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보물이라며
델피니움 공작과 마주 앉게 된 건축가는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살펴보았다.
공작이 요구한 몇 가지 사항은 간결했다.
최대한 빨리. 아름답게. 크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듣기만 해도 가슴이 떨려 오는 말이 아닌가.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건축가가 열렬하게 감탄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는 동안 요한은 창가 근처에 둔 소파에 앉아 설계도를 보고 있었다.
크고 작은 논의를 하기 위해 만든 회의용 응접실과 달리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접객용 응접실의 창가에서는 분홍색 장미로 꾸며진 정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두었지만 꽃향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가오는 계절을 이기지 못해 꽃은 다 시들어 버렸다. 조금 황량하기는 하지만 깔끔하게 정돈해 그리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원을 전체적으로 훑어본 요한의 시선은 다시 손에 들고 있는 설계도로 옮겨졌다.
유리온실을 지으려는 계획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 제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건축가가 일을 맡아 주기로 했고, 오늘은 그가 진행 상황을 알려 주기 위해 설계도를 가지고 공작저를 방문했다.
요한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꼼꼼하게 설계도를 살펴보았다.
돔 형태의 외관은 꽃들의 낙원이라 찬탄받는 크리프 후작저에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고풍스럽고 웅장했다.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킨 후작저의 온실 같은 세월의 멋은 부족할지라도 더 좋은 재료로 튼튼하게 지으면 된다.
크리스털처럼 반짝이는 광택을 자랑하는 유리로 정원을 꾸미기로 했다. 상용화된 지 오래되지 않아 그걸 쓰는 건 공작저의 온실이 현재로서는 유일할 것이라고, 건축가는 환희에 찬 얼굴로 말했다.
진작 이 생각을 했더라면 좋았을걸.
결혼하기 전에 온실을 만들어 선물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 아쉬움의 크기만큼 요한은 집요할 정도로 설계도를 살폈다.
“공작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수정해 보았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요한은 건축가가 설명하는 내용을 주의 깊게 들으며 시선을 움직였다.
지난번 인편을 통해 보내온 설계도는 재료와 외관을 본뜬 스케치 정도가 끝이었는데, 지금 보고 있는 건 내부의 모습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중앙에는 분수대를, 그 곁에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는 장미 넝쿨로 만든 파고라를 둘 계획이었다. 장미로 둘러싸인 그곳을 벗어나면 마치 숲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게 나무를 심어 둘 것이다.
중심에는 장미 정원으로, 그 정원의 바깥 부분은 숲을 옮겨 놓은 것처럼. 숲속의 작은 정원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꾸밀 예정이었다. 요한이 바라는 건 그랬다. 리세트는 그 둘 모두를 좋아하니 적절하게 혼합하는 게 좋겠지.
이처럼 아름다운 유리온실 안에서 작고 예쁜 새들을 키울 것이다. 계절에 상관없이 온실 속에는 싱그러운 꽃들이 언제나 만발하고 아름다운 새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을 거다. 꽃이 시들면 새롭게 피어난 다른 꽃을 심어 두면 된다.
요한은 손끝으로 도면에 담긴 온실의 외곽선을 따라 만져 보았다. 어서 빨리 리세트에게 선물해 주고 싶었다. 영원히 꽃이 지지 않는 그 온실을.
그 속에서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 리세트와 함께. 우리 둘이서.
온실에 둘 장미 품종은 이미 골라 두었다. 정원사가 시간을 조율해 부족한 품종 몇 가지를 더 얻어 오기로 했으니 그쪽은 다 된 거나 다름없었다.
사육사도 근 시일 내 방문하기로 했다. 맑고 고운 소리로 노래하는 작은 새들을 선별해 가져오겠다고, 믿어만 달라며 장담하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과정의 어느 한 곳 모자람 없이 무탈하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요한은 때때로 초조해졌다.
리세트가 아이를 낳기 전에, 그가 그 애를 죽이기 전에 온실이 완성되어야만 한다. 가을로 접어들었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시공에 들어가야 일정을 맞출 수 있을 터였다. 겨울이 오면 작업 속도는 현저히 느려질 테니.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어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차피 가망이 없는 일을 곱씹을 바에 리세트와 같이 온실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듯했다. 설레는 표정을 지을 리세트가 떠오르자 날카로웠던 눈매가 누그러졌다.
요한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만 설계도를 내려놓았다.
딱 한 가지, 유일하게 아쉬움을 남긴 것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어린 리세트가 보물처럼 여기던 꽃을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한 게 아쉬웠다.
리세트와 아카데미에서 재회한 지 일 년이 되던 해, 그동안 묵묵히 꽃을 가져다주기만 하던 요한은 참지 못하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혹시 나한테 주었던 그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꽃을 기억하느냐고.
리세트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르겠어. 나는 그냥 예쁜 건 다 좋아. 길 가다가 주운 건데 넘어져서 꽃이 뭉개졌거든. 버리기는 아쉬워서 제일 멀쩡한 꽃잎을 골라 넣었던 것 같아.’
본인이 모른다니 알아낼 길은 없었다.
그 꽃의 아주 사소한 특징 하나라도 기억나는 게 없는지, 대략적인 크기라도 좋으니 무언가 떠오르는 건 없는지 물었지만 리세트는 해맑게 웃기만 했다.
‘요한, 네가 가져다주는 꽃은 다 예뻐서 좋아. 매일매일 좋아하는 꽃이 바뀌는 것 같아. 그러니까 오늘은 이 장미가 제일 예쁜 거로 할래.’
꽃향기를 맡으려는 듯 리세트가 코를 가까이 대며 말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요한은 그때의 꽃을 찾는 걸 포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에 없던 시련이 찾아왔다.
‘그런데 왜 맨날 분홍색 꽃만 가져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 리세트에게 요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며.’
‘나는 그냥 예쁜 게 좋은 거야. 분홍색이 제일 좋은 건 아닌데?’
‘……뭐?’
리세트는 분홍색 꽃을 좋아한다. 그간 진실처럼 받들던 그 사실이 한순간에 부서지는 말을 내뱉고도 리세트는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억울해진 요한은 따지듯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보물이라며. 도와줘서 고맙다고 너의 보물을 준 거라고 했잖아, 이 거짓말쟁이야.’
거짓말쟁이라는 말에 발끈한 리세트가 버럭 외쳤다.
‘그때는 보물이었어! 제일 예뻤으니까!’
허탈한 마음에 요한은 그다음 날 꽃을 고를 때는 입술을 삐죽이며 정성껏 포장했다.
어지러운 마음과 달리 포장지로 꽃을 감싸는 손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미 체화가 되었다는 걸 문득 깨달아 한숨이 나왔다.
결국 요한은 빨간 장미를 골라 가기로 했다. 어차피 분홍색 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예쁜 꽃을 다양하게 선물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요한은 붉은색 리본으로 포장한 꽃 한 송이를 등 뒤에 숨긴 채 리세트를 찾아갔다. 평소처럼 그는 꽃을 주었고 리세트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런데 어제보다는 밝지 않은 미소였다.
왜 그런가 싶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매일 분홍색 꽃만 봐서 그런가? 왠지 그게 제일 예쁜 것 같아. 이 꽃도 엄청 예쁜데 어제 준 것보다는 조금 덜 예뻐 보여. 신기해.’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다른 꽃을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요한은 다음 날부터 다시 원래 주었던 꽃을 선물했다. 탐스러운 분홍빛 장미꽃을.
미소 짓는 리세트의 얼굴이 떠오르자 요한은 더욱 급해졌다.
“언제쯤이면 시작할 수 있지?”
“가장 빠르게 일정을 잡으면 한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하도록 해.”
“준비가 끝나는 즉시 사람을 보내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공작이 덧붙이는 말은 설레서 난동을 부리는 그의 심장에 불을 붙였다. 돈도 시간도 얼마든지 예산안을 벗어나도 조율해 줄 테니 설계도 그대로 제작하는 것으로 하자고, 책정된 수고비보다 훨씬 많이 쳐주겠다고 했다.
“최선을 다해 빠르게 준비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최고의 고객이었다.
❖ ❖ ❖
수업이 끝나자 동기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노바르의 자리를 에워쌌다. 아직 종소리가 채 멎지 않았는데도 어찌나 발이 빠른지 모른다.
“소식 아는 거 없어?”
노바르는 오늘도 끈질기게 물어보는 동기생들 사이에 갇히게 되었다. 리세트의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해 안달이 난 동기생들이 의외로 많았다.
좋은 관심이든 나쁜 관심이든 달갑지 않아 노바르는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다행히 귀찮게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실습실로 들어선 노바르의 입술 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찾아갈까?
몇 번이고 리세트를 만나러 공작저로 가고 싶었는데 편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아 망설여졌다. 확실한 걸 좋아하는 리세트 성격상 일부러 답장을 안 하지는 않았을 테니 가능성은 두 개로 좁혀진다.
누군가가 편지를 빼돌렸거나 알려진 대로 아프거나.
가능성은 당연히 전자로 기울었다.
멀쩡한 모습으로 악수를 나눈 바로 다음 날 리세트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공작저에 있으니 사라졌다고 표현하기는 좀 애매한 감이 없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아카데미에서는 사라진 게 맞았다. 편지를 빼돌린 누군가는 당연히 공작이겠지.
의자에 앉은 노바르는 힘없는 손으로 가방을 뒤적였다.
찾아가면 어떻게 될까? 공작이 나를 가만두지 않겠지?
리세트는 진실을 밝히겠다고 하였는데, 그다음 날부터 모습을 감추었고 지금까지 연락 한 번 닿지 않는다. 진실을 알게 된 요한 델피니움이 가둬 두고 있는 그림이 가장 현실성 있었다.
마지막에 보았던 리세트의 마력이 잊히질 않아 노바르의 한숨이 깊어지던 때였다. 닫아 놓은 창문이 벌컥 열렸다. 그가 자의로 한 건 아니었으니 누군가 밖에서 연 것이다.
“이대로 내버려 둘 거야?”
혹시나 하였더니 역시나 카에덴 델피니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용기를 쥐어짜 내 연구실로 찾아가 보았지만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던 그 남자였다.
무슨 소리냐고 질문을 하기도 전에 말이 치고 들어왔다.
“리세트 델피니움 말이야. 곧 죽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