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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96)화 (96/151)

96화
이거 좀 열어 봐

침대 머리에 기댄 채로 꾸벅꾸벅 졸던 리세트는 뺨을 문지르는 손길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가물가물한 초점을 잡으려 눈살을 구기자 요한의 얼굴이 보였다.

“리세트, 졸려?”

“아니.”

“더 자.”

“아니야. 잠 다 깼어.”

새벽녘에 잠을 설친 탓인지 눈가를 비벼 보고 뺨을 꾹 눌러 문질러 보아도 정신이 조금 멍했다.

쏟아지는 잠기운을 몰아내는 건 의외로 쉬웠다. 어디선가 역한 냄새가 풍겨 와 리세트는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폭 덮어 버렸다. 협탁에 올려놓은 접시가 냄새의 근원지였다.

겸사겸사 잘된 일이었다. 보아하니 요한은 씻고 나온 것 같고, 아직 씻지 못한 얼굴을 보여 주는 게 왠지 조금 부끄러웠다. 이미 할 거 다 한 사이에 가지기에는 다소 황당한 생각이지만 리세트는 그랬다.

아직도 음식 냄새가 맡아져 리세트는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모로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빛 한 줄기가 눈가에 스며들었다.

눈을 가늘게 찌푸리는 사이에 무언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옅은 미소를 띤 요한의 얼굴이었다.

“……왜 들어와?”

“들어오면, 안 돼?”

당황한 리세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물렸지만 그조차 요한의 손에 잡혀 저지당했다. 웃고 있는 얼굴이 즐거워 보여 리세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트반과 나눈 비밀을 털어놓고 난 시점부터 묘하게 요한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듯 보였는데, 요 며칠은 기분이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았다. 은근히 좋아 보일 때도 있고. 웃음은 너무 많아 무서울 지경이고.

완전히 이불 속으로 들어온 요한은 리세트 곁에 가까이 몸을 붙여 허리에 팔을 둘렀다. 살며시 눈을 감는 요한의 얼굴은 평온한 잠에 빠져드는 사람처럼 보였다.

“요한, 잘 거야?”

“네가 자면.”

“안 잘 거라니까?”

“그럼 여기로 왜 들어왔어?”

음식 냄새. 아직 씻지 않아서.

이유는 곧바로 떠올랐지만 리세트가 말을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음…… 그냥?”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는 날에는 요한의 걱정이 말도 못 할 정도로 유난스러워졌다. 옆에서 지켜보기 민망할 정도로. 제 아이라는 걸 안 뒤로는 이 모든 게 아이 탓인 것처럼 여기는 듯해 입덧 얘기를 하기가 꺼려졌다.

씻지 못해 부끄럽다는 건…… 이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명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굳이 말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리세트가 고심하는 동안 요한은 조심스럽게 더 몸을 당겨 완전히 제 품에 밀착시켰다. 당황스러워하던 리세트는 못 이긴 척 요한의 등을 끌어안았다.

요한은 이제 둘이 있을 때만큼은 제어구를 채우지 않았다. 덕분에 자유로워진 손으로 리세트는 가만가만 요한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요한. 나 뭐 물어봐도 돼?”

“뭔데?”

“이번 임무 말이야. 원래 네가 가려고 했던 거.”

“응.”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던 요한이 눈을 떠 리세트를 보았다.

“많이 위험한 거야?”

리세트가 묻는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어 요한은 대답해 주고 싶지가 않아졌다. 걱정하고 있겠지. 아트반 크리프를.

“왜?”

“궁금해서.”

“조사를 나가는 것뿐이야. 위험한 일은 아니고.”

리세트는 메이의 말과 방학 중 요한에게 끊임없이 찾아오던 귀족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바뀐 책임자가 아트반인 걸 보면 요한의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닌 듯했다.

“떠나기 전에 널 보러 온다고 했다며.”

심각해져 가는 리세트의 표정을 본 요한은 무감한 어투로 말했다.

“응. 보고 바로 출발한다고 했어.”

“심각한 일이 아니니까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요한은 구겨져 있는 리세트의 미간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손을 대는 대로 착실하게 반듯해져 가는 얼굴이 그를 웃게 했다.

이불을 한쪽으로 걷어 낸 요한은 협탁에 치워 두었던 제어구를 찾아 쥐었다. 얼마간 그를 쏘아보던 리세트는 잔뜩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손을 건넸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천천히 그의 손가락을 엮자 리세트의 뾰족한 눈매가 더욱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뼈가 도드라져 보이는 손목 부분에 입 맞춘 요한은 제어구를 채웠다.

“요즘 나 모르게 어딜 그렇게 가?”

요한이 침실 문 앞까지 걸어가는 동안 손목을 팔랑팔랑 흔들어 화가 났다는 걸 보여 주던 리세트가 불쑥 물었다.

“비밀.”

뒤를 돌아 리세트를 본 요한의 입술에 미소가 담겼다.

“곧 알게 돼.”

❖ ❖ ❖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햇살이 비추어 드는 복도에 맑게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응접실에 가까워질수록 또렷해졌다.

응접실로 들어선 요한은 조금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멀리서 들었을 때는 감미로웠던 노래가 지금은 소음처럼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 이 응접실 안에는 빼곡하게 새장이 진열되어 있으니까.

“어떠신가요?”

상기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이 새들을 준비했을 사육사 한 명과 집사가 보였다. 한쪽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열렬한 시선을, 다른 쪽은 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집사가 후자였다.

“한번 이쪽을 먼저 봐 주시겠습니까?”

사육사는 소파의 오른쪽에 놓여 있는 새장으로 요한을 안내했다.

처음에 소개하는 것이니 당연히 제일 자신 있는 걸 보여 주리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이 사육사는 예상 밖의 행동을 보였다.

“아주 아름답지요?”

아름답기는 하다. 너무 커서 문제이지. 심지어 이 새는 노래를 하지 않는 종이었다.

요한이 원한 건 작고, 예쁘고,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였지 이런 커다랗기만 한 화려한 공작새가 아니었다.

말없이 새와 눈을 맞추고만 있자 사육자는 그걸 무언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새장을 톡톡 두드렸다. 마치 신호를 주듯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공작의 꼬리가 넓게 펼쳐졌다.

아름답기는 했다.

크고, 화려하고, 정신이 사나울 정도라 그저 지켜만 보았다.

이곳으로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리세트에게 무엇을 제일 먼저 보여 줄까 들떴던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요한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새장을 눈짓하며 몸을 돌렸다. 헐레벌떡 따라붙은 사육사가 먼저 그가 시선을 보낸 새장으로 다가가 섰다.

처음부터 눈길을 사로잡은 새였다.

새하얀 털을 가진 새. 고개를 까딱이다 그를 보고 맑게 지저귀기 시작한 그 새가 포로롱 날아올라 새장을 돌아다녔다.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들뜬 목소리로 설명을 하던 사육사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요한의 입술에 미소가 번졌을 무렵에 한 하녀가 조용히 들어와 고했다.

“주인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로슈만 경께서 오셨습니다.”

❖ ❖ ❖

얼굴을 씻은 리세트는 흘깃 시선을 내려 잠옷을 보았다. 손이 자유롭지 않아 불편한 자세로 씻다 보니 물방울 자국이 앞섶에 얼룩덜룩 남아 있었다.

최대한 요한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날이 인내심이 사라져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제는 침대 기둥에 한쪽 제어구를 묶어 두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리세트는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은 수건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욕실을 나서는 발걸음은 마치 마음을 대변하듯 쿵쿵쿵, 큰 소리가 되어 울렸다.

협탁에는 릴프랑 약초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침대에 털썩 누우며 리세트는 약초를 한 움큼 집었다. 잎사귀를 뜯어 먹고 꼭꼭 씹어 삼켰다. 입 속에 번지는 쓴맛이 혀를 마비시켰는지 이제는 무감한 얼굴로 그냥 턱만 움직였다.

약초를 다 먹은 후에야 리세트는 으으으, 참지 못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베개 밑을 뒤적이는 손길이 분주했다.

숨겨 놓은 디저트용 포크를 찾아낸 리세트는 제어구의 구멍에 날카로운 살을 맞춰 보았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포크를 쥔 손가락만 벌겋게 변할 뿐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아, 정말!”

구멍에 쑤셔 넣듯 포크를 꾹 누르다 그만 손에 닿는 부분이 휘어 버리자 리세트는 분을 못 참고 포크를 집어 던졌다. 해결책을 찾은 것 같아 기뻐하던 마음이 큰 만큼 짜증스러웠다. 감정이 급변하는 제 모습이 적응되지 않아 리세트는 잠시 멍해졌다.

씩씩거리며 나동그라진 포크를 노려보다 슬금슬금 다가가 침대 밑에 숨겼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야 이편이 조금은 낫겠지.

기억하는 마법식이라도 전개해 보려고 했는데…….

요한이 자리를 비우는 빈도가 늘어나 꽤 좋은 기회였지만 실행에 옮길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족쇄나 다름없는 이 제어구를 풀지 못한다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침실에 갇히게 된 첫날부터 요한은 미쳤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지만 나날이 더 미쳐 가는 듯했다.

제대로 말을 하고 웃고 있었지만 머리의 어느 부분이 단단히 미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안아 주는 품도,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손가락의 느낌도, 입술의 감촉과 체온도. 모든 게 그대로인데 눈동자만 달랐다.

상냥하게 웃는 모습이 무서울 수도 있다는 걸 리세트는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매사에 잘 웃는 사람이라도 잠시는 미소가 지워질 때가 있지 않은가. 하물며 요한은 잘 웃는 편도 아닌데 요즘은 입가에 늘 미소를 달고 다녔다. 언제나 리세트에게는 지어 주는 미소였지만 계속, 잠시도 쉬지 않고 웃기만 하는 건 조금 다른 종류의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다.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걸 알게 된 후부터 리세트는 절대로 아기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노바르 로슈만도, 카에덴 델피니움도. 연구 얘기는 특히나 금기로 다루었다.

자극하지 말자. 꼬투리 잡힐 행동을 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했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시간을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한숨을 길게 내쉬는 소리에 톡톡, 경쾌하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섞여 든 건 그 무렵이었다. 리세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급히 돌렸다.

“……어?”

찾아올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이야.

“나왔어. 오랜만이야.”

카에덴 델피니움이 생긋 웃으며 손끝으로 창문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걸쇠가 있는 방향이었다. 안에서 풀어 주지 않으면 침실로는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그 걸쇠.

“이거 좀 열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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