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97)화 (97/151)

97화
사라지셨습니다

노바르는 맞은편에 앉은 요한의 존재도 잠시 잊을 만큼 주변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문이 열릴 때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복도를 걸어갈 때만 하더라도 새들의 지저귐이 음악의 한 선율처럼 아름다웠던 건 사실이었다. 밖에 유독 새가 많이 날아다니는 건가 싶을 정도로 노랫소리가 가까워지자 의구심이 커졌다.

열리는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새들의 소리에 노바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새들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안에 있는 것이라고.

아름다운 음악처럼 느껴지던 소리가 어지러운 소음이 된 건 순식간이었다. 문턱을 넘어왔을 때 노바르는 귀를 찢어 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응접실이 아니라 새를 기르는 장소인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지만 그를 이곳까지 안내한 자의 말에 따르면 응접실인 건 틀림없었다. 테이블 앞에 차가 차려졌으므로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물끄러미 찻잔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올려 노바르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새장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일단은 응접실이기는 한 공간에 편안해 보이는 듯한 저 남자. 요한 델피니움. 당장이라도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인데 공작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이 소음은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웬…… 새?

애초에 그런 취향인가 싶었지만 절대로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리세트인가? 그것도 아닐 텐데. 도대체 누구의 의견을 반영해 응접실을 꾸민 건지 궁금해졌다.

새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단정한 몸짓으로 차를 마시는 요한 델피니움의 얼굴은 또 어떻고. 그러고 보니 공작의 얼굴이 전보다 조금 수척해진 듯 보였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인상이 한층 더 사나워져 마주 보기 껄끄러웠다.

대체 나더러 어쩌라고.

노바르는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꾹 삼켜 냈다. 자신을 이곳에 밀어 넣은 남자를, 웃는 얼굴로 어서 가 보라고 한 카에덴 델피니움을 떠올리자 속에서 울컥 무언가 치미는 것 같았다.

“용건이 뭐지?”

나직한 목소리가 노바르의 상념을 잘랐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노바르는 자신이 아주 안전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생긋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공작 부인께서 많이 아프시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걱정되어서요. 편지에 답장을 하지 못하실 정도면 심각한 게 아닌가 싶어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적당히 아프고, 적당히 회복하는 중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을 듯한데.”

태생적으로 말수가 적은 노바르는 지금 이 순간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딱 봐도 어서 나가라는 눈빛을 계속 무시하고 있자니 속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목구멍까지 그런 느낌이 올라오는 것 같아 노바르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일반적으로 준비하는 온도보다도 더 낮은, 거의 식었다 보아도 될 정도로 차는 마시기 수월했다.

이 뜻이 무엇이겠나.

어서 마시고 썩 꺼지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부인께서 저와 지난 학기에 같은 조를 하셔서요. 함께하던 과제가 많아 의논해야 할 것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노골적인 의사 표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바르는 꿋꿋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 남자가 시간을 끌어 달라고, 공작을 오래 붙잡고 있어야만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으니까. 만난 적도 손에 꼽을 정도고, 알고 지낸 시간도 거의 없다시피 한 사이였지만 카에덴 델피니움의 얼굴이 그토록 진지한 건 처음이라 노바르는 최선을 다해 공작을 붙잡아 둘 생각이었다.

“휴학 신청서를 제출했으니 굳이, 내 아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맡는 건 아닌 듯한데.”

“팀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함께 시작했으면 함께 끝을 보아야지요. 과제 하나하나가 졸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요.”

“그런 중요한 문제를 어째서 나는 듣지 못했을까?”

반문하는 목소리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들렸지만 노바르를 직시하는 눈빛은 매서웠다.

“선생님들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는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요한은 등받이 깊이 몸을 묻었다. 느슨하게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기다렸다. 저 입에서 과연 무슨 소리가 나올까 싶어서.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 기꺼이 걸려 넘어가 주었다. 어떤 속셈이 있다 하더라고 노바르 로슈만은 지금 리세트를 걱정하고 있으니. 분명 마력 때문이겠지. 확실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어 요한은 더욱 불쾌해졌다.

감히, 네가.

릴프랑 약초 다음으로 리세트가 가장 많이 부르는 건 단연코 저놈의 이름이었다. 노바르 로슈만. 거슬리다 못해 제국 밖으로 치워 눈앞에서 없애 버리고 싶은 놈.

그런 비밀을 숨겼으면서 당당하게 찾아올 줄이야.

형편없는 기백을 가진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그 견해를 바꾸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주 대단한 놈이 아닌가. 마력의 이상 징후가 어떤 경우에 발현되는지 알면서도 꿋꿋이 숨기다니.

‘내가 비밀을 지켜 달라고 부탁한 거야. 아트반도, 노바르도 몇 번이나 너한테 털어놓으라고 권했는데 내가 고집을 부렸어. 그러니까 두 사람한테 너무 내색하지는 말아 줘.’

제어구를 풀어 주는 건 절대로 안 된다 못 박았더니 리세트는 저걸 부탁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여러 감정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미약한 분노와 실망감은 아트반 크리프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는 노바르 로슈만에게로.

만약 마력에 이상이 생긴 걸 아트반 크리프가 알았다면 곧바로 그에게 밝혔을 터였다. 오랜 시간 알아 와 그 정도의 신뢰는 있었다. 그러니 이 일을 알고 있던 건 전적으로 노바르 로슈만, 저놈 하나뿐이겠지.

리세트의 부탁 때문에 참아 주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궁금했다. 무어라 지껄일지가.

처음에는 안부 인사. 그것도 먹히지 않자 과제. 하찮은 변명거리를 그만 자르기로 한 요한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는 듯한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주인님!”

문이 벌컥 열리는 동시에 하인이 허락도 받지 않고 뛰어들어 왔다.

“마님께서…….”

요한은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한 의자가 넘어가 바닥을 굴렀다.

“사라지셨습니다.”

❖ ❖ ❖

리세트는 창문에 붙어 선 채로 입술만 움직였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게 궁금해? 왜?”

반문하는 목소리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해 리세트가 도리어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궁금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목적지도 모르고 끌려 나온 건데요.”

“말이 좀 심하네. 끌려 나온 게 아니라 구해 준 거지.”

엄한 데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카에덴 델피니움은 혀를 차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저러는 모습마저 요한과 상당히 흡사해 보여 리세트는 세심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초상화로 만난 요한의 아버지는 엄연히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살아 숨 쉬는 사람이 주는 느낌만큼 확실하지는 못했다.

그에 반해 저 남자는 요한보다 눈매가 조금 순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누가 보아도 가족이라는 범주에 묶일 수 있을 정도로 무척 닮아 있었다. 순서를 따지면 요한이 닮은 것이겠지만.

“감사 인사는?”

맡긴 것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 생각에 쐐기를 박듯 리세트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턱 끝을 까딱였다. 어서 말해 보라는 듯이.

“아…… 네. 감사합니다.”

“방금 그 말로 확실해졌어.”

“뭐가요?”

“너는 역시 착하네. 요한은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안 했거든.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리세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쩜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생긴 것만 똑같지 대화를 나눠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물론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속을 모르겠는 미소를 짓는 카에덴 델피니움은 요한과는 다른 의미로 상대하기 어려웠다. 대화 주제가 급변해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창문을 넘어가다니!

예전에도, 공작저를 떠나던 때 한 번 넘어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타인에게 들려 가는 건 엄연히 처음이었다.

‘세상에. 이게 뭐야?’

제어구를 보며 질색하는 표정을 짓던 카에덴 델피니움은 팔로 크게 원을 돌리고 목덜미를 주물렀다. 갑자기 웬 해괴한 짓인가 싶어 지켜만 보았더니 리세트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덥석 안아 올리는 게 아닌가.

‘나도 딱히 이러고 싶지 않아. 솔직한 심정으로는 정말 불쾌하고 싫은데, 아량을 베풀어 지금의 너는 짐 덩어리라고 생각할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마력도 못 쓰니까, 짐이랑 크게 다르지 않잖아. 임신 중이니까 들쳐 멜 수도 없고. 하…… 이게 최선이야.’

마차에 리세트를 태우자마자 그는 찝찝한 얼굴로 윗옷을 벗어 탈탈 털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리세트는 따져 묻지는 않았다. 도움을 받고 있는 건 사실이니.

“꼭 이런 방법밖에는 없는 걸까요?”

리세트는 이미 멀어져 보이지도 않는 공작저의 방향을 살피며 물었다.

“편지라도 쓰고 올 걸 그랬어? 다시 잡혀가고 싶은 거야?”

타당한 말이라는 걸 아는데, 너무 잘 알고 있는데 리세트의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가 않았다. 요한이 채워 둔 제어구가 무척 무겁게 느껴졌다.

“요한이 지금까지 못 만나게 한 거지요?”

“만나러 가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는데 깔끔하게 무시하더라.”

“저를 어떤 방법으로 도와주시게요? 오늘 하루로 끝날 일은 아니잖아요. 꼭 이렇게 도망을 가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마차 소리에 묻혀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을 염려해 리세트는 목청 높여 물어보았다. 귀가 너무 따가워 카에덴 델피니움은 귓불을 힘주어 긁적였다.

“시간은 얼마나 걸려요? 요한이 다시 침실로 돌아오기 전에 끝날 만큼 쉬운 일은 아닌 거지요? 오늘 안에는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와아. 둘이 어떻게 살지?

요한은 어렸을 때부터 조용한 아이였는데, 그 애의 아내라는 사람은 말이 상당히 많은 편인 듯했다. 궁금한 것도 많고, 걱정하는 것도 많고, 하여튼 시끄러웠다.

간지러운 귓바퀴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보고 툭툭 두드려 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얼얼하기만 할 뿐이었다. 뒤를 돌아보고 있는 리세트가 이걸 알 리가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입술을 열었다.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다물고 있을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