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공책
사육사의 일터는 광장에서 적잖게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공작저를 나서는 순간부터 사람들을 만나 일을 볼 때까지 요한의 신경은 광장에 쏠려 있었다. 그건 지금, 시간이 꽤 흐른 이 순간에도 변함없었다.
지금쯤이면 아트반 크리프를 만났겠지.
맞은편에 앉은 사육사의 말을 경청하던 요한은 문득 시선을 돌려 창밖 너머를 보았다. 광장에 빼곡히 늘어선 나무의 그림자는커녕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분수대의 물줄기조차 구경하지 못할 거리임에도 계속 눈길이 갔다.
떠들썩한 소리가 귓가를 스쳐 요한은 살며시 고개를 내렸다.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이들 특유의 가볍고 높은 웃음소리가 2층까지 번져 왔다.
저런.
가장 뒤처져 친구들의 뒤를 따라가던 아이의 다리가 엇갈렸다. 철퍼덕 바닥에 넘어진 아이는 눈물을 쏟아 낼 준비가 된 얼굴이었다. 조그만 입술이 크게 벌어지려는 순간 제일 앞서갔던 아이가 돌아와 넘어진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괜찮아? 다정스럽게도 묻는 아이의 머리카락이 하필 금색이었다.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그 색.
거짓말을 일삼는 그놈의 머리카락보다 색이 더 옅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본질은 같았다.
요한은 유심히 그 아이들을 살폈다. 넘어진 아이에게 어째서 유독 눈길이 가나 했더니. 그 아이는 또 하필 은발이었다. 요한이 가장 사랑하는 그 아름다운 색.
다른 생각에 이토록 몰입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고 웃기기도 해 요한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금세 배시시 미소 짓는 아이의 얼굴에서는 이제 눈물의 징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씩씩하게 일어나 바지를 털고, 친구의 손을 잡고 아이는 힘차게 뛰어갔다. 멈춰 서 있던 친구 무리는 달려오는 두 사람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길이 조용해지자 요한의 시선은 다시 사육사에게로 옮겨 갔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사육사의 목소리와 노랫말 같은 새의 지저귐이 뒤섞였다.
작은 응접실에는 새장 하나만 준비되어 있었다. 요한이 고른, 처음 본 순간 시선을 빼앗겼던 바로 그 새였다.
사육사는 그 새에 대한 설명과 높은 안목을 칭찬하는 일에 열성적으로 달려들었다. 깃털 모양을 다듬느라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굵게 말린 털에 탄력을 주기 위해 어떤 약을 썼는지 세세하게 늘어놓았다.
요한은 적절하게 고갯짓을 해 경청하고 있음을 알렸다.
이곳에 오기 전 건축가를 만나 일의 진행 상황을 보고받았다. 값비싼 자재를 마음껏 사용할 생각에 들뜬 그의 반응도 지금 사육사가 보이는 열띤 반응만큼이나 뜨거웠다. 정원사도 마찬가지. 진귀한 품종을 구해 와 그것들을 돌보느라 행복하게 밤잠을 설친다고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아름다운 노래를 선사하는 새. 싱그럽고 탐스러운 장미. 이제 그것들을 한데 모아 둘 장소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에게 따듯한 차를 더 따라 준 사육사는 새장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새하얀 깃털을 가진 새는 요한을 보며 노래했다. 아름다운 소리였다.
석양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새의 노래가 끝이 났다.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몰입해 있던 요한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육사는 한번 새를 만져 볼 것을 권유했지만 그리 내키지는 않는 일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거절을 한 일이기도 했다. 요한은 옅은 미소로 거절의 뜻을 보인 뒤 그만 몸을 돌렸다.
품에 넣어 둔 회중시계를 살펴보니 어느덧 다섯 시. 리세트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 ❖ ❖
아내를 데리러 가는 길에 오래전 아내를 사랑했던 놈을 우연히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희박하지 않나.
분수대 근처 카페에 들러 리세트가 이미 떠났다는 걸 알게 된 요한의 기분은 썩 좋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처럼 곤두박질치듯이 저조한 것도 아니었다.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만들어 내는 소리가 시원했다. 이 황당한 마음을 잠시 잊을 만큼이나.
시선을 먼저 피한 쪽은 노바르 로슈만이었다.
피차 껄끄러운 사이이니 이대로 모른 척 떠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노바르 로슈만은 땅에 박을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로 요한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짓인지.
그대로 지나쳐 가라는 뜻으로 요한은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움찔 어깨를 떤 노바르 로슈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옆에 당도해 멈추었다.
약초 상점에 들렀는지 노바르 로슈만은 고약한 냄새가 풍겨 오는 약초, 리세트가 매일같이 씹어 대는 릴프랑을 켜켜이 묶어 둔 꾸러미가 가득 담긴 종이봉투를 안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하고 사라져.”
자신이 먼저 돌아서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요한은 굳이 말을 꺼냈다.
노바르 로슈만은 판에 박힌 인사말로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날씨가 선선해졌네요. 영양가 없는 대화에 할애할 시간은 없었다. 그만 걸음을 옮기려던 요한의 마음을 붙잡은 건 최근에 질리도록 듣기 시작한 사과의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미안해. 그 말을 전하던 아트반 크리프의 얼굴이 저놈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어 그런 건가.
그에게 잘못을 고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원인이 사랑하는 아내, 리세트 델피니움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요한의 신경을 긁었다. 아트반 크리프의 경우에는 짜증스러웠고, 저놈에게는 불쾌한 감정이 치솟았다. 노바르 로슈만이 리세트를 도왔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어 더욱 그러했다.
억지로 고개를 한 번 까딱이자 오히려 노바르 로슈만이 화들짝 놀라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어……. 받아 주시는 겁니까?”
깊지 못한 인내심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요한은 더는 반응하고 싶지 않아 그만 몸을 돌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뒤에다 대고 소리치는 놈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요한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 ❖
리세트는 카에덴 델피니움의 연구 자료를 마치 보물처럼 다뤘다. 물방울이 튀어 잉크가 번질까 봐 조심조심, 어찌나 신중하게 읽는지 모른다. 저만큼만 제 몸을 돌보면 얼마나 좋을까.
요한은 의자에 앉자마자 연구 자료부터 찾아 드는 리세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카락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리세트의 정신은 이미 연구 자료에 빨려 들어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 주자 리세트는 고개를 살며시 들어 생긋 미소 짓고는 다시 자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여튼 무엇이든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보고 말지.
나직한 한숨 소리 사이로 리세트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조건이 뭐야?”
어느덧 물기가 마른 리세트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리세트는 거울에 비치는 요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같은 온도로 씻고 나왔는데 리세트의 뺨은 붉은 반면 요한의 얼굴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얼마 안 가 요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영지로 가는 대신 나한테 조건이 있다고 했잖아.”
혹시 까먹었을까 싶어 리세트는 구체적인 설명을 붙여 주었다.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친 요한이 피식거리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별거 없어.”
많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얘기하니까 더 무서워. 빨리 말해. 궁금해.”
어서 말하라는 듯이 리세트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리세트의 뒤편에 서 있던 요한은 움직임이 둔해지기를 기다리다 적당한 때를 포착해 덥석 양 뺨을 감싸 원위치에 고정시켰다. 얼굴을 잡힌 채로 리세트가 콧잔등을 씰룩였다.
“가만히 좀 있어 봐.”
“뭐 이렇게 비밀이 많아?”
“너만 할까.”
할 말이 없어진 리세트는 자세를 반듯하게 고치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이 터뜨린 웃음소리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적을 몰아냈다. 혼자 괜히 찔려 입술을 다물었던 리세트의 웃음소리도 곧 뒤를 따랐다.
이만 빗을 내려놓은 요한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리세트를 안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 주자 리세트가 입고 있는 잠옷에 달린 프릴이 파르르 흔들렸다. 프릴이 잠옷에 달린 건지, 잠옷이 프릴에 달린 건지 도통 알기 힘들 정도로 프릴투성이였다.
여전히 연구 자료에만 시선을 주고 있는 리세트는 재빨리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요한은 침대에 걸터앉아 리세트의 목 부근에 묶인 커다란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리본의 매듭이 느슨해지자 그 사이로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한 번만 내게도 시선을 달라며 조르고 있는 꼴이 우스운데,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손길을 거두지 않고 기다렸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손이 조그맣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파고 들어가 여린 점막을 훑자 리세트가 비로소 시선을 맞춰 주었다.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요한의 손은 붉어진 뺨을 톡 건드리고 미련 없이 떠나갔다.
“최우선 순위는 너야. 아기가 아니라.”
요한은 다시 리본의 매듭을 단단히 묶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주저 없이 말할 것. 연구 진행 중 어떠한 비밀도 만들지 말 것. 먹고, 자고, 입고, 그 모든 과정은 요한의 손을 통할 것. 조건은 그게 전부였다.
방금까지도 연구 자료에만 정신을 쏟던 리세트는 황급히 시선을 틀었다. 가운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몸을 애써 외면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가까웠지?
이 상황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기분이 들다니.
리세트는 손등으로 거칠게 입술을 문질렀다. 연구 내용이 담긴 공책을 쥐고 있는 손이 움찔거렸다. 간지러운 목 아랫부분을 아프지 않게 긁으며 리세트는 제 옆에 공책을 내려놓았다. 살며시 요한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려고 했을 때였다.
“그거면 충분해.”
설명을 마친 요한의 얼굴은 홀가분해 보였다. 리세트는 자신만 집중하지 못하는 듯해 부끄러워졌다가, 이런 기분이 들게 만든 요한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했다.
입술을 왜 그런 식으로 만져? 그러더니 지금은 또 어쩜 저리 무관심해 보이지?
간지러워 미칠 것 같은 손으로 애꿎은 포도를 톡톡 뜯어 입 속에 넣으며 리세트는 다시 자료에 집중했다. 밤이 깊어지는 것도 모르고, 요한이 빤히 쳐다보는 것도 모르는 채로.
요한은 벽면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슬슬 리세트의 눈이 감길 시간이었다. 시선은 초침을 따라가면서 하나둘, 초를 셌다. 정확히 요한이 예상한 그 시간에 초침이 걸렸을 때부터 리세트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한은 자꾸만 숙여지는 고개를 한 손에 받쳐 들었다. 잠이 든 얼굴이 순했다. 조심스럽게 공책을 빼내자 리세트가 눈매를 찡그렸지만 그조차도 얼마 안 가 잠잠해졌다.
요한은 보기 싫은 그 공책을 바닥에 툭 던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