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화해
조용했던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요한은 달갑지 않은 밤 손님을 찾아가고 있었다. 손님이라 부르는 것보다 불청객에 더 가까운 존재라 무시할까 싶었지만 일단은 얼굴을 봐야 할 듯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불청객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나 왔어.”
아트반 크리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잠겨 있었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저놈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고, 어쩌다 주량을 넘기는 날에는 온갖 추태를 부리곤 했다. 옆 사람에게 엉겨 붙는다든가, 기분 나쁘게 실실 웃고 말이 많아졌다. 끔찍한 일이었다.
이미 몇 잔 마셨는지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요한은 아트반의 술잔을 손으로 덮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게 했다.
“하필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온 이유가 뭐야?”
“보고 싶어서.”
더 들을 것도 없는 말에 요한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만 가.”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아트반은 동그란 얼음 한 조각을 술잔에 집어넣었다. 어느 정도 술에 잠겨 녹고 있던 얼음과 부딪치는 소리가 맑았다. 요한 앞에 술을 채운 새 잔을 놓아 준 아트반은 슬쩍 눈치를 살폈다.
여기까지 와 준 것을 보면 적어도 대화를 해 줄 용의가 있다는 뜻일 터였다. 그러니 리세트를 떼어 놓고 온 것이겠지. 물론 제집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럴 때일수록 어렵게 생각하면 안 된다. 간단하게 생각하자. 간단하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리세트가 아이를 무사히 낳은 걸 본 후에 요한에게 다시 정식으로 사과할 생각이었다. 저 대신 자원해 임무를 가는 것이니 마음이 조금이나마 말랑말랑해졌을 때를 노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영 찝찝하지 않은가.
그럴 경우는 없지만 만약,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불의의 사고에 의해 눈을 감는 날이 왔을 때 분명 후회로 남을 게 뻔한 일을 남겨 둔 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요한은 그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 중 한 명이니 말이다.
“요한. 내가 너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거든. 얼마 전에…….”
“미안하다는 소리, 지겹다고 했지.”
요한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는 아트반을 지그시 바라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답지 않게 무게를 잡는 걸 보아하니 또 그 소리를 하겠지. 미안하다고. 그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너무 잘 알아 문제였다.
리세트에게 모든 것을 다 전해 들었을 때, 처음만 하더라도 아트반을 향한 분노가 불어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흘이 채 가기도 전부터는 조금 다른 감정이 생겨났다.
아트반 크리프가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지, 종종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억지로 환한 미소를 보여 주던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랬어야만 했는지. 절대로 이해해 주고 싶지 않은데, 마음의 추는 용서로 기울어진 지 오래였다. 원망도 분노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짜증 나게도.
게다가 지금, 비에 젖은 개처럼 처량하게 눈치를 살피는 꼬락서니가 특히나 보고 싶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요한의 가장 진실한 마음이었다.
임무를 대신 가 주는 것으로 제 나름대로 마음의 짐을 덜어 내려는 얄팍한 수도 읽어 냈다. 사과하는 방식조차 너무나 아트반 크리프다웠다. 중요한 건 꼭 나중에 얘기하는 버릇은 여전한가 보지.
선뜻 임무에 나서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일일이 드러내기도 낯간지러웠다.
고맙다. 용서한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머릿속에 떠도는 말들 중 어느 것을 고를까 고민하던 요한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잘 다녀와.”
“화 풀렸어?”
요한은 술잔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하지 못한 대답을 전했다.
재빠르게 제 술잔을 들어 맞부딪치는 아트반 크리프의 얼굴에는 모처럼 보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그 미소가.
달그락달그락, 얼음이 녹는 소리가 웃음소리와 어우러졌다.
❖ ❖ ❖
아트반 크리프가 떠났다. 처참하게 해쓱한 몰골로, 술 냄새가 난다며 리세트와 포옹 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떠나갔다.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늦은 시간까지 상대해 준 보람이 있었다.
후작 가문의 마차가 길의 저편으로 멀어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리세트는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쥔 채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복도의 유리창에 찰싹 붙어, 달리는 마차의 꽁무니를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적잖게 허전한지 그날은 리세트가 창밖을 많이 내다보았다.
아트반 크리프가 떠난 바로 다음 날 그들도 영지로 내려가느라 리세트가 오래 슬퍼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금방 털어 내고 연구 자료에 집중하는 듯했다.
요한은 다시 창밖을 힐끔거리는 리세트를 관찰하고 있었다.
한 삼 분쯤이 최대인가. 회중시계를 살펴보던 요한은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집중력이 좋아 세 시간은 거뜬히 책만 보던 그 소녀는 이제 삼 분마다 주변의 풍경을 살폈다. 여행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건 전쟁 때를 제외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리세트가 마냥 아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풍경을 즐기고 좋아하는 편이 요한은 더욱 좋았다.
“내가 좀 봐도 돼?”
요한은 손끝으로 리세트가 보고 있는 공책을 가리켰다.
“이걸, 요한 네가?”
“조금 봐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그럴래?”
공책을 건넨 리세트는 바깥 풍경에 푹 빠져들어 갔다. 지역마다 기후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건물의 외형이나 자라는 식물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리세트는 꼼꼼히 살펴 차이점을 하나씩 찾아 나갔다.
“어때? 공책은 볼만해?”
“아직 잘 모르겠어.”
리세트가 종종 돌아볼 거라는 걸 알고 있던 요한은 적절히 공책을 넘겨 두었다. 시선은 한순간도 리세트를 놓치지 않았지만 손은 적당한 때를 가늠해 잘 움직였다.
선두에서 달리는 마차에는 호위할 인원들이, 그 바로 뒤의 마차에는 요한과 리세트가, 가장 맨 끝에는 노바르 로슈만과 카에덴 델피니움이 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인원을 나누는 게 가장 합당하고 어찌 보면 당연한데, 카에덴 델피니움은 자신이 리세트와 둘이 마차를 타고 가면 안 되겠느냐는 말로 이 여정의 첫걸음을 삐걱거리게 만들었다.
눈치는 있는지 노바르 로슈만이 즉각적으로 반박했고, 리세트는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한 얼굴로 요한의 손을 잡고 먼저 마차로 올라 일단락된 일이었다.
하여튼.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인지 통 모를 인간이었다.
요한은 리세트의 안색을 살피며 공책을 한 장 더 넘겼다.
전쟁 때는 급한 일이 생기면 짐마차를 이용해 적진을 돌파할 때도 있었는데, 리세트는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아주 가뿐하게 그 시간을 견뎠었다. 하지만 지금은 임신을 한 탓인지 종종 힘들어해 본래의 계획보다 마을에서 오랫동안 쉬어 갔다.
리세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생긋 웃음 짓지만, 그럴수록 요한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요한, 저기 봐!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이야. 그 숲이 보여.”
요한은 리세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숲으로 시선을 옮겼다. 추억을 회상하는 리세트의 목소리는 그저 밝기만 했다. 조금은 슬퍼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였지만 요한은 곧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리세트가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니까.
“여기 앉게?”
리세트는 말없이 다가와 제 옆에 앉는 요한에게 물었다. 고개는 여전히 창문에 고정된 상태였다.
“손잡고 싶어서.”
“조금 있다가 잡아. 지금은 안 잡을래.”
“아, 머리가 조금 아파.”
“뭐?”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리세트의 눈시울은 역시나 붉어져 있었다. 요한의 이마를 매만지는 손길은 다정스러웠다.
“쉬었다 가자고 할까?”
“아니.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 같아.”
리세트는 어서 기대라는 듯이 제 어깨를 톡톡 쳤다. 이제 리세트의 눈길은 카에덴 델피니움의 공책도, 창밖의 숲으로도 옮겨 가지 않았다. 초록빛 눈동자는 오직 요한만 담았다.
요한이 머리를 기대자 리세트는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만져 주었다. 요한은 눈을 감고 그 손길을 느꼈다. 잠은 조금도 오지 않았다. 다만, 복잡하게 여러 감정으로 헝클어지던 마음의 매듭이 다정한 손길에 차츰 느슨해졌다.
❖ ❖ ❖
영지로 가는 내내 한 번도 몬스터와 맞닥뜨리지 않았다. 들르는 마을마다 평화로웠고 길은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죽은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보고 나서야 리세트는 괴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 실감 났다.
델피니움의 영지도 평화로웠다. 오랜 전쟁을 거치는 중에도 이곳까지는 몬스터의 침입이 허락되지 않은 덕에 어느 영지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리세트는 요한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영지의 저택은 무척 컸다. 수도의 저택보다도 훨씬, 리세트가 보아 온 많은 건물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영지의 저택을 총괄하는 집사장이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보는 주인과 처음 만나는 안주인을 향해 그는 정중한 몸짓으로 고개 숙여 보였다.
간단하게 안부를 주고받는 화목한 시간을 깨트린 건 카에덴 델피니움이었다.
“어때, 요한? 불에 다 타 없어지기 전이랑 똑같지?”
누구도 선뜻 건드리지 못한 주제를 태연하게 꺼낸 남자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당황한 듯한 집사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리세트는 비스듬히 고개를 내렸다. 요한과 마주 잡고 있는 손에 좀 전보다도 더 힘이 실려 있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요한의 눈빛은 서늘해 보였다.
눈치 없이 끼어든 카에덴 델피니움이 또다시 입을 열기 전에 어서 마무리해야 할 듯싶었다. 리세트는 요한에게 팔짱을 끼며 집사장을 보았다. 어서 들어가자는 눈빛을 기민하게 읽어 낸 그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주인님. 이제 들어가 보셔야지요.”
저택으로 들어가던 리세트는 요한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약간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시선이 닿자 카에덴 델피니움이 화답하듯 손을 흔들었다.
정말, 눈치가 없으시구나.
악의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리세트는 기왕 이렇게 된 거 단단히 경고를 하기로 했다.
입 좀 다물어 주세요.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카에덴 델피니움은 입술을 꼭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