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02)화 (102/151)

102화
너를 위해서

주방에는 모처럼 음식다운 음식 냄새가 피어올랐다.

주방의 사용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일이었지만 그것을 즐기는 사람은 없었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며 부지런히 움직일 뿐이었다.

넓은 식탁은 근래에 보기 드물게 제대로 된 음식으로 채워졌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끔 공작 부부가 식사를 했지만 오늘과 같은 모습을 갖추지는 못했다.

마님의 자리에는 쿠키와 케이크, 포도와 각종 과일에 주스까지 준비되었고, 공작의 자리에는 샐러드와 가벼운 음식 몇 가지. 그나마도 냄새가 적은 음식을 위주로 차려졌다. 마님께서 침실에 갇혀 지내신 뒤에는 그마저도 없는 일이 되었지만.

주방장과 하녀들은 음식을 내온 뒤 조용히 물러갔다.

넓은 식당에 요한은 혼자 남아 있었다.

얼마간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던 요한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물을 마셔 목을 축였다. 입을 열고 음식을 넣고 씹어 삼키는 건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고난은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포크를 내려놓은 요한의 시선이 맞은편으로 향했다.

쿠키를 오도독 씹어 먹다 그와 눈이 마주친 리세트가 웃는다. 어서 먹으라고, 자신은 이게 제일 맛있다며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한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겠느냐 물으면 조금 뾰로통해진 얼굴로 톡 쏘아붙인다. 지금은 쿠키 말고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며.

사랑스러운 환영으로 되살아난 기억은 곧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 그는 혼자였다. 리세트는 없다. 그 혼자 이 넓은 식당, 감옥 같은 저택에 묶여 있었다.

아, 리세트는 지금 침실에 있지.

그걸 상기하자 다시 손이 움직였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런데 눈을 떠 아침 햇살을 바라본 순간, 그 찬란한 빛이 스며든 작고 하얀 얼굴을 본 그때 요한은 문득 참을 수 없이 갈증이 일어 침실을 나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씻고 옷을 갖추어 입고 식당에 내려와 있었다.

음식을 내오라고 했다. 그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주방장에게 달리 할 말이 없어 그리 명했다. 2층 복도를 서성거리다 음식 냄새가 번져 오는 걸 느끼고 다시 식당으로 왔다.

무의식적으로 음식을 씹고 입 안이 비면 곧바로 채워 넣었다. 계속 무언가를 먹고 있는데 맛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허기가 졌다.

불쑥 카에덴 델피니움의 말이 떠올라 요한의 움직임이 멎었다.

영지로 가야 한다고 했지.

그곳을 잊고 산 지도 꽤 오래되었다. 아니. 하루도 잊어 본 적 없지만 굳이 의식하고 싶지 않아 머릿속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지.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저택이 복구되었다는 걸 보고받아 알고는 있었지만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것도 벌써 몇 해 전의 일이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은 간단했다. 너무나도 간단했다. 리세트를 이대로, 공작저에 묶은 채 곁에 두면 된다. 영지로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을 위한 일이라는 걸 요한은 알고 있었다.

리세트가 원하는 길은 영지로 가 아이를 살릴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가 끝까지 막으면 리세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하나도. 그가 만들려는, 꽃이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유리온실처럼 리세트는 계속 그의 곁에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런 날이 와도 네가 그처럼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을까. 아기를 빼앗아 가도 지금처럼 나를 향해 웃어 줄까.

무의미한 망상을 구체적으로 그려 보았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모습이 될 테지. 너무나 당연하게도 결론에 도달했다.

시들지 않는 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리온실 안의 꽃들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 테고, 리세트의 눈을 속이기 위해 새로운 꽃을 심어 둘 뿐. 자연의 섭리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끝내 아기를 죽이면 리세트의 미소도 시들겠지.

온실.

리세트가 웃지 않는다면 필요 없는 곳이었다.

맑게 지저귀는 새.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리세트가 과연 그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여 줄까? 날아다니는 새를 보며 조용히 따라가 둥지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어 줄까?

아름다운 유리온실도, 작고 예쁜 새도 전부 쓸모를 다할 수가 없다. 리세트의 상처를 보듬을 수 없다면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것들일 뿐이었다.

가장 소중했던 것을 제 손으로 모조리 잃어버린 그곳으로, 모든 걸 다 바쳐 사랑하는 여자를 보내 주어야 한다.

요한은 잔떨림이 묻어나는 손으로 물잔을 쥐었다. 표면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기다란 손가락을 타고 식탁 위로 툭, 방울져 떨어졌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리세트는 혼자였다. 눈이 또렷하게 초점을 잡을 무렵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카에덴 델피니움의 말에 따르면, 요한에게 가문의 영지란 기억 속에 묻어 두고 싶은 과거의 한 부분이라고 했다. 그 끔찍한 사고와 연관이 되어 있겠지. 상처를 주지 않고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기 시작했을 때 불쑥 요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기를 죽이겠다고, 그 마음은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던 그 말이.

“아빠가 말은 굉장히 밉게 해도 얼굴은 예쁘지?”

행여 나쁜 기억을 아기에게 보여 줄까 싶어 리세트는 얼른 말을 돌렸다. 돌이켜 보니 오늘은 아기에게 아침 인사를 하지 못했으니까, 인사와 함께 아빠에 관한 좋은 말들을 들려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기에게 건네는 아침 인사가 아빠의 얼굴에 관한 것이라니.

황당하기는 하지만 아빠에 관한 좋은 기억을 조금이라도 아이에게 주고 싶어 리세트는 실없는 말을 계속해 주었다. 목소리가 낮고 부드럽다는 것이나 키가 크고 품이 넓다는 것, 사실은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것도.

“싸울 때도 정말 멋있어. 네가 아마 아빠가 몬스터를 어떻게 죽이는지 봤다면 엄청 놀랐을…….”

말끝을 흐린 리세트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반동에 시트 위에 흩어져 있는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니지. 네가 그런 걸 보게 해서는 안 되지.”

아기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 같은 말은 제외하느라 최대한 말을 고르고 또다시 고르기를 한참, 리세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빠가 하는 아픈 말들을 네가 듣지 않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 끝맺기가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리세트는 알고 있었다. 요한 델피니움, 지금 가장 혼란스럽고 두려울 그라는 것을.

❖ ❖ ❖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요한의 앞에는 포도잼 쿠키가, 리세트 앞에는 맑은 수프와 간단한 요깃거리가 차려졌다.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인지 리세트는 평소처럼 코를 막지 않고 음식을 잘 먹었다. 요한은 제법 속도가 붙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너는 안 먹어?”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던 요한은 그 말을 제때 알아듣지 못했다.

“잘 먹어야 건강해지는데.”

염려하는 듯이 바라보는 눈동자 가득 자신의 모습이 비쳤을 때야 비로소 요한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골고루 잘 먹어야 키가 쑥쑥 자라는데.”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리세트는 조각난 고깃덩어리 하나를 포크로 푹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요한은 듣지 못한 척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렸을 때는 리세트가 편식이 심한 줄로만 알고 종종 그런 말을 했었다. 매번 뻑뻑한 빵과 녹색 잎채소 몇 가지만 골라 먹는 리세트가 걱정되어 그랬다.

나중에야 알았다. 같이 식사를 한 지 열흘쯤 되었을 때. 그날도 빵만 먹는 리세트가 너무 신경이 쓰여 핀잔하듯 말했다. 왜 계속 그 맛없는 것만 먹느냐고.

당황해 우물쭈물 손사래를 치던 리세트가 조그맣게 입술을 열었다.

‘다른 건 먹어 본 적이 없어서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 먹었는데 맛이 없으면 뱉지도 못하잖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당황하기보다 미안함이 앞섰다. 리세트의 식사 시간을 병적으로 챙기게 된 것은 그날부터였다.

“키가 불만스러워?”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고 싶어 툭 던진 말에 리세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키 얘기를 하길래.”

“하나도 불편하지 않아! 나 정도면 작지는 않은 편이야. 평균이야.”

요한은 단단히 오해한 듯한 리세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리세트 너 말고, 나 말이야. 내가 작은 것 같아?”

질문의 요지를 깨달았는지 리세트의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붉어진 양 볼이 귀여워 실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는 크지.”

힘주어 또박또박 말하는 목소리가 무척 억울해 보였다.

“그냥……. 안 먹는 게 속상해서 그랬어.”

“네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먹었어.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먹어.”

“정말?”

“응.”

비로소 안심이 되었는지 리세트는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오물오물 열심히, 식사를 다 해야만 쿠키를 준다고 엄포를 놓았더니 꽤나 열성적으로 먹었다. 진작 이 방법을 쓸 걸 그랬나.

요한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영지로 가자.”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해 내린 결론을 흘려보내는 입술은 의외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죽을 만큼 싫은 일인데, 요한은 수월하게 말을 맺었다.

당황한 듯한 리세트의 뺨을 툭 건드렸다. 그 손이 턱 끝에 닿았고, 곧이어 가는 목을 쓰다듬었다.

“뭐라고 했어, 방금?”

“영지로 가. 나와 함께.”

“어느 영지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지? 맞지?”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었지만 리세트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계속해서 반문했다. 숨길 수 없는 기대와 긴장감이 목소리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는 걸 알지만 막을 길은 없었다.

“델피니움 영지로 갈 거야. 너희 가문의 영지. 다 알고 하는 소리인 거 맞아?”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전했다.

“조건이 있어.”

그 말을 하자 돌연히 심각해지는 리세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 눈을 깊이 마주하며 요한은 조금 남은 물을 마저 삼켰다.

“뭔데?”

“그건 나중에. 일단 카에덴 델피니움을 만나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또 뭐 물어볼 건 없어?”

요한은 빈 물잔을 테이블 위에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성공하지 못하면, 그다음은 없어.”

리세트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경고이긴 하지만, 이건 그 자신을 위해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이 순간조차도 흔들리는 자신을 위해서.

성공하지 못하면 아이를 죽일 거야. 차마 전하지 못한 그 말을 리세트는 다 알아들었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비장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리세트가 웃었다. 그러므로 그 또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마음의 소란함은 잠시 지워 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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