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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91)화 (91/151)

91화
조금 더 가까이

함께 씻으려고 했지만 리세트가 너무 힘들다고 해 요한은 혼자 욕실로 들어왔다.

우선 몸이 견딜 수 있을 만한 온도로 목욕물을 맞추었다. 조금 뜨거웠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밖에서 맞은 빗물의 기운은 다행히 금방 가셨다.

욕실 내부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요한은 이만하면 되었다는 판단이 섰을 무렵에 욕조에서 나왔다.

가운을 걸치고 문을 여는 요한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머리카락에는 물기가 남아 있어 조금씩 물방울이 떨어졌다.

리세트를 본 순간 입술에 서서히 미소가 그려졌다. 요한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리세트를 지켜보았다. 골똘히 집중하는 얼굴로 무얼 하나 했더니 리세트는 제어구를 빤히 쳐다보다가 문질러도 보고 눈썹을 와락 구겼다.

저런 걸 하게 해 미안했다.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요한은 다시 한번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리세트를 자유롭게 해 주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하지만, 함께 있을 때는 풀어 주어도 되지 않을까.

“리세트, 많이 답답해?”

미소를 띤 얼굴로 침대가에 다가서던 요한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황급히 이불 밑으로 손을 감추는 리세트는 생긋 웃어 보였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요한은 침대에 걸터앉아 한 손을 내밀었다.

“왜?”

반문하는 리세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요한은 물러나지 않았다. 요즘 리세트의 속내를 도통 읽어 낼 수가 없으니 이럴 때일수록 반응 하나하나를 놓쳐서는 안 된다.

조금 더 기다려 보아도 리세트는 손을 건네지 않았다. 이불 밑에서 꼼지락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요한은 직접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리세트의 손을 끄집어냈다. 얼마간 얼굴을 구기면서까지 반항하던 리세트는 한숨을 내쉬며 포기를 선언했다.

붉은 멍이 든 손목을 내려다보는 요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옷 아래로 드러난 새하얀 손목을 쥔 손에 차츰 힘이 실리다 스르르 풀렸다.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도망가려던 건 아니야.”

체념 어린 리세트의 목소리가 불편한 침묵의 끝을 알렸다.

“이건 뭔데?”

“몸이 너무 아파서 릴프랑 약초를 먹으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바닥으로 떨어졌어. 주우려고 발버둥 쳐도 제어구가 묶여 있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네 곁에 약병 두고 갔어.”

“그거 다 먹었는데도 아파서 먹으려고 한 거야. 너무 아팠어. 너무.”

강조하듯 한 자 한 자 끊어 말하는 목소리는 사뭇 엄중하게 느껴졌다. 쏘아보는 눈빛 또한 매서웠다. 그 때문에 생긴 상처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건 아니지만 말의 요지는 분명히 전해졌다. 너 때문이라고.

요한은 리세트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쓸어 보고, 리세트는 요한의 얼굴을 뚫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길게 한숨을 흘린 리세트가 툭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그런데 너, 왜 이렇게 뜨거워?”

리세트는 놀란 듯이 눈을 깜빡거리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차근차근 만져 보았다.

그 움직임을 따라 제어구가 찰그랑찰그랑, 흔들리는 소리가 점차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살며시 그의 목을 감싸자 소란이 잦아들었다.

“얼굴은 새빨갛고 이마는 뜨거워. 가만 보니까 목도 빨개.”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엿보이는 눈동자가 그를 가득 담았다. 싱그러운 초록색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요한은 잘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래?”

“엄청 뜨거워, 바보야! 그러게 비는 왜 맞고 다니는 거야?”

어깨를 찰싹 때리는 손에서는 그리 강한 힘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시 조심스럽게 이마를 만져 보고 손등으로는 목을 쓸어 보고, 다정한 손길이 뺨을 감쌌을 때 요한은 리세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감기 걸린 거 아니야?”

바로 손을 떼어 낼 것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막상 리세트가 손을 쳐 내자 마음이 쓰렸다.

한쪽 입꼬리를 조금 당겨 올려 웃던 요한의 뺨이 주욱 늘어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리세트가 그의 뺨을 꼬집어 잡아당겼다.

“뭐 하는 거야?”

어눌해진 목소리로 반문한 요한은 뺨에 닿은 손길을 따라 하듯 리세트의 뺨을 감싸 쥐었지만 손에는 전혀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살며시 문지르기만 했다.

“오늘 나한테 마력을 줄 수는 있겠어?”

“……뭐?”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 듯해 요한의 손이 움찔 떨렸다.

“너 아프면 조금 쉬어야 할 것 아니야.”

“안 아파.”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황당해 잠시 말을 잊은 사이에 리세트의 손길이 떠나갔다.

리세트는 살며시 몸을 틀어 그의 손에서 멀어졌다. 고심하듯 그를 보다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가 그리고 다시 리세트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오늘도 할 거지?”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아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요한.”

물을 마시고 소매로 입가를 훔치고, 빈 잔을 건넨 리세트는 준비가 다 되었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갑자기 팔을 벌렸다.

“무서우니까 안아 줘.”

지금껏 숱하게 마력을 주었지만 단 한 번도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 말의 뜻을 가늠해 보던 요한의 품으로 리세트가 폭 안겨 왔다. 양 손목이 제어구에 묶인 상태라 모든 동작이 어설펐지만 뻣뻣하게 굳은 등줄기를 훑어 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리세트의 손은 따스했고 제어구는 차가웠다. 얇은 가운을 입고 있는 터라 그 차이가 더욱 선명하게 전해졌다.

“매번 내 몸을 짓누르면서 마력을 주잖아. 아픈 것도 아픈 건데, 그럴 때마다 네가 너무 무서워.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렇게 안고서 마력을 줘.”

“……그래.”

“그럼 어서 시작해.”

그토록 다정한 목소리로 잔인한 부탁을 하는 리세트가 무서웠다.

요한은 침대에 내려놓고만 있던 손을 들어 살며시 리세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여름의 끝 무렵에서 시드는 꽃처럼 리세트의 몸은 나날이 메말라 가는 듯했다.

평소에는 이 시간이 되면 요한도 리세트도 따로 말을 나누지 않았다. 지하실을 다녀온 뒤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일이었다. 서로 지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고정한 채로 요한은 마력을 쏟아 냈고, 리세트는 꿋꿋하게 견딘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포도가 먹고 싶지는 않아?”

뜬금없이 흘러나온 말에 리세트는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모르겠어. 갑자기 그건 왜? 먹고 싶다고 하면 가져다주려고?”

“궁금해서. 먹고 싶다고 하면 가져올게.”

여느 때처럼 리세트의 몸을 타고 올라가는 대신 요한은 마른 어깨를 쓰다듬으며 오랫동안 말을 붙였고 리세트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알겠어. 나중에 다른 말 하지 마. 새벽에라도 깨우면 일어나서 가져다줘.”

이제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이제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날 거야.”

잔인한 거짓말이었다.

침대를 휘돌던 요한의 마력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다. 눈에 띄게 굳어지는 몸을 힘주어 안으며 요한은 질끈 눈을 감았다.

“괜찮아?”

절대로 괜찮지 않을 걸 알면서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답하기 힘든지 리세트는 고개를 작게 끄덕여 주었다.

지독하게 길고 긴 시간이 지나가자 경직되어 있던 리세트의 몸이 허물어졌다. 지쳐 늘어지는 몸을 당겨 안으며 요한은 떨리는 숨결을 가다듬었다.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 주자 리세트가 스르륵 눈을 떠 그를 보았다.

요한은 경련이 이는 리세트의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자도 돼.”

“잠이 안 와.”

깜빡거리는 속눈썹이 도통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요한은 다시 손을 거두어들였다. 열이 오른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요한은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리세트의 몸을 누여 주었다. 여전히 거칠고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오는 입술이 마치 피가 맺힌 것처럼 붉었다. 요한은 그 입술을 문질러 본 후 침대를 벗어났다.

욕실로 들어가기 전에 요한은 직접 불을 피워 촛대를 밝혔다. 마력으로 피워 낸 것이 아닌 금색 불빛이 방 안을 따스하게 밝혔다. 그 빛이 리세트에게까지 닿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몸을 돌렸다. 미지근한 물을 받고 수건을 챙겨 왔다.

그 잠깐 사이에 열이 조금 식었는지 빨갛기만 하던 리세트의 뺨은 분홍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몸을 닦아 주는 내내 리세트는 가만히 누워 손길을 받아들였다.

따스한 빛이 감도는 침실은 포근한 침묵에 잠겼다.

리세트는 팔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가 않아 몸을 조금씩 비틀어 보았다. 그걸 불편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팔을 닦아 주던 요한의 손이 멈추었다.

“왜 그래, 리세트?”

“가까이 와 봐.”

요한이 순순히 고개를 내렸지만 아직 부족했다.

“조금 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요한의 이마에 리세트는 살짝 제 이마를 가져다 대려고 했다. 그저 열이 나나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힘이 잘 조절되지 않아 들이받아 버렸다. 얼얼한 이마를 문지를 수도 없어 울상이 되자 요한은 픽 웃음 지었다.

“이렇게?”

요한은 이마를 마주 댄 채로 머물러 주었다. 머리카락이 닿는 느낌이 간지러워 리세트는 콧잔등을 찡그리다 웃어 버렸다.

“감기에 걸린 건 아닌 것 같네. 다행이다.”

리세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장난을 쳤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마냥 이 분위기를 즐길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신중해졌다. 이제는 날카롭지 않은 요한의 눈매를 보고 조금 용기를 얻었다.

“내가 싫지 않아?”

요한이 불쑥 질문을 꺼내는 바람에 리세트는 입술을 도로 다물었다.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할까.

속으로 몇 가지 고민을 해 보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싫었다. 제어구를 채울 때까지, 더 거슬러 올라가 지하실로 끌려갈 때만 하더라도 요한의 독단적인 행동에 화가 났고 싫었다.

“싫지는 않은데 조금 미워.”

지금으로서 해 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대답이었다.

“요한.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망설이는 표정을 짓는 요한을 보며 리세트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부탁 들어주면 네가 조금 덜 미워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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