

의자에 앉아 있는 리세트는 눈을 감은 채 턱만 움직였다. 카에덴 델피니움이 자신의 마력을 살펴보는 사이에도 리세트의 입술은 부지런히 약초를 꼭꼭 씹어 먹고 있었다.

햇빛에 어우러진 마력은 여전히 파란빛을 띠었지만 농도가 조금 옅어 보였다. 리세트의 몸을 휘감듯 움직이던 마력은 천천히 가라앉아 종내에는 바닥에 넓게 퍼졌다.

리세트의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거둔 그는 뒤를 돌아 노바르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제 고친 마법식 도형에서 수식을 하나 더 변경해야겠어. 다섯 번째 장, 중앙에 적힌 식으로 바꿔.”

책장을 넘기는 노바르를 본 그가 리세트 앞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리세트 뒤에 꼼짝 않고 서 있는 요한은 보이지도 않는지 그는 생긋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너 혹시 나한테 또 숨기는 건 없어?”

“없어요. 갑자기 그건 또 왜요?”

“반란을 저지르다가 몰락한 귀족 가문이라든가, 뭐 그런 거 아니야?”

“……아닌데요?”

“비밀은 지켜 줄게. 말해 봐.”

“아니라니까요.”

카에덴 델피니움은 들고 있던 펜을 높이 던졌다가 다시 받아 드는 동작을 세 번 반복했다.

“부모님 중 한쪽이라도 마법사이지는 않을까?”

대충 왜 묻는지 알 것 같아 리세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아직도 리세트의 부모님이 마법에 조금이라도 연관 있을 것이라는 데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이미 몇 번을 말했는데도.

그건 오히려 리세트가 어렸을 때 종종 부질없이 되뇌던 상상이었다.

부모님이 마법사라면, 그래서 제 한 몸 몬스터에게서 지켜 낼 힘이 있었다면 아직도 살아 계시지 않을까. 그 말도 안 되는 바람은 배움의 크기가 커질수록 자취를 감춰 더 이상 남아 있지도 않았다.

“몰락한 귀족일 리 없어요. 그러니 당연히 마법사도 아니세요.”

“너는 그때 어렸잖아. 장담할 수 있어?”

“제가 나고 자란 마을에서, 저희 부모님의 부모님, 그 부모님의 부모님까지 오랫동안 사셨다고 했어요.”

“마법을 공부한 건 아닐까? 자기들은 갖지 못했지만, 어떤 방법을 써서 너한테 마력을 주었을지도 모르지.”

“그럴 리 없어요.”

리세트의 부모님에게는 책을 읽고 지식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그들은 글자를 깨우치지 못해 한평생 책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리세트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건 자신들은 누리지 못한 것을 딸에게까지 전가하기 싫었던 부모님이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마을의 작은 학교에 보낸 덕이었다.

과거를 세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리세트가 입술을 다물었지만 그의 입술은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번만 잘 생각해 봐.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의 결합으로 마법사가 태어나다니. 불가능한 일이잖아.”

“제가 있잖아요.”

“아, 그래. 기적.”

한쪽 입꼬리만 끌어당긴 미소를 지은 그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기적이라니.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머리를 비우려고 할수록…….”

“더 대꾸해 주지 마, 리세트.”

말을 가로챈 요한은 리세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가자. 오늘 할 일은 끝났잖아.”

리세트가 입술을 열기도 전에 요한이 어깨에 팔을 둘러 움직임을 저지했다. 요한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리세트를 이끌어 연구실을 나섰다.

❖ ❖ ❖

리세트와 요한이 사라지자 연구실의 분위기가 한층 더 침울해졌다. 원인은 저 남자, 창가에 서서 떠나가는 두 사람을 바라만 보고 있는 카에덴 델피니움 때문이었다.

“그런 걸 대체 왜 물어보세요?”

결국 노바르는 참지 못하고 핀잔했다.

“리세트의 마음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으셨죠? 그런 걸 본인 면전에 대고 묻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질문을 받았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답을 하는 게 당연한 건데, 카에덴 델피니움은 전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꺼냈다.

“요한도 알아?”

“뭐를요?”

“이름 부르는 거.”

카에덴 델피니움이 생긋 미소 지었다.

“요즘 둘이 자주 붙어 있더니 이름도 막 부르네.”

자연스럽게 그리된 일이었다. 리세트가 먼저 이름을 불렀고, 노바르는 눈치를 살피다 넌지시 불러 보았다. 딱히 싫어하거나 거북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아 얼마 전부터 서로 이름을 불렀다. 말도 낮추어 편안하게, 마치 꼭 친구처럼.

“공작께서 알고는 계세요.”

리세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공작의 미간이 좁혀지는 걸 알고 있어 그가 있을 때는 되도록 이름을 부르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거의 온종일 공작이 리세트 곁에 붙어 있으니 이름을 부를 일이 많지 않기도 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에 실망했다고 하더니 불쑥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이번만큼은 노바르는 속지 않았다. 뜬금없이 악수를 청할 일은 없을 테니까.

손을 건네는 대신 노바르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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