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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01)화 (101/151)

101화
모르겠어

카에덴 델피니움은 당황해 얼어 버린 듯한 리세트를 등 뒤로 숨겼다. 곧이어 부서진 문 너머에서 요한의 얼굴이 보였다.

꼴이 참 가관이었다.

입술은 거칠어진 숨결을 내뱉고 있으며,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칼은 땀에 젖어 헝클어져 있었다. 이 순간에도 옷은 티끌 하나 붙지 않고 깨끗한 게 신기했다.

겨우 세 시간쯤 되었을까. 뭘 저렇게 죽상을 짓고 있는 것인지.

누가 보면 한 반평생을 떨어져 있던 사람으로 알 정도로 요한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단정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망가진 사람이 꾸역꾸역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수도에 간신히 얻은 내 집을 박살 낼 작정인가 봐?”

요한의 감시가 삼엄해 수도에 터를 잡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그걸 비꼬아 말했는데도 요한에게서는 어떠한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복구 비용은 당연히 주시겠지? 양심이 있다면 그러셔야지.”

카에덴 델피니움의 말은 요한에게는 닿지도 못했다. 요한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 리세트에게 박힌 채였다. 카에덴 델피니움이 쥐고 있는 손목을 보자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사라졌다.

“그 손, 당장 치워.”

리세트가 바로 곁에 붙어 서 있지만 않았어도 놈의 주변을 마력으로 에워쌌을 텐데. 분노를 잠재우기 힘든 만큼 몸 안의 마력이 넘실댔다.

“놔주세요. 제가 갈게요.”

잡힌 손목을 흔들어 보던 리세트가 안심하라는 듯한 눈길로 요한을 보았다.

“제가 말한 거 기억하시지요?”

카에덴 델피니움을 바라보며 리세트는 속삭이듯 당부했다. 집중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저 모습을 보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

리세트가 목소리를 낮추었으니 그도 비슷하게 맞춰 주었다.

“기다려 주세요. 곧 연락드릴게요.”

카에덴 델피니움은 마지못해 손에서 힘을 풀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리세트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문가에서 하염없이 그들을 바라보는 요한에게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요한에게는 이 짧은 기다림의 시간조차 너무나도 불길하게 느껴졌다.

달려가서 잡으면 된다. 당장이라도 요한은 그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을 막는 건 이번에도 리세트. 기다리라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는 리세트의 두 눈이 요한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리세트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하자 비로소 억눌러 놓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요한이 막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돌연히 멈추어 선 리세트가 비틀거렸다.

그건 마치 누군가 일부러 시간을 잡아 늘인 것처럼 아주 느리게, 요한이 인지하지 못한 새 벌어진 일이었다. 카에덴 델피니움이 쓰러지는 리세트의 어깨를 붙잡고 나서야 요한의 다리가 움직였다.

“리세트!”

빼앗듯 리세트를 제 품에 당겨 안은 요한은 갈 곳 잃은 분노를 일제히 눈앞에 선 남자에게 쏟아 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요한과 똑같은 마법진으로 응수한 카에덴 델피니움은 마력을 튕기듯 손끝을 털었다. 궤가 같은 마력이 허공에서 한데 묶여 상쇄되었다. 파란 빛무리가 서서히 사라졌다.

“확인 작업 좀 했어. 그 여자 몸에 마법진이 잘 자리 잡았나 해서.”

“그걸 네가 왜 하지?”

도와주려고.

카에덴 델피니움은 그 거짓말을 입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았다. 리세트를 돕는 이유는 단지 궁금증 때문이니. 내 연구가 과연 이 가문의 찬란한 유산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 그걸 도움으로 포장하기에는 썩 좋지 않은 판단일 듯했다.

“말했잖아. 내 연구를 완성시키고 싶다고. 겸사겸사 너희 부부는 내 덕을 보겠지.”

“나도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나?”

“리세트 델피니움의 뜻은 다르던데? 간절히 내 도움을 원했거든.”

리세트 델피니움. 요한의 마음을 한없이 흔들 수 있는 그 이름을 카에덴 델피니움은 잘 이용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정말 죽일 생각이야?”

삽시간에 어두워지는 낯빛이 이곳에 깔린 어둠과 무척 잘 어우러지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 아내는 너를 많이 사랑하더라.”

흔들리는 요한의 눈동자를 살핀 시선은 곤히 잠들어 버린 리세트의 얼굴에 짧게 머물렀다. 왜 하필 지금 쓰러져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나.

“그 사랑을 잃고 싶지 않을 것 아니야.”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

“아이를 죽이면, 리세트 델피니움이 전처럼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두 사람 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아니라고, 그 길을 지나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요한은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알아서 잘 생각해 봐. 나야 아쉬울 게 없지. 연구 과제가 꼭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전부 거짓말이었다. 요한이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고 하면 그는 아쉬워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물러서는 편이 좋겠지.

아내를 안아 든 요한이 몸을 돌렸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해 줄게.”

미련 따위는 없어 보이는 모습을 본 그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리세트 델피니움은 어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어. 네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되게 불안해하더라. 나를 따라오던 순간에도, 이곳에 와 대화를 나누던 때도 엄청 초조하게 뒤를 돌아봤어. 영지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끝까지 버텼어.”

저 이상한 여자가 너무나도 신경이 쓰여 카에덴 델피니움은 하지 않아도 될 오지랖을 부리며 변호를 자처했다. 자신이 이토록 열의를 내는 게 그조차도 신기했다.

요한은 이렇다 할 대답 하나 남기지 않고 그만 떠나갔다.

예의 없는 놈.

“하아…….”

깊이 억눌러 놓은 한숨을 흘려보낸 그의 눈에 미약한 짜증이 번졌다.

결국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나.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인생을 통틀어 가장 손해 본 거래였다.

❖ ❖ ❖

“주인님!”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감시자들의 목소리를 따라 노바르는 고개를 틀었다. 요한 델피니움이 걸어오고 있었다. 품에는 리세트를 소중히 안아 든 채였다.

“저…….”

지척까지 다가온 남자를 조심스럽게 불러 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요한 델피니움은 한 번 그를 흘깃 보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마차로 들어가 버렸다.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공작과 그의 수행인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노바르는 당황스러워 실소했다.

잘못한 게 있어 차마 큰소리를 낼 수 없는 처지였다. 그걸 너무도 잘 인지하고 있는 터라 머리를 벅벅 긁적이는 것으로 분한 마음을 참아 보았다.

“거기서 뭐 해?”

이 상황에서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인 건 맞는데, 치솟는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카에덴 델피니움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리세트는 왜 쓰러진 거예요?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마력을 몸에 주입해 봤지.”

“사람을 죽이려고 작정하지 않고서야, 그게 말이 됩니까!”

“시끄러워. 저 여자는 그렇게 해도 살아. 그러니까 목소리 좀 낮춰.”

카에덴 델피니움은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고갯짓으로 다 부서져 너덜너덜해진 문을 가리켰다.

“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나 좀 도와야겠다. 이리 와.”

노바르가 거절할 새도 없이 카에덴 델피니움은 그의 로브 자락을 잡아끌었다.

❖ ❖ ❖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도 요한은 지금처럼 리세트를 품에 가두듯이 끌어안고 있었다. 폭신한 침대에 몸이 누여지고 뺨에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이 느껴져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리세트는 간신히 인지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정신과 몸이 따로 노는 듯했다. 귀는 활짝 열려 주변의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데, 시야는 어둠에 가로막혀 있었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확인할 게 있다는 말에 마력을 받아들일 때만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에서야 후유증이 밀려온 것 같았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리세트가 생각에 잠긴 사이 요한의 품이 멀어졌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가 없었다. 눈은 역시 떠지지도 않았다.

쏴아아-,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노곤노곤한 잠기운이 한층 더 짙어졌다. 이윽고 물소리가 그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나도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옷을 벗기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는 손길 역시 그러했다. 능숙하지만 느릿하게 움직이던 손이 가슴 밑을 지나가자 조금 머뭇거리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조차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지워졌다.

요한은 방금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손길로 배를 닦아 주었다. 잠옷까지 새로 갈아입자 씻은 것처럼 보송보송한 느낌이 들어 리세트는 기분이 좋았다.

머리를 쓰다듬은 손이 뺨을 문질렀다. 입술을 눌러 본 손끝이 떠나가자 부드러운 입맞춤이 찾아왔다. 요한은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그저 가만히, 지금 이 순간을 느끼려는 것처럼.

침대가 작게 흔들리고 단단한 팔이 리세트의 머리를 받쳤다. 등을 어루만지던 커다란 손이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이마를 간질이는 숨결마저 포근했다. 몸에 번지는 온기가 좋아 리세트는 더욱 꼭 붙었다.

리세트가 기대한 대로 요한은 조심스럽지만 힘껏 끌어안아 주었다. 맞닿은 가슴으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고동에 리세트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뙤약볕 아래에서 뜀박질을 한 사람처럼 요한의 심장 박동이 빨랐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보이는 거라고는 탄탄한 가슴뿐이고 눈은 자꾸만 다시 감기려고 했다. 입술은 좀처럼 떨어지지가 않았다. 요한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눈을 맞추고 싶은데 누군가 있는 힘껏 짓누르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요한.

가슴에 닿은 입술을 움직여 불러 보았지만 소리가 나지 않아 요한이 알아차리지 못했다.

놀란 마음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안아 주고, 등을 토닥여 주고 싶었지만 리세트의 시야는 점점 까맣게 물들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친 몸이 잠으로 이끄는 탓이었다.

“모르겠어, 리세트.”

가물어지는 의식 속으로 그 간절한 목소리 흘러 들어왔다.

“나는 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심장 박동이 더욱 거세졌다. 많이 불안해하고 있구나. 리세트가 그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아무 데도 가지 마. 떠나지 마. 말없이 사라지지 마.

한숨처럼 흘러나온 말이지만 리세트는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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