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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00)화 (100/151)

100화
미쳤잖아

생전 초면인 저택을 바라보고 있는 노바르의 눈동자에 따가운 햇살이 스며들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발걸음으로 노바르는 마차 주변을 서성거렸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회한에 찬 눈길로 낯선 저택을, 그리고 다시 제 곁을 지키고 선 사람들을 차례대로 훑어본 노바르는 짧게 진저리 쳤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노바르는 어렵지 않게 대강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직접 보지 않고도 충분히 예상이 갔다. 겨우 몇 분 전, 공작이 이 저택의 출입문을 부수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으므로. 지금 들려오는 이 굉음도 무언가를 깨부수고 불태우느라 생겨난 것일 터였다.

노바르는 충실히 카에덴 델피니움의 지시대로 따랐다.

‘한 시간만 붙잡고 있어. 너한테 그 이상을 바라지는 않아.’

못 미더워하는 눈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데 그가 생각해도 한 시간이면 최대치였다. 맹렬하게 다그치던 공작의 모습이 불쑥 떠올라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어디 있지?’

누구를 찾는 건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물음을 던진 공작의 눈은 굶주린 짐승의 것과 닮아 있었다.

사람의 눈이 저토록 시린 빛을 띨 수 있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공작의 눈은 살의에 잡아먹힌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불길한 생각을 한 노바르는 꿋꿋이 한 시간을 채운 뒤에야 이 저택의 위치를 알렸다. 그 시간 동안 족히 십 년은 늙은 듯한 기분이었다.

당장 달려 나갈 줄 알았는데 공작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무언가를 꿰뚫듯 그의 눈동자를 직시하다 서서히 몸을 돌렸다. 이제는 해방이구나 싶었을 때였다.

그가 딛고 선 바닥을 촘촘하게 포위하고 있던 공작의 마력이 조금씩 앞으로 움직였다. 마치 그를 어딘가로 몰아넣듯이. 떠밀리다 걸음이 멈춘 곳은 하필이면 공작의 앞이었다.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공작은 눈빛으로 얌전히 따라오라고, 분명하게 그 뜻을 전했다.

결국 그렇게 되어 버려 노바르는 지금, 카에덴 델피니움이 말한 그 저택 앞에서 공작이 남기고 간 감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시선을 보내왔다. 죽이고 싶다, 감히 우리 마님을 빼돌린 자를 처단하고 싶다는 그 강렬한 외침을 담은 눈빛. 마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 된 듯해 노바르는 달아나고 싶어졌다.

이 일의 원인은 리세트 델피니움. 그것을 사주한 자는 카에덴 델피니움. 일을 이 지경이 되게 만든 건 요한 델피니움. 온통 델피니움 천지에서 그 혼자만 동떨어진 이름이었다. 델피니움의 싸움에 선량한 로슈만이 피를 보게 생겼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이제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소망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제발 부탁합니다.

방긋방긋 웃으며 사람을 약 올리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카에덴 델피니움을 향해 간절하게 읊조려 보았다.

공작의 심기만 거스르지 마세요.

제발.

❖ ❖ ❖

리세트는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와 비틀거렸다.

“하필 지금 어지러워? 아까까지는 멀쩡히 마력을 받아들였잖아. 왜 하필 지금이야?”

카에덴 델피니움이 진심으로 원망스러워하는 듯해 리세트는 기가 막혔다. 무어라 쏘아붙이려는 순간 머리에 둔통이 일어 리세트는 눈을 질끈 감으며 관골을 꾹 눌렀다.

“떠나자.”

“네?”

“밖으로 통하는 뒷문이 있어. 안전하게 자리를 뜨자.”

“어디로 가자는 거예요?”

손목을 잡아끄는 그의 팔뚝을 밀며 리세트가 버티고 섰다.

“영지로 가야 돼.”

“델피니움의 영지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응.”

“어째서 그곳으로 가야 하는 건데요?”

그 급박한 대화 소리에 무언가 부서져 나가떨어지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아까보다 아주 조금 더 요란해진 그 소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영지에 모든 게 준비되어 있어. 현실적으로 그걸 수도로 옮기는 건 불가능해. 우리가 가는 게 맞아. 너도 동의하지?”

카에덴 델피니움은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리세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가 다시 한 걸음 불쑥 내디뎠다.

“잠깐만요!”

리세트는 붙잡힌 손목을 비틀며 외쳤다.

“바로 떠나도 되는데 저를 이곳으로 데려오신 이유가 뭐예요?”

저돌적으로 의견을 몰아붙이던 남자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네 몸에 마법진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는지, 언제 생긴 건지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어.”

“그건 영지로 가서 해도 늦지 않잖아요. 마력을 제 몸에 잠시 주입하는 거로 끝나는 일 아니었나요?”

예리하고 정확한 지적에 카에덴 델피니움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 피곤하고 짜증스러웠다. 어서 가야 하는데, 이런 걸 따지고 묻는 리세트가 성가셨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리세트의 말대로 방금까지 행한 작업은 영지로 가서 해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서, 리세트가 스스로 그를 따라 영지로 간 것이라는 핑계를 만들어 내려면 일단은 이곳을 거쳐 가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요한이 따져 묻더라도 받아칠 말이 생기는 것이니.

“제가 스스로 연구원님을 따라가길 바라셨던 거지요? 요한에게 나중에 둘러댈 말이 필요하신 거잖아요.”

“어. 맞아.”

거짓말을 하는 대신 그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무작정 너를 영지로 데려갔어 봐. 요한이 특히나 싫어하는 곳에, 그것도 아이를 위해 영지로 갔다고 하면 나를 가만히 두겠어? 그때는 정말 죽이려고 덤벼들걸.”

이만하면 알아들었겠다 싶었다.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있는 리세트를 보며 그는 최대한 다정하게, 언제 지어 봤을지도 모를 온화한 미소를 만면 가득 띄워 보았다.

“그럼 어서 가자.”

“잠깐만요.”

단호한 눈빛과 목소리가 또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얼마 보지 못했지만 리세트 델피니움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는 그의 속이 뒤집어지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요한을 설득해 볼게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여자가 답답해 카에덴 델피니움은 정말이지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설득이 될 것 같아? 저렇게 다 부수고 너를 찾아다니는 애가?”

“할 수 있어요.”

어디서 기인한 자신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저 여자가 원한 건 뭐든지 다 들어주었겠지. 그러니 이 급박한 순간조차 설득을 운운하며 버티고 있는 것일 터였다.

“절대 못 해. 너, 잘 생각해 봐. 제어구는 네가 하고 싶어서 한 거야? 아니잖아. 요한은 아이에 관한 것만큼은 네 뜻에 따라 줄 생각이 없어. 그런데 뭐, 설득하겠다고?”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제어구를 풀 열쇠만 주세요.”

“예전에도 도망쳤잖아. 심지어 지금은 그때보다도 상황이 나빠.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

초조하게 뒤를 흘끔거리던 리세트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짜증스러워 미칠 정도로 맑은 눈빛이었다. 표정은 또 어떻고. 쓸데없이 용맹했다.

“그래서 안 돼요. 그때도 도망쳤으니까.”

그 도망과 지금 도망이 무어가 다른지 진심으로 묻고 싶어졌다. 그가 입술을 채 떼기도 전에 리세트 델피니움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잘 설득해 볼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답답했다. 화가 나기도 했다. 짜증스러웠다.

그런데 그걸 내비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인데, 한 번도 속에 무언가를 억누르며 참아 본 적이 없는 그는 지금 리세트를 대하는 게 무척이나 고역스러웠다.

고집불통.

이 여자는 기적보다 그 단어가 훨씬 잘 어울렸다. 눈빛이며 굳게 닫힌 입매, 올곧은 자세와 말투까지 고집불통이라는 말의 현신이었다.

그걸 깨닫자 무어라 따지려던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이 여자야말로 설득이 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는 이런 눈빛을 예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불확실한 일에, 제 아이를 맡길 수는 없어요.’

요한 델피니움을 품고 있던 그 여자도 꼭 저런 눈을 하고 있었지.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그와는 상극이었다. 대척점에 서 있다 봐도 무방한 여자들이 하필 그의 연구를 완성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게 미칠 노릇이었다.

“지금 잡히면 이다음을 장담할 수가 없어.”

회유를 포기한 그는 사실을 주지시키기로 했다. 일종의 경고였다.

“요한의 감시는 더 심해질 거야. 나와 노바르 로슈만은 더는 공작저에 발도 못 붙이겠지.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제가 나가면 되잖아요.”

“그게 쉬워? 그렇게 쉽게 될 일이었으면 노바르 로슈만이나 내가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겠지.”

“요한이 불안해하고 있잖아요. 제어구까지 꺼내 들었는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까 불안이 더 극심해졌을 거예요. 그러니까 설득할 수 있어요.”

결코 쉽지 않은 일을 리세트는 마치 간단한 일을 처리하듯 말했다.

“언제든지 다시 도망갈 수 있다는 여지를 주는 것보다는 계속 곁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주면 돼요.”

말이야 쉽지. 결코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무슨 방법으로?”

뾰족한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어쭙잖은 객기겠지. 지금껏 요한이 보여 준 충실한 애정과 사랑을 등에 업고 무리한 수 싸움을 벌이려 하는 것일 터였다.

“같이 가자고 할 거예요.”

“……뭐라고?”

“영지로, 함께 가자고 할 거예요.”

머리가 아찔해지는 발언에 카에덴 델피니움은 헛웃음을 흘리며 단호하게 반박했다.

“안됐지만 실패할 거야. 요한에게 영지는 다시는 눈에 담고 싶지 않은 곳이거든. 그런데 같이 가 줄 것 같아?”

“네.”

저 자신만만한 얼굴이 한순간도 찌푸려지지 않아 그는 의아해졌다. 떼를 쓰거나 음식을 거부하며 버티겠다는 편이 훨씬 더 그럴싸하지 않나. 대체 저 여자는 뭘 믿고 저렇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요한은…… 한계에 몰렸어요.”

처음으로 리세트의 표정이 흔들렸다.

“너무 많이 지쳐 있거든요.”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고 그가 입술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문 하나가 뜯겨져 날아가는 듯한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연구실 쪽으로 가까워져 갔다.

온 세상이 정적에 잠긴 듯한 순간이 짧게 스쳐 지나가자 연구실의 문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혀를 찼다.

이런. 너무 늦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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