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기적
연구실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눈을 감은 채로 리세트는 몸속을 휘젓고 다니는 마력에 집중했고, 카에덴 델피니움은 그런 리세트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마력을 주입하며 노려보았다.
일단 하려던 것부터 하자고, 그 후에 이야기를 나누자고 리세트가 제안했다. 싫다며 거절하던 카에덴 델피니움은 본인이 아쉬운 게 많아 결국 물러나 주었다.
숨 쉬는 게 버거울 정도로 뜨겁게 느껴지던 마력의 온도가 서서히 낮아졌다. 진작 겁을 먹은 탓에 경직되어 있던 리세트의 어깨와 손끝에 머물던 긴장감도 차츰 지워졌다.
어두워야 집중이 잘된다는 카에덴 델피니움의 뜻에 따라 커튼을 쳐 두어 내부에는 은은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저 사람은 뭐가 그토록 궁금한 걸까.
리세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눈을 감지 않아도 되지만 혼자 진득하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일부러 시야를 차단했다.
눈이 마주치면 필연적으로 대화를 나누게 될 테고, 저 사람은 혼을 쏙 빼놓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반드시 확인해야만 하는 게 있다는 말에 순순히 마력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요한의 마력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약간의 이물감을 동반했지만 조금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정도였다.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었는지 카에덴 델피니움은 손을 거두었다. 잔잔하게 흐르던 마력도 흩어지다 곧 자취를 감추었다.
가슴이 텅 비어 버린 것만 같아 리세트는 목 아래 부근을 가만가만 문질렀다.
“너, 이상해.”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상할 엄두도 나지 않는 남자가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이상하다고요?”
“어.”
“뭐가 이상한데요?”
자신의 턱 밑에 검지를 가져다 댄 그가 이윽고 반대편 손을 들어 두어 번 휘저었다.
“잠깐 조용히 해 봐. 이번에는 내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까다롭고 예민한 사람.
리세트는 제 나름의 결론을 내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저 사람과 가까이 붙어 있고 싶지는 않았다. 본능적인 거부감 같은 걸까.
만난 이래 처음으로 조용한 그를 내버려 두고 리세트는 연구실 안을 살펴 나갔다.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눈으로만 구경했는데, 딱히 제지하지는 않아 마음 놓고 돌아다녔다.
리세트에게는 나름의 환상이 있었다. 아카데미에 있는 연구실 외에 개인적으로 연구실을 마련해 두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내부를 꾸밀까. 어렸을 때부터 궁금했다.
아주 깔끔하거나, 아주 더럽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구실에서 먹고 자고, 일상을 보내기도 하는 사람들은 후자가 많다고 예전에 로티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다.
카에덴 델피니움의 연구실은 의외로 정상적인 상태였다. 황량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깔끔했다.
리세트는 듬성듬성 비어 있는 책장 앞에 당도했다. 약초에 관한 책이 가장 많았다. 책장 바로 옆에 놓인 책상 위에는 별로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약병이 여러 개, 그리고 만지고 싶지 않은 특이한 모양의 식물과 약초가 여럿 있었다.
먹으면 죽음에 이를 것 같은 탁한 연보랏빛 액체가 채워진 유리병을 지난 시선은 조금 더 옆으로, 책상의 오른쪽 모서리에 자리한 붉은 꽃에서 멈추었다. 그가 직접 주기도 했고, 노바르를 통해 보낸 꽃이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이 꽃, 이름이 뭐예요?”
“없어.”
“왜요?”
“넌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 조금 참으면 안 돼?”
“알겠어요.”
또 저런다.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순순히 대답하는데 목소리는 시무룩하지. 결국 그는 한숨 쉬듯 설명을 덧붙였다.
“배 속의 아기가 어떤 마력을 가졌는지 감지하기 위해 만든 꽃이야. 오직 그 용도로만 만든 건데 굳이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지.”
“감사합니다.”
“뭐가?”
“알려 주셔서 감사하다구요.”
예의가 참 바른 애라 케서린 로티가 아끼는 건가? 그는 나름대로 애정의 이유를 추측해 보았다.
말이 많은 애는 성가시다. 지금껏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견해는 오늘 한층 더 견고해졌다. 제 딴에는 조심조심 다닌다지만 리세트는 온 사방을 다 구경할 태세로 두리번거렸다.
정신 사납다는 말을 하려다 말고 그는 한숨을 꾹 눌렀다. 어찌 되었든 잘 보여야 하는 건 이쪽이니 말이다.
“아.”
“왜요?”
작게 흘린 말을 용케 들었는지 리세트 델피니움이 그에게 다가왔다.
“꽃은 어떻게 했어?”
“꽃이요?”
“내가 준 거.”
“그날 시들어 버렸잖아요.”
“그거 말고. 실습실에 가져다 둔 거.”
“아…….”
말끝을 늘이는 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역시. 버렸구나?”
“네.”
“왜 버렸어?”
“결혼, 했잖아요.”
꽃다발과 결혼의 상관관계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 이쯤에서 넘기고.
카에덴 델피니움은 제 손을 한 번, 그리고 다시 리세트의 눈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저 여자의 정체가 무엇일까.
마력 공급의 통로 역할을 하는 마법진은 저 여자의 몸에 덧씌워진 상태였다. 본래 몸 안에 아주 깊숙이 자리를 잡아야 하는 그것이 그저 몸을 감싸듯 맴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를 가진 후에야 마법진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여자의 몸에 델피니움의 마력이 가득 차야만 후계자를 잉태할 수 있고, 그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만 비로소 두 개의 마법진이 자리를 잡는다. 아이 곁에 꼭 붙어 선 채로.
“아이를 어떻게 만든 거야?”
노골적인 호기심이 엿보이는 눈동자가 리세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저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불쑥 요한의 말이 떠올랐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요한이 처음으로 비전 마법의 일부를 밝혔던 그 밤이.
“이상한 뜻 아니야.”
“알아요.”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모르겠어요.”
“네가 모르는 게 말이 돼?”
“요한도 모를걸요.”
“너희가 모르면 누가 알아?”
시끄럽게 따지는 남자를 무시하며 리세트는 생각에 잠겼다.
아이를 원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비전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겠지. 그 확실한 안전장치가 있으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어 밤의 시간을 거부하지도 않았을 테고.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요한이 보인 반응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싫은 게 아니라 당황스러웠던 거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일 테니.
“델피니움가의 비전 마법은 마력을 계승하는 거지요?”
“내가 아는 선에서는 그걸로 모든 게 귀결되기는 하지.”
고개를 조금 기울인 채로 카에덴 델피니움은 속삭이듯 말했다.
“네 몸의 마력을 전부 누른 상태로, 이 가문의 마력으로 채운 뒤에야 아이를 가질 수 있어.”
“요한은 한 번도 저한테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 그런 단계를 거치지 않고 아이를 갖는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는 아이를 갖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절차를 하나씩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직접 말을 하다 보니 복잡했던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아내에게 푹 빠져 있는 놈이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지. 평생 후계를 보지 않는 걸 택했겠지. 제 아내와 관련된 일에 맹목적인 헌신을 보이는 요한의 반응을 종합적으로 따져 보면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다.
또 다른 질문을 꺼내기 전에 그는 리세트에게 차례를 넘겼다. 서로 하나씩 주고받아야 원활하게 거래를 성립할 수 있으니.
“네 차례야. 궁금한 걸 말해 봐.”
“없어요.”
즉각적으로 거절하는 리세트를 보는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웃음을 머금은 눈과 달리 한쪽 입꼬리는 삐딱하게 올라가 있었다.
“요한을 둘러싼 소문의 진실이 궁금하지 않아?”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기는 했지만 금세 제자리를 찾아갔다. 리세트 델피니움은 이번에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궁금하지 않아요.”
“아닐 텐데?”
“요한이 말해 주지 않는 일인데, 제가 뒤에서 몰래 알아볼 필요가 있나요?”
결심을 굳힌 여자의 두 눈은 이곳에 깔린 옅은 어둠을 압도할 만큼 맑고 곧았다.
“지금 저에게 필요한 건 아기를 무사히 낳고, 우리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는 거예요. 소문 같은 거…… 궁금하지 않아요.”
카에덴 델피니움은 그쯤에서 물러났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신기해 조금 더 건드려 보고 싶었지만, 상대방이 워낙 순수하게 반응하는 터라 괴롭히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도망쳐 있던 거야? 정확한 기간 말이야.”
“반년 정도 돼요.”
“반년이라…….”
아기가 델피니움의 마력 대신 제 어미의 마력을 먹으며 버틴다고 해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을 텐데.
이 부분에 관한 건 아쉽게도 그조차 짐작할 수 있는 바가 없었다. 선조들이 무의미한 모험을 하지 않은 덕분에 그것에 관한 자료가 만들어지지도 않았으니 알아낼 방법도 없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아이를 갖고, 마력을 공급받지 않고도 여자는 무사히 살아 움직인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도 동시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걸까.
여러 가정을 세워 보고 다시 머리를 굴려 보아도 글쎄, 썩 마음에 차는 답이 없었다. 전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기적.
그 단어가 불현듯 머릿속을 차지했다.
그래, 기적.
그 외에 달리 칭할 말이 있나?
이론으로 증명할 수 없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그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여 줄 수 있을 듯했다. 말 그대로 이건 기적이었으므로.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우선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비전 마법에서 벗어나야 돼.”
“요한에게 부탁해야 하는 건가요?”
“요한이 만들어 놓은 건 마력을 공급할 통로야. 그건 언제든 걔가 마음먹으면 없앨 수 있겠지만, 아이 몸에 자리 잡은 건 네가 나와 함께 실험을 거듭하며 없앨 수밖에 없어.”
그는 지금까지 진행해 온 연구를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돌이킬 수가 없게 된다. 그 지독한 마법을 끊어 낼 방법은 여자가 아이를 품고 있을 때를 노려 마법진과 아이를 떼어 놓는 것뿐이었다.
리세트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아래층에서 예기치 못한 소음이 들려왔다. 문이 뜯겨져 나가는 소리라는 걸 알아차린 두 사람의 입술 새로 동시에 탄식이 터져 나왔다.
“벌써 왔나 보네.”
빠르기도 하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