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지독하다
몸을 안전하게 숨기기 위해 낡은 마차를 빌린 탓에 덜컹거리는 소리가 심했다.
안정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마차 안에, 종알종알 시끄러운 조카의 아내를 데리고 있으려니 그는 조금 후회가 되었다. 따로 갈 걸 그랬나. 마차를 하나 더 빌렸어야 했나.
이 순간에도 리세트 델피니움은 무어라 조잘조잘 말을 하고 있었다. 아까보다는 눈치를 보는지 소리를 죽인 채로, 쉬지 않고 계속 혼잣말처럼.
“이런 마차는 처음이라 되게 불편하니까 너까지 보태지는 마.”
“네.”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 때문에 영 신경이 쓰여 그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일단 오늘은 네 몸 상태만 확인하게. 그리고…… 우리끼리 일 좀 하다가 나중에 요한을 설득해 봐야지. 둘이 힘 좀 합쳐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몸 상태를 확인하고 어느 정도 일이 진행되면 요한을 설득해 보자. 간결하게 정리해 줄 수 있는 말에 굳이 질문을 덧붙였다. 왠지 마음 한편이 찝찝한 탓이었다.
원래는 도착한 후에 설명을 해 주려고 했다. 이런 마차 안에서 목소리를 높여 가며 대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리세트 델피니움이 신경을 긁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했을 터였다.
동의를 표하는 것인지 리세트는 입술을 닫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착한 어린이를 칭찬하듯 카에덴 델피니움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차 안은 덜컹덜컹, 땅에 박힌 돌부리를 넘어오는 듯한 소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목소리가 하나 줄었는데, 이상하게도 좀 전보다도 더욱 소란스러워진 것 같았다.
다리를 꼰 채로 발목을 까딱이며 카에덴 델피니움이 슬쩍 운을 뗐다.
“따돌리느라 힘들었어.”
듣지 못한 것인지 리세트 델피니움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따돌리느라 엄청 힘들었어.”
이번에는 목에 힘을 주어 외치자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따돌려요?”
“누구겠어. 요한이지.”
창문에 붙은 채로 그를 돌아보는 리세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요한이 벌써, 따라왔다구요? 언제요? 언제, 따돌렸어요?”
되묻는 목소리가 다급했다. 까닭 모를 반응에 그의 고개가 살며시 기울어졌다.
뭘 저렇게 사색이 될 정도까지야.
“나한테 감시가 많이 붙었거든. 그것들 따돌리느라 힘들었다고.”
“아……. 다행이다.”
“뭐가?”
“요한이 아직 모르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됐어요. 어서 일 마무리하고 집에 데려다주세요.”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리세트가 너무나도 신기했다.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안심한 건지 모르겠다. 잡히면 큰일 나는 건 변함없지 않나? 게다가 공작저에 보낼 생각도 없는데.
그는 창문을 짚은 손이 초조한 듯 꼼지락거리는 걸 보았다.
“왜 그렇게 걱정을 해?”
“제가 사라진 걸 요한이 눈치챌까 봐요.”
“지금은 모를걸.”
“그걸 어떻게 아세요?”
“다 방법이 있어.”
“방법이요?”
눈초리가 사나워지는 걸 보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기가 막힌 반응에 카에덴 델니피움은 실소를 터트렸다.
“손님을 보냈어.”
“그래요?”
강렬하게 노려보던 눈이 한순간 사르르 휘어졌다. 그쯤 되니 그는 정말로 의아해졌다.
“요한이 위험한 게 아니면 상관없어요.”
그 요한 델피니움을 걱정하다니. 부부라고는 하지만 걱정이 지나친 거 아닌가?
저토록 누군가를 걱정하는 눈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셋. 선대 델피니움 공작 부인, 요한 델피니움, 리세트 델피니움. 그러고 보니 죄다 델피니움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참, 신기하지. 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보일 법한 눈이 아닌데.
“손님이 위험한 사람인 건 아니지요?”
“응. 절대.”
“시간을 충분히 벌어 주실까요?”
“믿어 봐야지.”
요한을 유인하기 위해 먹잇감을 던져 놓았다. 그 먹잇감이 제 몫을 해 주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썩 믿음을 주는 녀석은 아니었다. 고지식하고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는, 착하디착한 노바르 로슈만.
어설픈 태도를 보이는 노바르 로슈만이 부디 잘 버텨 주기를 바라며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잡아먹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윽고 흔들거리던 마차의 움직임이 잠잠해져 그가 먼저 문을 내리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부에게 약속한 돈을 건넨 후 돌아왔는데, 리세트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창문에 바짝 붙어 공작저가 있는 방향을 살피고 있었다.
“빨리 내려.”
문을 툭 발로 차자 리세트가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야. 어서 가자.”
❖ ❖ ❖
침실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어둠에 잡아먹힌 것처럼 눈앞이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리세트의 침실 문을 연 요한은 그대로 얼어붙어 선 채로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싸한 냉기가 흐르는 걸 눈치채고 나서야 깨달았다. 리세트가 머무르는 곳은 그의 침실이라는 걸.
다급하게 달려가 자신의 침실 문을 연 요한은 방금과 마찬가지로 문턱을 넘지 못하고 멈추어 섰다.
없다.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곱씹으며 고개만 움직여 내부를 살폈다.
리세트가 없다.
비로소 그 사실을 받아들인 요한의 입술이 비틀린 미소를 머금었다.
“리세트.”
그날처럼 불러 보았다. 리세트가 말없이 떠난, 아이를 죽이겠다는 말을 듣고 사라져 버렸다는 그 새벽을 떠올리며.
활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결에 커튼이 춤을 추듯 너풀거렸다. 그날과 다른 점은 온도뿐이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그런 계절이니까. 하지만 마음에 스미는 감정은 결국 그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끝을 모르고 달려가는 불안과 절망.
확연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굳이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리세트가 떠났다. 나를 떠나, 또다시 사라졌다. 이번에도 제 발로, 나를 떠났다.
창문에 다가간 요한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문득 요한은 발코니로 난 창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굳게 닫힌 발코니의 창. 그리고 활짝 열린 이 창문.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단서는 자유롭지 못한 리세트의 몸이었다.
제어구를 한 채로, 도망을 갈 수가 있나?
마법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이 높이에서 뛰어내렸을 리가 없다. 죽으려고 작정한 게 아니고서야. 불쑥 스친 두려움에 요한은 떨리는 숨결을 가다듬으며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리세트가 사라졌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에덴 델피니움.”
모든 가정을 관통하는 그 남자의 이름 앞에서 요한은 참지 못한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감히.
몸을 돌린 요한은 감정을 다스리듯 느릿한 걸음으로 다시 응접실로 향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그래야 올바르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다고 거듭 제 마음을 타일렀지만 갈수록 보폭이 넓어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요한은 응접실 앞에서 불안한 듯 서성거리는 하녀들을 눈짓으로 물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굳게 문을 닫고 조금 떨궈 두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설명해.”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그놈 주변에는 푸른 불꽃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꼼짝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노바르 로슈만의 눈동자에 그 빛이 스며들었다.
입술을 떼지 못하는 노바르 로슈만에게 요한은 다시 한번 명령했다.
“어서.”
❖ ❖ ❖
작지만 고풍스러운 저택 안에 임시로 연구소를 마련해 두었다. 요한이 들이닥치면 낭패를 볼 수도 있어 기본적인 것들만 갖추어 놓았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구속 제어구를 모아 두는 취미가 있던 걸 다행으로 여겼다. 그 덕분에 리세트를 옭아맨 제어구를 풀 수 있었다.
반 델피니움의 아들도 곱게 미치지는 못했구나.
리세트 델피니움의 실력을 익히 들어 알고 있어 요한이 왜 이런 걸 구해다 채웠는지 이해는 하지만, 정말 미쳤다는 소리밖에 나오질 않았다.
이놈, 제정신이기는 한가?
현존하는 제어구 중 가장 강력한 걸 제 아내에게 채우다니. 심지어 이건 웬만한 마법사들은 평생 구경할 일조차 없는 것이었다. 반란을 일으키거나 제국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마력을 억누르는 정도가 아니라 이건 완전히 마력이 없는 상태로, 즉 일반적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만들어 주는 제어구였다.
“지독하다. 지독해.”
“왜요?”
굳이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알려 주어 좋을 것이 없을 듯했다.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반대편 손목에 묶인 제어구까지 풀어냈다.
리세트는 온전한 자유를 되찾은 손목을 주물렀다. 느릿하게 꾹꾹 누르고 있었는데 불쑥 카에덴 델피니움이 질문을 던졌다.
“지금 서 있는 거야?”
“그런데요?”
“어떻게?”
“……다리가 있으니까요?”
별 허튼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한 얼굴로 카에덴 델피니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쇠 꾸러미를 다시 서랍 속에 던지듯 집어넣는 그의 눈동자에 미처 다 닫아 두지 않은 커튼 사이로 스며든 빛이 닿았다. 공기가 탁한 듯해 그는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아무리 마력이 많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어지러울 텐데. 그거 꽤 구속력이 강한 거거든.”
“매일 하고 있던 게 아니라 그런 건 아닐까요? 게다가 둘이 한 쪽씩 나눠 끼고 있었어요.”
“……그걸 나눠 껴? 너랑 요한이? 왜 그런 짓을 해?”
저도 모르겠는데요.
리세트가 그 말을 하기도 전에 카에덴 델피니움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고개를 털었다.
“말하지 마. 별로 듣고 싶지 않아.”
손님을 데려왔다는 자각을 한 것인지 그는 투명한 유리잔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 건넸다. 평범한 물이었다. 겉보기에도 그렇고, 오염된 냄새도 나지 않는 물. 그런데 왠지 마시면 큰일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아 리세트는 선뜻 입을 대지 못했다.
“궁금한 게 많아. 너도 그렇지?”
물잔을 노려보던 리세트가 고개를 들었다.
“말은 계속 편하게 할게. 괜찮지? 너도 편하게 해. 호칭은 선생님이나 연구원님으로 해 줘.”
와, 정말 일찍 말씀하시네요.
마음속으로만 톡 쏘아붙인 리세트는 마음대로 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목이 너무 마른데 이 물을 마셔도 될까.
“아무 짓도 안 했어. 먹어.”
그런 고민을 읽었는지 그는 황당하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리세트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 속으로 10초가량을 세고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리세트가 물 한 잔을 다 비워 내자마자 그가 입술을 열었다.
“서로 궁금한 것부터 풀고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