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당부의 말
설명이 이어질수록 지하실을 밝히는 얼마 없는 마력의 불꽃이 흔들렸다. 정신이 사나울 정도였다. 보다 못한 카에덴 델피니움은 자신의 마력을 그 위에 덧씌웠다.
사위가 한층 더 밝아지자 파란 그림자에 반쯤 가려져 있던 요한의 얼굴이 드러났다. 마치 꼭 세상을 떠난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아내가 곁에 없어 감정이 죽어 버린 건가.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요한의 얼굴은 죽은 자의 것처럼 창백해 보였다.
“실패하게 되었을 때, 리세트 델피니움의 몸속의 마력이 뒤틀려 길을 잃는다면 호수로 갈 거야.”
사실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아예 없다 보아도 무방하지만 요한의 유난스러운 행동에 제약을 걸 목적으로, 어디까지나 만약이라는 가정하에서 경고했다.
요한의 눈썹이 구겨지는 것을 본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불의 기운을 누를 수 있는 건 물밖에 없으니까.”
“호수에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마법진과 함께 리세트 델피니움을 호수에 빠트릴 거야. 이 마법진은 물이 많은 곳일수록 위력이 세지거든.”
“누구를, 빠트려?”
“리세트 델피니움을, 호수에. 걱정하지 마. 숨은 쉬게 해 줄 거야. 죽으면 안 되니까.”
기가 찬다는 듯 피식거리는 요한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성공시켜.”
카에덴 델피니움은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 주고자 혀를 세게 찼다. 엎드려 사정하며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다니.
“네가 방해하면 내가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어. 그러니 얌전히 시키는 것만 해. 과보호 좀 하지 말라는 소리야.”
제발 좀 알아들었으면 작작 하라는 뜻으로 한껏 힘을 실어 말했다.
선심 쓰듯 고개를 한 번 까딱인 요한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주인이 사라진 탓에 길을 잃은 마력은 공간을 배회하다 서서히 사그라졌다. 길어진 그림자가 바닥에 넓게 그려졌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닥을 살핀 뒤 지하실을 나섰다.
불빛이 사라진 지하는 다시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떠날 준비는 수월하게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특별히 리세트가 거들고 나설 일은 없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아프면 반드시 얘기하고. 요한이 당부한 건 그것이 전부였다.
어젯밤에는 마력을 받아들이다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어떤 날은 두려울 정도로 수월하고, 또 다른 날에는 몸이 조각나는 것처럼 아팠다. 차라리 어느 정도 아픈 편이 마음은 놓였다.
요한은 볼일이 있어 외출을 했다. 많이 바쁜지 요즘은 통 손에서 서류를 떼어 놓지 못했다.
리세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요한의 모습을 면밀히 되짚어 봤다. 일에 집중을 쏟는 듯하다가도 요한은 시선을 들어 리세트와 눈을 맞추곤 했다. 짧은 눈 맞춤이 지나가면 요한은 사르르 미소 지어 보인 후 다시 서류를 보았다.
늘 그런 얼굴이었다. 웃는 얼굴.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씻을 때도, 음식 먹을 때도 항상 그 얼굴. 유일하게 미소가 무너질 때는 리세트의 몸으로 마력을 흘려 보낼 때뿐이었다.
‘미안해.’
부드럽게 쥐고만 있던 손목에 입을 맞추며 요한이 말했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입술과 뺨, 이마보다도 손목에 입을 맞추는 빈도가 더 늘어났다.
리세트의 손목에는 더 이상 제어구가 채워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길고 긴 꿈을 꾼 것처럼 사라졌다. 요한의 눈길과 손길이 손목을 스치지만 않는다면 정말 그렇게 여길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넓은 침실에 혼자 남아 있던 리세트는 허전한 손목을 몇 번이나 쓸어 본 후에야 침대를 벗어났다. 오늘은 아트반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광장에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서둘러 준비를 해야 했다.
종을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문이 열렸다.
“이 옷은 어떠세요? 오랜만의 나들이니까 화사하게 입으실래요?”
드레스 룸으로 따라 들어온 메이는 무척 신이 난 목소리로 재잘댔다. 옷을 여러 벌 가져와 거울 앞에 선 리세트에게 대보는 메이의 손길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리세트는 레이스의 바다 같은 옷을 슬금슬금 옆으로 치웠다. 치맛자락이 가볍고 적당히 풍성한 시폰 원피스를 골랐다.
다시 리세트 곁으로 돌아오게 된 날, 메이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요한을 향한 원망도 함께였다. 그동안 마님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 경고했다고, 주방이나 정원을 돌보라고 해 2층에는 발도 못 디뎌 봤다고. 억울한 목소리로 울고불고하며 고자질했다.
“어서 앉으세요.”
옷을 갈아입은 리세트는 메이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 앉았다.
메이는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빗은 후 하나로 땋아 느슨하게 말아 올렸다. 능숙한 손놀림에 리세트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점점 더 손이 빨라지는 것 같아.”
“요 며칠 할 일이 너무 없어서 하녀들 머리로 연습 좀 더 했어요. 공작님 덕분에요.”
쏘아붙이는 목소리였지만 그 기운이 전처럼 사납지는 않았다. 메이는 탄식 같은 한숨을 목구멍 뒤로 쑥 밀어 넣었다.
공작은 메이에게 이번 여정에 동행하도록 지시를 내리며 몇 가지 당부를 전했다. 리세트가 떠나야만 했던 이유를, 지금의 사태에 어떤 일이 연관되어 있는지 세세하게 알려 주기도 했다.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기 힘들어하는 리세트를 위한 배려라는 걸 알게 되자 전처럼 미워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두 사람을 떼어 놓은 일이라던가, 리세트를 침실에 가두어 둔 것은 용서가 되지 않지만.
메이는 사파이어가 자잘하게 박힌 핀을 하나씩 머리 타래에 꽂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리세트는 문득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이제 이틀 후면 영지로 떠난다. 요한과 메이, 카에덴 델피니움과 노바르도 함께. 정말 말도 안 되는 조합인데, 어떻게 모이기는 했다.
노바르의 동행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릴프랑 약초는 제가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노바르는 얘기를 하는 도중에도 리세트 옆에 앉아 있는 요한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폈다. 그 모습에서 둘 사이에 무언가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리세트는 섣불리 묻지 않았다. 두 사람 다 그걸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요한과 노바르는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다. 목적이 분명한 여정이니 그들이 불필요한 감정 소모전을 벌이지는 않을 것 같지만 문제는 카에덴 델피니움이다.
그 사람만 끼면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연구를 할 때를 제외하고 입을 막는 게 좋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외출 준비가 끝나 있었다. 리세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부드러운 치맛자락이 다리를 감쌌다.
❖ ❖ ❖
광장에는 어린아이들이 많이 나와 있어 떠들썩했다. 여름은 지나갔지만 아직도 분수대는 가동되고 있었다.
소란을 피해 리세트와 아트반은 분수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카페로 들어왔다.
“리세트, 포도주스 맞지?”
“응.”
점원을 불러 주문을 한 아트반은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리세트를 보았다.
“임신하면 원래 다 그래? 하나에 꽂히니까 그것만 먹네.”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나는 유독 포도가 먹고 싶더라.”
“포도만 먹고 싶은 건 아니고?”
“그건 아니야. 쿠키도 먹고 싶고 케이크도 먹고 싶어.”
“둘 다 포도가 들어가잖아.”
“음……. 맞아.”
동시에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점원은 두 잔의 포도주스를 각각 자리에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갔다. 리세트는 시원하고 달콤한 주스를 반쯤 비워 낸 후에야 입술을 열었다.
“나 잠깐 수도를 떠나 있기로 했어.”
“여행이라도 가게? 그 몸으로?”
“복잡한 사정이 있어.”
리세트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아트반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경청했다.
“괜찮겠어?”
리세트가 영지로 가기로 한 이유와 함께 가게 될 인원들의 이름을 하나씩 나열하기 시작했을 때 아트반이 불쑥 말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노바르가 어쩐지 미덥지 않다는 이유를 들먹이며 방어 계열 마법사 중 한 사람을 더 데려가는 것도 고려했었는데, 그 대상이 아트반이었다는 것까지 알려 주었다.
아트반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진저리 쳤다.
“차라리 임무를 가기로 한 게 더 나았네. 거기 끼어 있다가는 분위기에 질식해 죽었을 것 같아.”
동의하지 못하는 바는 아닌지라 리세트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다녀와, 아트반. 위험한 일에는 나서지 말고.”
바로 내일 임무를 떠나야 하는 아트반이 걱정되어 리세트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알겠다고, 언제나 대답은 참 잘하는 아트반은 오늘도 웃으며 그 말을 건넸다.
“아무리 위험해도 델피니움 영지로 가는 것보다는 덜 위험할 것 같다. 거기가 제일 위험해. 몬스터랑 밤낮없이 싸우는 게 낫지, 요한은……. 아,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몬스터와 요한을 동일 선상에 놓는 게 조금 불쾌했지만 리세트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문득 그런 자신의 속마음이 멋쩍어 뺨을 긁적이자 아트반이 키득거리며 주스를 마셨다.
“빨리 마무리 짓고 영지로 갈게.”
“수도에서 만나면 되잖아.”
“그러면 갓 태어난 아기를 볼 수가 없잖아.”
엄중하기까지 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하던 아트반은 문득 든 궁금증을 내보였다.
“리세트 너는, 아기가 누구를 닮았으면 좋겠어?”
“당연히 요한이지. 그래야 더 미안해할 것 아니야.”
“역시 너는 아직 네 남편을 잘 몰라.”
리세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머리에 꽂아 둔 핀에 맺혀 있던 빛이 반짝거렸다.
“평생 달고 사는 자기 얼굴이 좋겠어? 사랑하는 아내를 닮아야 미안함이 곱절로 늘어나지.”
아. 감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놀라워하는 것 같기도 한 리세트의 탄식을 들으며 아트반은 낮게 킬킬거렸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건강하게만 낳아. 곧 다시 보자. 엄마도 아가도 건강하게 잘 있어.”
“너도……. 꼭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
목이 꽉 막혀 오는 듯해 리세트는 급히 주스 잔을 들었다. 아트반은 걱정 말라는 듯 어깨를 한껏 펴 보았다.
“나 몰라? 필기시험만 낙제생이지 실기 점수는 나 따라올 사람이 없었어.”
너무 잘 알아서 걱정이었다. 아트반은 위험에 처한 동료들을 가만히 두지 못하니까. 어떻게든 구하려고 몸을 던지는 사람이니까. 혹시라도 나쁜 기운이 깃들까 싶어 리세트는 여러 말을 대신해 하나의 당부만 남겼다.
“다쳐 오기만 해. 아기 얼굴 안 보여 줄 거야.”
“꼭 다치지 말아야겠네.”
아트반이 터뜨린 웃음소리가 무척 유쾌했다. 나무랄 것 없는 화창한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