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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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해 온 선물을 하나씩 살펴본 리세트가 열렬하게 반응해 주는 덕분에 아트반은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플로 상점 아이스크림 교환권이라니! 이런 것도 있었어?”
역시나 리세트의 관심은 교환권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트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등받이에 조금 더 몸을 밀어 넣었다. 거의 누운 자세로 다리를 꼬아 앉는 모습에서 만족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기간 제한 없으니까 편하게 사용해.”
알맞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아트반은 다시 자세를 반듯하게 고쳐 앉았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아팠다며.”
교환권을 앞뒤로 살펴보던 리세트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은 괜찮아.”
“아닌 것 같은데? 얼굴 보면 거짓말인 게 확실한데?”
아트반은 유심히 리세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명민하게 반짝이던 눈동자가 조금 지친 듯해 보이고 어깨선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표정만 밝았다.
“살은 왜 이리 많이 빠졌어.”
“음식을 잘 못 먹어서 그래.”
“먹고 싶은 건 없어?”
“지금 먹고 있잖아.”
쿠키를 하나 더 집어 든 리세트가 크게 베어 물었다.
“너 설마 그것만 먹어?”
“아니. 초콜릿도 먹어.”
“그게 끝이야?”
“응. 아직은.”
리세트의 말만 들어도 아트반은 대충 요한의 그 예민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저런 것만 먹으니 그렇겠지. 잠깐 보는 그조차 걱정이 되는데 옆에서 내내 붙어 있으려니 분명 죽을 맛일 터였다.
“요한이 다 알게 됐어.”
리세트의 목소리가 오물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해졌다.
“뭘?”
속에 편한 음식 몇 가지를 골라 보느라 아트반이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반문했다.
“요한이 자기 아이라는 걸 알았어.”
“그렇구나.”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던 아트반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뭐?”
“다 알게 됐어. 내 거짓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아트반은 하마터면 찻잔을 놓칠 뻔했다. 다행히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 그가 찻잔을 내려놓는 사이에 리세트는 쿠키를 하나 더 집었다.
“얼마 전에 다 말했어.”
“다?”
“계속 너를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 네가 얼마나, 어디까지 아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사실대로 말했어. 미리 의논하지 못해서 미안해.”
“……걔가 뭐라고 해?”
리세트는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는 쿠키를 이만 접시에 내려놓았다.
“너는 내가 도와 달라고 해서 휘말린 것뿐이잖아. 요한이 아기를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내가 비밀을 끝까지 지켜 달라고 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얘기했어. 미안해.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마지막까지 너한테 제대로 된 상의 없이 내 마음대로 결정해서, 정말 미안해.”
“그게 끝이야? 요한 성격에 그럴 리가 없잖아. 뭐라고 더 말하지는 않았어?”
“너한테 화를 내지 않는 조건으로, 나도 요한이 잘못한 일 하나를 용서해 주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너를 공격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왠지 순순히 만나게 해 주더라니.
셋이 보는 건 자제하는 게 암묵적인 규칙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임무를 위해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되는 터라 요한의 살벌한 눈치를 무릅쓰고 편지를 보냈는데, 의외로 단번에 허락한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내온 게 조금 꺼림칙하던 차였다.
꼬여도 단단히 꼬인 매듭은 풀어 보기도 전에 잘려 나갔구나.
그 똑똑한 요한 델피니움이라면 모든 상황을 다 맞추어 보았을 것이다. 그 싸늘한 눈빛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아트반은 이제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진짜 죽이고 싶겠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
아트반은 새롭게 떠오르는 의문을 잠시 되짚어 보았다. 리세트가 응접실로 오기까지 거의 삼십 분이나 소요되었는데, 추궁하려면 충분한 시간이지 않은가. 그런데 요한은 왜 그냥 갔을까. 상대도 하기 싫다는 걸까?
그건 아닌 듯했다. 그랬다면 이 만남이 성사되었을 리 만무하다.
그 복잡한 속내를 도무지 읽어 낼 수가 없어 아트반이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며. 그게 뭐야?”
리세트가 던진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던 아트반의 미소가 점점 경직되었다. 웃고 있는 표정도, 깜빡이는 속눈썹도 모든 게 부자연스러웠다.
아트반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요한을 향해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었다.
잘 얘기해 보라는 게 이 뜻이었냐?
편지에 분명히 적어 둔 기억이 있다. 임무에 관한 얘기를 리세트에게 미리 좀 전해 달라고, 미안해하거나 놀라지 않게 잘 설명해 달라고 했는데 싹 무시한 모양이었다.
“아트반?”
영문을 모르고 그저 궁금해하는 듯한 부름에 아트반은 다시 한번 속으로 요한 델피니움을 불러 보았다. 이 나쁜 놈아.
“나 사실 요한 대신 임무를 가게 됐거든. 새로운 팀을 꾸려서.”
“뭐어?”
깜짝 놀란 리세트의 비명 같은 외침을 들으며 아트반은 또다시 요한의 이름을 마음속에서나마 씹어 보았다.
이 치사한 놈.
❖ ❖ ❖
술잔을 채워 가져온 아트반은 가운의 매듭을 조금 더 조이며 소파에 늘어지듯 앉았다.
잔에 담긴 얼음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적막한 침실로 번져 나갔다. 으으으, 고민에 젖어 흐느끼는 듯한 신음도 뒤따랐다.
술기운을 빌려 머릿속을 비우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요한의 얼굴은 더욱 또렷해졌다. 공작저를 떠날 때까지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 그 녀석이, 모처럼 본 친구를 죽일 듯이 노려본 그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 모금씩 술을 넘길 때마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했지만 아트반은 내리 석 잔을 비워 냈다. 취기가 적당히 돌기 시작하자 다행히 평소와 같은 긍정적인 면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 거짓말한 거, 나쁜 짓이지.
순순히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요한이 넘어가 준 이유를 아트반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해를 하니 그런 것이라고, 너무 싫고 용서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했어야만 했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아트반은 생각했다.
요한은 맺고 끊는 게 확실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맺는 경우는 아예 없다 보아도 무방하고, 끊어 내기만 하지.
어찌 되었든 요한도 그의 결정을 이해해 넘어가 준 것 같았다. 화가 풀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죽이려고 덤벼들지 않은 걸 보면 이번 임무를 잘 끝마치고 가 용서를 빌면 어떻게든 받아들여 줄 것 같기는 했다.
처음에는 너무 당황해 경황이 없었지만 아트반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소중한 친구들을 두고 저울질하고 더 이상 속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완전히 덜고 임무를 떠날 수 있었다.
무사히 다녀오면, 죽어라 맞아 주고 끝내면 되겠지. 어쩌면 아기에게 정신이 팔려 분노 같은 건 완전히 잊었을 수도. 그렇다면 더 좋고.
어마어마한 거짓말의 규모치고는 초라하고 원만한 마무리인 건 확실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가늘게 뜬 눈을 들어 집사는 입꼬리가 찢어질 듯 웃고 있는 아트반을 쳐다보았다. 꽤나 불순한 시선이었다.
“안 좋겠어?”
“누가 보면 크리프 가문의 후계자가 태어나는 줄 알겠습니다. 주인님 얼굴만 보면 마치 제 자식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뭐, 내 아이?”
아트반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집사를 노려보았다. 간신히 수렁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인생을 망칠 일이 있나.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요한이 나를 가만둘 것 같아?”
“……제 말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그래.”
설렁설렁 대답하는 아트반의 태도에 집사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후작께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공작저에서는 머지않아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겠군요.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분발 좀 해 보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후작은 선선히 수긍했다.
“리세트를 닮으면 엄청 예쁘겠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요한만 안 닮으면 되거든.”
전혀 말의 속내를 읽어 내지 못하는 후작을 향해 집사는 생긋 미소 지어 보였다.
“후작저에는 언제쯤 그날이 올까요?”
“글쎄. 뭐, 언젠가?”
집사는 저려 오는 뒷덜미를 주무르며 고개를 조금 뒤로 젖혔다.
후작께서는 연애 한 번 하지 않으셨다. 저 잘난 얼굴과 꽤 쓸 만한 몸, 후작이라는 지위와 가문의 배경을 등에 업고도 그 흔한 염문설 한 번 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혹시나 하였다. 여자에게는 관심이 동하지 않으시는 건가?
그건 또 아니었다. 언젠가 확답을 받기 위해 넌지시 물었다가 따갑게 눈총을 받은 적도 있었다.
‘미쳤어? 제정신이야?’
그 반응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델피니움 공작 부인을 좋아한 건 아니었을까?
과거를 회상하던 그의 안색이 먹구름 낀 하늘처럼 변했다. 후작께서 지금까지 붙어 다니는 유일한 두 사람. 요한 델피니움. 리세트 델피니움. 그중 단연코 공작 부인과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낙제생이 된 날에는 신이 나 외치기도 했다.
‘나 리세트랑 같은 수업을 듣게 됐어. 이런 거 보면 낙제도 꽤 할 만한데?’
어지간히 정신이 나간 자가 아니면 절대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하지는 못했겠지.
뒷덜미 잡을 만한 말을 서슴없이 한 어린 후작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랑했으면 낙제를 하는 게 아니라 쟁취했어야지!
“뭐야, 그 눈?”
못마땅한 듯 구겨진 후작의 눈매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주인님. 혹시 델피니움 공작 부인을 좋아하셨습니까?”
참지 못한 질문을 한 그는 후작의 입술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미쳤어?”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 어떤 미친놈이 사랑했던 여자의 아이를 위해 선물을 갖다 바쳐? 심지어 그렇게 정성껏? 정말, 미쳤어?”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썩 안심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금방 안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리세트를 좋아했다고 치자. 그럼 가만히 뺏기고 있었을 것 같아?”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후작의 얼굴에 산뜻한 미소가 올라왔다.
“죽을힘을 다해서 뺏었을 거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술김에 한 말이니 더 진심이지 않을까? 취중 진담이라고들 하지.
잠시 든 의문을 완전히 지운 그는 재빠르게 달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는 후작의 머리를 받아 들었다.
해롱거리며 활짝 웃고 있는 후작의 모습은 얄미울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그 단꿈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는 흐트러진 후작의 몸을 반듯하게 소파에 누였다.
지난 몇 달간 웃어도 제대로 웃는 것 같지 않았던 후작께서 골머리 앓던 일이 해결된 듯 보여 그 또한 기뻤다.
아름다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