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네가 포기해
요한은 희미한 열감이 묻어나는 뺨에 입 맞춘 후 몸을 세웠다.
부탁이라…….
오늘은 왜 이리 순순한가 하였더니.
이 순간을 위한 발판일 뿐이었다 해도 너무나 달콤한 시간이었다. 그 일면에 애정과 관심이 있었다는 걸 안다. 목적이 있더라도 리세트는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꾸며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요한은 고민에 잠긴 채로 리세트의 얼굴을 응시했다. 무구한 눈빛도, 느릿하게 깜빡거리는 속눈썹도 예뻤다.
“요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붉은 입술도 앙증맞았다. 살며시 손을 잡는 가는 손가락 또한 그러했다. 그 입술이 말하는 부탁이라는 건 듣지 않아도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노바르 로슈만. 카에덴 델피니움.
그들 중 하나겠지.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더군다나 리세트가 수도 없이 말한 그 연구라는 걸 더 진행하게 할 생각 따윈 조금도 들지 않았다. 헛되이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몸에도 악영향을 끼칠 테지.
요한은 깊이 리세트를 당겨 안으며 몸을 누였다. 바르작거리는 고개를 어깨로 끌어당겨 결박하듯 품속에 가두었다.
“선대 공작 부인들이 죽지 않은 이유를 알려 줄까?”
느릿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침실을 채운 금색 불빛처럼 감미로웠다.
“가주들이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오래도록 그런 짓을 한 거야. 아내가 아파하든 사경을 헤매든 상관없었겠지. 그들한테는 강한 힘을 계승한 후계자를 얻는 게 가장 중요했을 테니까. 가문을 위해서.”
비전 마법서를 보고 난 후에 느낀 감상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이기심.
달리 그 마법진을 더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이기적인 행태였다. 가문의 번영을 위해.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고작 델피니움이라는 이름 하나 지키려고 이런 짓을 수 대에 걸쳐 이루어 왔다. 오래오래 아내의 몸과 생명을, 한정된 마력을 그 통로로 삼아.
긴 시간 마력을 축적해 후대에 전달하는 게 여러모로 이롭다. 요한의 경우가 특이한 축에 속했다. 아버지는 형제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마력의 양만큼을 하루빨리 채워 그에게 주고 싶어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숙원 사업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와 노아는 물론 자신의 생명까지 제물로 바쳤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겹고도 끔찍한 집념이었다.
겨우 그따위의 이유로, 아내와 자식을 죽이다니.
자식의 손에 가족의 피를 묻히다니.
머릿속을 잠식해 가는 증오심을 감추기 위해 요한은 미소를 띤 얼굴로 다시 한번 입 맞추었다. 발그레한 두 뺨과 입술에, 맥박이 느껴지는 가느다란 목덜미에.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문득 의문이 찾아온 건 그 무렵부터였다.
어떻게, 리세트가 아이를 갖게 된 걸까.
이 문제를 지금껏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후계자를 가지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일은 아이를 잉태할 여자의 마력을 억누르는 것. 하지만 요한은 리세트의 몸을 통해 억지로 마력을 주입한 적도, 마법진을 새겨 넣은 적도 없었다. 아이가 생길 수 없는 조건이었다.
강력한 마력을 얻는 대신 이런 인위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으면 델피니움가는 아이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요한이 손을 쓰지 않고도 리세트는 아이를 가졌다. 보편적인 방식으로,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마력을 전해 줄 통로로 쓸 마법진이 없어 아이는 리세트의 마력을 먹고 자라났다. 얼마 전에야 요한이 직접 마법진을 새겼다지만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건 변함없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깊어지는 탓에 점점 구겨지던 미간이 일순간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 문제가 그리 중요한 건가?
이미 일은 벌어졌고 무탈하게 수습하는 게 우선이었다. 요한은 잠시 든 의문을 그만 놓았다.
델피니움의 가주들이 후계자에 목숨을 걸 정도로 일생을 바쳐 노력했지만 그는 달랐다. 가족 같은 거, 만들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을 더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리세트가 주는 행복만으로도 벅차고 버거웠다. 그 이상 지켜야 할 무언가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후계자?
필요 없다.
원한 적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지금도, 이 생이 끝날 때까지도 리세트 한 사람뿐이었다. 그 마음은 죽어서도 변하지 않을 터였다.
“그 미친 사람들한테는 가문을 계승하는 게 가장 중요했겠지만, 나는 아니야.”
요한은 가만히 안겨만 있는 리세트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달래듯이, 이제는 그만하라는 마음을 담아 오래도록.
“나한테 너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세상에 없어. 만약 너를 죽일 그 애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해도, 그게 너를 해치는 길이라면 내가 먼저 죽여.”
어떻게든 포기시킨다.
요한에게는 이제 단 하나의 목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걸 위해서라면 그 끔찍한 비전 마법의 일부분을 기꺼이 알려 줄 수 있었다.
“지금은 내 마력을 먹고 자라지만 태어나서는 너의 생명을 갉아먹는 거야. 네가 죽을 때까지, 계속 이 짓을 반복해야 돼. 지금 네가 느끼는 고통은 아이가 커 갈수록 그것에 비례해 늘어날 거야. 결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요한은 팔에서 살며시 힘을 풀며 시선을 내렸다. 이야기를 해 주었음에도 리세트의 얼굴은 처음과 똑같이 그저 담담해 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맞닿아 오는 시선 또한 여느 때처럼 맑기만 했다.
조그맣게 벌어지는 입술에 요한의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알고 있어.”
담담하게 내뱉는 그 한 마디가 요한을 미치게 만들었다.
“알고 있다고?”
“네가 지난번에 얘기했잖아. 나, 그걸 다 감수할 수 있어. 어려운 일이라는 거 알아.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하지만 요한, 태어나기 전에 안타깝게 죽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 태어난 아이를 죽여? 그것도 우리 아이를?”
네 몸에 해가 되지만 않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다는 말을, 요한은 가까스로 삼켜 냈다. 리세트의 마력에 묶여 있는 채로 아이를 죽이면 결과를 장담할 수가 없다. 이 시간을 견디며 지켜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리세트.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나더러 네가 어떻게 할지 뻔히 알면서 얌전히 지켜만 보라는 소리야?”
“그래.”
“나는 못 해.”
“나는 해. 해야만 돼.”
“노바르와 델피니움 연구원께 한 번만 부탁을 해 보면…….”
“또 그 두 사람 얘기야?”
예상에 벗어나지 않는 이름들의 등장에 요한의 평정심이 흔들렸다. 도대체 무슨 말로 이 고집스러운 리세트를 꼬여 낸 것인지 묻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잖아.”
“아니, 리세트. 그런 건 없어.”
리세트가 품은 헛된 희망을 잘라 낼 요량으로 요한은 더욱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니 제발, 네가 포기해.”
❖ ❖ ❖
요한이 이상해졌다. 비가 쏟아져 내린 날부터 쭉 이상했다. 단단한 껍질 속에 들어간 것처럼 침묵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졌다.
침실 안의 분위기는 고요했다. 리세트가 손에 든 포도잼 쿠키를 오도독 씹어 먹는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리세트는 허벅지에 올려 둔 접시 위에서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괜히 소리가 날 것 같아 깨 먹지 않고 조금씩 녹여 먹었다.
요한은 창가 근처의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이따금 시선을 들 때도 리세트를 보는 게 아니라 창밖에 드넓게 펼쳐진 하늘을 보았다. 늘 자신에게 향하던 파란색 눈동자가 멀어지니 리세트는 조금 속상한 마음이 들었지만 고개를 털어 지워 냈다.
한가하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마력을 받아들이는 건 조금씩 익숙해져 이제는 기절할 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쓰러져 잠든 시간보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시간이 아주 근소한 차이로 길어졌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물어보아도 요한은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다. 시계까지 치워 버린 터라 시간 개념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요한이 필사적으로 시간을 잊어버리려는 사람처럼 굴어 리세트는 무엇 하나 편하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배가 조금 당기는 듯해 리세트는 한 입 남은 쿠키를 그만 접시에 내려놓았다.
비전 마법의 일면을 알게 되어 궁금증은 조금이나마 해소되었지만 리세트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대강 짐작하던 것을 막상 확인하게 되자 기쁜 것보다 머릿속이 얼얼했다.
만들어진 사람.
요한은 자신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철저한 계획하에 최상의 환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더 캐물어 볼 수가 없었다.
우리 아기는 어떻게 생긴 건지,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리세트는 지쳐 보이는 요한의 등을 감싸 안는 것으로 조용히 궁금증을 덮었다.
끝까지 숨기고 싶었을 비밀을 말한 것이니 여기서 더 상처를 파헤치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그날 밝힌 것까지가 요한의 최선이겠지.
요한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물어보지 말라던 카에덴 델피니움이 불현듯 떠올랐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상태를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죄인도 아니고 계속 침실에 갇혀 있는 것도 곤혹스럽고, 무엇보다 요한의 얼굴에 나날이 그늘져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나 답답해.”
그리 큰 소리로 말한 건 아니지만 요한은 서류를 내려놓고 리세트를 보았다.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해?”
리세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다가온 요한은 한 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몸을 숙였다.
가까워진 눈동자는 리세트가 알고 있는 그 빛을 띠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욱 표정의 변화가 도드라져 보였다. 무감하면서도 언뜻 보면 냉정해 보이는 얼굴은 리세트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만날 사람이 있어.”
뜬금없는 말에 리세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날 사람?”
요한은 머리를 묶은 리본을 만지던 손으로 리세트의 손목을 쥐었다. 여전히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시선을 둔 상태로, 요한의 손만 부드럽게 움직였다.
무게감이 있던 손목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어 리세트는 곧바로 고개를 틀었다. 제어구가 풀려 있었다.
“아…….”
작게 터트린 탄식 같은 한숨은 요한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인사처럼 건네는 짧은 입맞춤은 머지않아 끝이 났다.
“만날 사람이 누군데?”
리세트는 조금 가빠진 숨과 함께 말을 뱉었다.
“아트반 크리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