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이상해
며칠간 내리던 비가 그치고 나자 여름의 기운은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덧 가을이 느껴지는 바람이 불어왔다.
아트반은 흐뭇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인들이 저마다 상자를 들고 마차로 운반하고 있었다. 리세트와 아기에게 줄 선물이었다.
리세트의 취향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 선물을 고르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오롯이 리세트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다. 아기용품이야 여기저기서 밀고 들어올 테니 리세트 한 사람만을 위한 선물.
옷과 보석이야 많이 가지고 있을 테지만 일부러 사 모았다. 요한은 리세트가 좋다고 하는 것만 모아 두는 경향이 있어 생각 외로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았다. 다양성을 채워 주는 일은 아트반이 어렸을 때부터 도맡아 온 것이었다.
보석은 유사시를 대비해 금고에 쌓아 두어도 좋으니 아주 적절한 선물인 듯했다.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책도 종류별로 구해 왔다. 최근에는 특히나 추리 소설이 각광을 받는다고 했다. 먼저 읽어 보고 적절히 검수를 해 리세트가 읽어도 괜찮다는 판단이 든 것들만 따로 골랐다. 생각보다 잔인한 장면이 많아 미리 읽어 보길 잘한 것 같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가장 마지막. 아마 이런 선물을 준비한 건 그뿐일 것이다.
이플로 상점의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 있는 교환권을 스무 개 준비했다. 원래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지만 상점의 주인을 직접 찾아가 부탁한 일이었다. 바닐라 맛을 좋아하는 누군가도 잠시 떠올랐지만 최근에는 날을 세우고 있으니 일부러 만들지 않았다.
아트반은 이 선물이 꽤나 흡족했다.
리세트가 원한다면 제 목숨조차 기꺼이 선물로 갖다 바칠 요한이지만, 그 녀석은 이런 파격적인 발상을 할 사람이 못 되었다. 아주 정석적이시지.
뭐…… 다른 쪽으로는 파격적이긴 하시지만.
전쟁터에서 상관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으니 제 일을 빠르게 마무리 짓고 리세트에게 달려간다던가, 리세트가 보지 않는 곳에서 그 애를 헐뜯고 괴롭힌 애들을 찾아가 아무도 모르게 처리한다던가, 다른 남자의 아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는 여러모로 파격 그 자체였다.
리세트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그 대단한 집념은 언제 보아도 무섭기 그지없었다. 연적으로 만나지 않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연적은 무슨. 같은 편이라 망정이지.
어느 한 곳에 미쳐 있는 사람만큼 이 세상에 무서운 게 없다. 그런 녀석을 친구로 두어 다행이라고, 적으로 만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아트반은 거듭 생각했다.
최근 리세트가 포도만 먹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어 그와 관련된 간식도 조금 사 모으려다 포기했다. 요한 델피니움이 어련히 알아서 갖다 바치고 있을 터이니.
문제는 태어날 아기의 선물이었다.
취향도 성별도 생김새도 모르는 아기.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서 더욱 고민이 되었다.
남자아이에게는 파란 옷을, 여자아이에게는 노란 옷을 선물하는 게 관례처럼 자리 잡고 있었지만 아트반은 굳이 그걸 따를 마음은 없었다. 진부하고 재미가 없어서. 이왕이면 특별한 물건을 선물해 주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몇 날 며칠 요한의 심술, 그러니까 요한이 떠넘기는 일을 처리하면서도 종종 아트반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마침내 찾아냈다.
아트반이 선택한 건 이번에도 책이었다. 공작저의 서재에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읽을 만한 책이 한 권도 없다는 걸 문득 기억해 낸 덕분이었다.
처음 놀러 갔을 때 많이 놀랐지.
학업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건 어렸을 때부터 인정하는 바였지만 공작저의 서재에 들어가 책장을 확인했을 때는 자신이 정말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요한은 그 어려운 책을 모두 다 읽었다고 했다. 다행히 똑똑한 리세트도 어려워해 외롭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하여튼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것만 읽으면 요한처럼 따분한 어른으로 자라날 수도 있지 않은가. 의외로 교육관 문제로 두 사람이 충돌할 가능성도 있고.
아트반은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아이들이 즐겨 읽는다는 책을 수십 권 준비했다. 어서 빨리 리세트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플로 상점의 교환권을 보면 요한이 꽤나 속 쓰려 하겠지?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을 듯이 웃던 아트반의 눈썹이 살며시 구겨졌다.
리세트가 몸이 안 좋아 쉬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래서 휴학까지 했다고 했지.
사흘 전 요한이 보낸 편지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팠다는 걸 모를 만큼 그동안 많이 바빴던 것도 사실이지만 두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게 못내 속상했다.
그 편지 덕분에 그간 요한이 보인 이상한 반응도 이해가 되었다. 일은 그럭저럭 처리했지만 밖으로 통 나오질 않았다. 귀족들의 원성을 사면서까지 꿋꿋이 버텨 온갖 질타를 받아도 공작저에서만 업무를 보았다.
아트반은 그만 몸을 돌려 세웠다.
리세트가 회복했으니 만나러 오라고, 편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러니 빨리 가 확인해 봐야지.
지난번처럼 상태가 심각한 건 아닌지, 아기는 잘 자라고 있는지, 요한에게는 언제까지 숨길 작정인지. 물어볼 것이 많았다.
❖ ❖ ❖
응접실로 들어선 아트반의 움직임을 멎게 한 건 요한의 차가운 눈빛이었다. 아트반은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바로 걸음을 멈추었다.
저 눈, 왜 저러지?
요한이 인사도 않고 바라만 보아 아트반도 그냥 멀뚱히 쳐다만 보았다.
먼저 시선을 돌린 요한은 짧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까딱였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대하는 태도치고 상당히 불량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걱정스러워 묻는 말에도 요한은 간결한 답변만 내놓았다.
“아무것도.”
“뭐? 아무것도?”
의도적으로 길게 말을 늘여 한 자 한 자 느릿하게 힘주어 말한 아트반은 성큼 걸어가 요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빼 드는 움직임이 거칠었다.
보란 듯이 털썩 소리 내 앉은 아트반은 다리를 꼬며 팔짱도 꼈다. 그러고 나서는 턱 끝을 조금 까딱여 보았다. 마치 아까의 요한처럼, 복수심을 담아서.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델피니움 공?”
요한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래 보아야 아트반에게는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옛날 옛적부터 보아 와 대수롭지도 않았다.
“저는 아주 잘 지냈습니다. 아주. 아주 잘 지냈지요. 임무를 떠날 준비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안부 인사 한 번 안 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한 번은 나를 찾아올 줄 알았거든요. 친구가 혼자 험지로 간다는데 걱정도 안 되시나 봅니다?”
빠르게 말을 쏟아 낸 아트반의 입술 새로 조금 거친 숨결이 삐져나왔다.
고맙다는 말을 바라고 임무를 선택한 건 아니었지만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처음 응접실에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리세트가 많이 아팠다고 하니 요한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잘 알아 위로를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저거. 저 사나운 눈빛이 그만 예의와 이성을 날려 버렸다.
하지만 말을 다 끝내고 나니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트반은 팔짱을 풀며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너는…….”
조용하게 흘러나온 요한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트반은 더 해 보라는 듯이 눈짓했다.
“아니야.”
한참 침묵하던 요한이 내놓은 그 싱거운 말에 아트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이는 얼굴인데, 게다가 말을 꺼냈는데 그냥 지나치다니.
“아트반 크리프. 네가 리세트에게 잘 얘기해. 그럼 이 문제는 여기서 넘어가 줄 테니까.”
“뭘?”
“곧 올 거야. 기다려.”
붙잡을 새도 없이 요한이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리세트가 많이 아팠던 거야?”
아트반은 차를 준비해 온 로드니를 본 즉시 물었다. 애매한 미소만 흘릴 뿐 로드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나 아팠으면 쟤 분위기가 저래?”
“주인님의 분위기요?”
“어. 나를 거의 죽일 듯이 노려보던데?”
이것도 나름 순화한 말이었다.
평소에도 요한은 쌀쌀맞은 태도로 그를 대했지만 은근히 챙겨 주는 편이었다.
오늘처럼 차갑기만 하고 눈동자 속에 칼날을 품은 것 같은 그 얼굴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에게 도망 온 리세트가 발각되었을 때. 딱 그때뿐이었다.
어디 칼날뿐인가. 눈을 보면 거의 맹수가 달려들 것만 같은 분위기였지.
“마님께서 그간 많이 아프셔서 주인님께서 예민해지신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도 대충 그럴 거라고 짐작하고 있기는 했어. 그런데 좀 이상하네.”
그걸 고스란히 드러내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본래 요한은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었고, 드러낸다 해도 이런 방식으로 상대에게 혼란을 주면서 예의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트반의 시선은 집사가 가져다준 찻잔을 지나 비스듬히 올라갔다.
집사의 얼굴은 피곤에 찌든 모양새였다. 그러고 보니 요한의 얼굴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꼿꼿한 자세며 간결한 몸동작이며 그가 익히 알아 온 모습과 똑같았지만 피곤에 잠식당한 얼굴까지 가려 주지는 못했다.
리세트가 심각할 정도로 아팠던 건가?
걱정이 커져 갈 무렵에 문이 열렸다. 아프다고 했던, 그런데 지금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리세트가 사뿐히 걸어 들어왔다.
“아트반, 왔어?”
아팠다는 사람 얼굴이 요한과 로드니의 얼굴보다도 훨씬 상태가 나아 보였다.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안 좋은 것은 아니니 아트반은 그쯤에서 인사를 받아 주었다.
“오랜만이야, 리세트.”
아트반은 리세트 뒤에 바짝 붙어 들어올 요한을 노려보기 위해 눈을 치켜떴다. 세모꼴로 찢어진 듯한 눈초리로 리세트의 뒤를 살폈다. 그런데 들어오라는 요한의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고 하녀 두 명이 따라 들어왔다.
“많이 기다린 건 아니지?”
맞은편에 앉은 리세트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물었다.
따듯한 차와 간식이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에 빠져들어 갔다.
기다려 보아도 요한은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