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사랑은 어렵다
요한이 웬만한 문은 다 부수어 놓고 간 저택은 그 근방의 명물이 되었다. 아주 작은 소음도 거슬려 미치겠는 그로서는 최악인 셈이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귀를 틀어막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종이를 작게 잘라 뭉쳐 귓구멍에 꽂았다. 그 일련의 과정을 모두 곁에서 지켜본 노바르는 고개를 저으며 맡은 일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카에덴 델피니움의 개인 연구실은 그와 노바르가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대체로 누워서 일을 보는 그와 달리 노바르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이제부터 도와줄 게 있다고 말하더니, 그는 살뜰히 노바르를 종처럼 부렸다.
그가 찾는 책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노바르는 책장 앞을 돌아다녔다. 다섯 권의 책을 찾아 순서대로 분류하고 얇은 끈으로 묶어 짐 가방에 넣었다. 오늘의 일감이 다 끝난 것이다.
자유의 몸이 된 노바르는 연구실 한편에 마련해 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물을 받아 둔 거대한 냄비는 쌓아 놓은 장작 위에 제대로 자리 잡고 있었다. 기우뚱거리는 걸 막기 위해 천장에 못까지 박아 밧줄을 매달고, 그걸 냄비의 손잡이에 동여맸다.
“불 좀 붙여 주세요.”
노바르가 뒤를 돌아 말하자 카에덴 델피니움은 손가락을 튕겨 파란 불꽃을 장작에 던져 넣어 주었다.
노바르는 깨끗하게 씻어 온 릴프랑 약초를 펄펄 끓는 물속에 집어넣었다. 삽시간에 코를 후벼 파는 듯한 끔찍한 냄새가 공간을 채웠다.
“시끄러운 소리도 짜증 나지만 이 냄새는 정말 못 참겠다. 언제까지 할 거야?”
신경이 곤두선 듯한 목소리는 이제 일상이 되어 노바르에게 익숙해져 버렸다. 그러니까, 별로 타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 쓸데없는 짓, 언제까지 할 거냐고.”
대답하지 않는 노바르의 뒷등으로 종이 뭉치가 날아와 부딪쳤다. 노바르는 땅에 떨어진 걸 주워 장작에 던져 넣었다. 그의 등을 후려친 종이 뭉치는 땔감이 되어 요긴하게 생을 마감했다.
“야.”
“네. 왜요?”
“릴프랑 약초는 이 일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니까?”
“그건 순전히 연구원님의 견해 아닙니까?”
노바르는 보란 듯이 약초를 한 움큼 더 집어넣었다.
“델피니움 부인께서는 도움이 된다고 하셨어요.”
“얼굴도 못 본 지 꽤 오래되지 않았어? 그사이에 바뀌었을 수도 있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겠습니다.”
저 녀석도 고집불통.
카에덴 델피니움이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을 무렵 누군가 찾아왔다.
“주인님께서 찾으십니다.”
요한의 수행인이었다.
❖ ❖ ❖
세 명의 델피니움이 한자리에 모였다. 리세트와 요한, 카에덴. 이 말도 안 되는 조합을 바라보는 로드니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더 이상 깊어질 수가 없을 정도로 움푹 패어 있었다.
사용인들이 전부 물러가고 나자 침묵이 깨졌다.
“연구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해 봐.”
예의는 내다 버린 조카의 말에 카에덴 델피니움은 찡그린 눈으로 맞은편을 보았다. 나란히 앉은 요한과 리세트. 아내 곁에 꼭 붙어 있는 녀석의 얼굴은 평상시와 달리 그리 사납지는 않았다. 아내 앞에서는 가면이라도 쓰고 사는 건가.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 그는 그만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아기가 배 속에 있을 때 마법진을 파훼해야 돼. 리세트 델피니움은 처음부터 가문의 마법진을 가지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맞아?”
“마력을 공급해 줘야 해서 얼마 전에 만든 거야.”
“하긴. 안 그랬으면 자기 마력을 고스란히 헌납하다 죽었을 테니.”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카에덴 델피니움은 자신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게 혀를 찼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요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 있었다.
“어쨌든 살아 있는 게 좋은 거지. 그리고…….”
“연구원님.”
그의 말이 더 길어지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아 리세트가 먼저 말을 끊어 냈다.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뜻을 눈길에 담자 그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마력을 공급해야 하는 일만 없어지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잖아.”
설명을 시작한 카에덴 델피니움의 눈길은 대체로 리세트에게 가 있었다. 얼굴을 찌푸리고만 있는, 언제고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놈보다는 경청하는 태도로 임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기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마법진을 파훼하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마법을 전개한 마법사를 죽이거나, 혹은 그 스스로 마법진에 묶어 둔 마력을 거두어 가게 하면 된다. 하지만 이 비전 마법은 어떤 것과도 궤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마법진을 파훼할 새 마법진이라고, 성질이 정반대인 마법진을 만들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다행히 거기까지는 잘 이해하는 듯하던 요한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진 건 설명의 마지막 부분쯤이었다.
“잘된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전적으로 리세트 델피니움 혼자 해야 하는 일이야.”
“그런 거라면 너나 노바르 로슈만이 동행할 필요가 있나?”
“우리가 해야 하는 일도 있으니까 따라가는 거지.”
리세트가 델피니움가의 마력을 누르느라 생겨난 여분의 마력, 즉 갈무리하지 못해 몸에서 빠져나오는 마력이 주변에 피해를 끼치지 않게 막는 건 노바르 로슈만의 일.
비전 마법을 파훼할 마법진의 형상을 유지하고 리세트의 마력 흐름을 살피는 역할은 그가 맡게 된다. 설명을 마무리한 카에덴 델피니움은 목이 마르는 듯해 물을 마셨다.
“결론은 네가 할 일은 없다는 거지.”
콕 집어 요한을 가리키며 그는 입술을 축였다. 처음부터 미세하게 구겨져 있던 요한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방해만 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
그 말이 결정타가 되었는지 이제는 요한뿐만 아니라 분위기를 살피던 리세트의 얼굴도 눈에 띄게 굳어졌다.
자리를 지키라는 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
한시도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녀석이 그의 연구를 방해할까 봐 가능한 한 멀리 떨어트려 놓고 싶어도 아량을 베풀어 주는 것인데.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리세트 델피니움이 팔걸이에 걸쳐져 있는 요한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요한은 자연스럽게 그녀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무어라 속닥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요한의 눈매가 부드러워지는 걸 보자 그리 알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입 모양으로 대강 파악이 되었다.
네가 옆에 있어야 마음이 놓여. 계속 같이 있자.
겨우 저 말에 녹아내릴 것처럼 구는 녀석이 요한 델피니움이라니. 정말이지, 죽어 버린 반 델피니움이 살아 돌아오면 너무 놀라 다시 무덤 속으로 기어들어 갈 광경이었다.
❖ ❖ ❖
리세트 델피니움을 몰래 데리고 나오는 짓까지 감행한 것치고 요한과의 대화는 원만하게 마무리되었다. 연구 내용을 공유하고 떠날 날을 조율하기까지 채 한 시간도 소요되지 않았다.
이거야 원. 허탈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픽 나왔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무감한 얼굴로 비전 마법서를 읽어 내려갔다. 물론 그는 지금 혼자였다. 따로 요한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리세트 델피니움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 하였더니, 요한은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 일어섰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싶었는데, 데려다주고 올 테니 기다리고 했다.
아무리 넓다지만 집에서 길이라도 잃을까 염려하는 것인가?
이유가 무엇이든 굳이 이해하고 싶지 않은 해괴한 짓거리였다. 문득 길거리에 떨어져 있던 소설책에 적힌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랑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새 파고들어 도무지 자신 같지 않은 행동을 하게 만든다고 하였지.
어떤 어려운 문제도 척척 해결해 내는 비상한 머리로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구절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하필 그게 요한을 통해서라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지만.
비전 마법서는 생각보다 더 시시했다. 그 안에 담긴 모든 게 그의 예상에 딱 들어맞았다. 다만, 조금 더 구체적인 방법을 세세하게 알게 된 것뿐. 흥미를 잃어 책을 한 손에 쥐고 허공에 던졌다가 받으며 놀고 있을 때 요한이 돌아왔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말없이 고개만 까딱이는 요한의 뒤를 따라갔다. 2층.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머니의 침실이었던 공간을 조금 지나 요한이 문을 열었다. 서재로 쓰이는 공간인 듯 보였다.
그가 보여 달라고 한 곳은 지하실이지 이런 서재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사용하지 않았던 곳이 아니었나? 지하실로 데려다줘.”
대꾸해 줄 마음이 없는지 요한은 터벅터벅 걸어가 책장 옆 벽면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감추어져 있던 문이 나타났고 요한은 지체 없이 그 문을 열고 내려갔다. 그는 입을 닫고 순순히 따라갔다.
지하실로 가는 통로가 이곳에 있을 줄이야.
오늘 목격한 것 중 두 번째로 놀라웠다. 첫 번째는 단연코 리세트 델피니움과 함께 있는 요한이고.
카에덴 델피니움은 지하실 바닥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을 눈에 담았다. 그의 몸 안에도 있던 그 마법진과 똑같아 외우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덕분에 이번 연구에 쓰일 마법진을 손볼 일도 없게 되었다.
이곳에서 어머니가 죽어 가고 있었겠구나.
딱 그 정도의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델피니움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마력을 더 잘 다루는 형제를 위해 조금 부족한 사람이 대신 죽어 주자고, 욕망에 찬 눈으로 말한 여자.
슬픔이나 동정 같은 것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저 타인처럼, 무의미한 이름 중 하나로 여겨질 뿐이었다.
문에 기대선 채로 요한은 마법진 주변을 돌아다니는 카에덴 델피니움을 살폈다.
“제일 중요한 건 리세트의 안전이야. 잊지 마.”
“알아. 지겨우니까 그 부분은 더 이상 말 얹지 않아도 돼.”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실패했을 때의 반동은 없어. 말 그대로 그냥 실패일 뿐이야.”
마법이라는 게 대체로 그러하다. 실패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 마법식은 그저 폐기 처분이 될 뿐, 마법진으로 사용되지 못할 수식의 운명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요한이 묻는 이유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내가 어떻게 될까 저토록 걱정하다니.
카에덴 델피니움은 문득 불안해졌다. 이러다 연구를 하는 내내 요한이 훼방을 놓지 않을까 하는, 제발 기우이길 바라는 불안감이 솟구쳤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그는 경고를 남기기로 했다.
“내 말 잘 들어, 요한 델피니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