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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90)화 (90/151)

90화
비와 눈물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리세트는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바위에 짓눌린 듯 무거웠다. 누군가 자신을 안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요한은 숨을 못 쉴 정도로 끌어안지는 않으니까.

비가 내리는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조금씩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다.

리세트는 한 팔로 침대를 짚어 간신히 상체를 세웠다. 겨우 그 움직임만으로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침대 바로 옆에 자리한 협탁 위에 놓인 물잔을 잡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제어구가 묶인 손이었다. 리세트는 기둥에 묶여 있는 제어구의 다른 한쪽을 조금 멍한 얼굴로 응시했다.

구속 제어구를 처음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머리에 열이 올라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노가 당황스러운 감정으로 덮인 건 순식간이었다. 제어구가 채워지지 않은 손목을 절대 내어 주지 않으려고 등 뒤로 감추었는데 요한은 그런 건 개의치도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제 손목에 제어구를 채웠다.

이게 뭐 좋은 거라고 나누어 낀단 말인가.

기가 막혀 화를 낼 의지도 모조리 사라진 날이었다.

미소 지으며 제어구를 찬 손목을 흔들어 보여 주는 요한에게 리세트는 무어라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무서웠다. 듣고 싶지 않았다.

리세트는 자유로운 손으로 물잔을 쥐었다. 머리맡에 놓인 약병을 열고 단번에 쓴 약을 먹은 후 급하게 물을 삼켰다. 입가에 흐른 물기를 닦는 동작은 거칠었다.

확실히 릴프랑 약초는 효과가 있었다.

요한의 마력을 받아들이게 된 날부터는 더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다. 몸 안에 날뛰는 마력이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때면 자연스럽게 약병을 찾게 되었다. 약을 마시면 혀는 괴로워도 몸의 회복이 빨라졌다.

눈으로 직접 지켜본 덕분인지 요한도 이제는 별말 않고 약을 구해다 주었다.

리세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을 조이는 듯한 느낌이 옅어졌다. 상체에, 특히 배 주변에 뭉쳐 있던 마력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어제보다도 농도가 짙은 마력은 강하게 리세트를 압박해 왔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리세트는 이를 꽉 깨물며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제 것처럼 움직여 주지 않는 손에 스친 릴프랑 약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힘껏 팔을 뻗어 보았지만 반대편 손목이 침대 기둥에 묶여 있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마님, 무슨 일이세요?”

문밖에서 하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릴프랑 약초가 떨어질 때 유리잔도 같이 떨어졌는지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조각난 유리 파편도 드문드문 보였다.

“제가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아무리 목에 힘을 주어도 갈라진 숨소리만 빠져나와 리세트는 옆에 있는 빈 약병을 바닥으로 던졌다. 밖에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여러 논의가 오가다 결국 하녀 한 명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님!”

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내뱉는 리세트를 본 그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왔다.

“저…… 저 약초 좀 나한테 줘. 빨리.”

“약초요?”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릴프랑 약초를 주워 건넸다. 리세트는 물에 젖은 잎사귀부터 뜯어 삼켰다. 몸이 너무 아파 이 쓰디쓴 맛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몸을 불태우려는 것처럼 날뛰던 마력이 완전히 소강상태가 되자 한결 숨 쉬는 게 편안해졌다. 리세트는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는 하녀에게 어서 나가 보라는 듯 눈짓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하녀가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바닥을 치우고 물러가자 침실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빗소리마저 없었다면 의식을 잡지 못했을 거다.

아픔이 옅어지니 생각을 할 만한 여력이 생겼다.

모처럼 제정신을 차린 리세트는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노바르와 만든 마법식을 다 기억하고 있어 마력만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다면 실험이라도 해 볼 수 있을 텐데. 제어구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대로 침실에 계속 갇혀 있게 되면 노바르를 만날 수가 없었다. 문득 카에덴 델피니움, 그 남자 떠오른 건 그 무렵이었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도와준다고 했지. 오랜 시간 실험을 거듭해 위험 부담도 적다고 했고.

하지만 요한이 그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보아하니 그 이름만 들어도 지겨운 듯한 얼굴이 되어 버리는 걸 보면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그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는 전혀 아쉽지 않았다. 요한이 설마, 감금까지 감행할 정도로 일을 벌일 줄은 몰랐으니. 상황이 이 지경까지 흐르고 나서야 미련이 생겼다.

잘 설득하면 될 줄 알았다. 요한이 그토록 아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 때문이었으니 그 마음을 이해한다고, 그러니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고 차근차근 설명하려고 했지만 카에덴 델피니움이 다 망쳐 버렸다.

다소 멍했던 리세트의 눈동자에 차가운 날이 섰다.

설마……. 일부러 그런 건가?

기분 나쁘게 실실 웃던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라 울화가 치밀었다.

그의 제안을 거절했으니 먼저 선수를 친 게 확실하다. 도서관까지 찾아와 꽃을 주고 이상한 편지까지 준 사람치고 포기가 빠르다 싶었는데 그새 다른 계획을 세운 모양이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겠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놀아난 듯해 리세트는 기가 막혀 탄식했다.

짜증 나는 사람인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조금 안심은 되었다.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그 정도의 집착을 보이는 사람이니 무슨 수를 써서도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어떻게든 찾아낼 것이라는 예감이.

부디 눈치가 없어 보이는 그 남자가 요한에게만은 상처 주지 않기를 바랐다. 리세트는 입 안에 남은 떫고 쓴 맛에 눈살을 찌푸렸다. 물을 급하게 마신 탓에 기침이 새어 나왔다.

콜록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제어구가 묶인 손목이 아려 왔지만 그조차도 잠기운에 가려져 차츰 희미해졌다.

❖ ❖ ❖

“주, 주인님!”

집사의 비명 같은 외침이 저택으로 들어선 요한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지?”

요한은 달려온 그에게 물으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주인님께서 비를 맞으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뭐?”

다급하게 뛰어가던 두 다리가 우뚝 멈추었다. 리세트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집사가 그토록 당황스러워했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기에 걸리시면 어떡하시려고요. 일단 몸부터 녹이셔야겠습니다.”

요한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집사의 얼굴에 자리한 주름이 깊어져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편했다. 다정한 눈을 계속 보고 있어 더욱 그러했다.

“어서 목욕물을 받으라고 하겠습니다.”

“로드니.”

급히 내려가려는 집사를 불러 세웠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시선을 마주한 끝에 요한은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알아서 씻을 테니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전 요한은 문득 집사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염려하는 듯한 눈빛이 익숙했다.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던 것이었다.

“고마워.”

속삭이듯 말을 전한 요한은 계단을 올라갔다.

눈두덩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괜스레 손등으로 쓸어 보고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야는 흐릿해져만 갔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로 침실의 문을 열자 드디어 리세트의 얼굴이 보였다.

요한은 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가 침대에 다다른 탓인지 리세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잠이 들어 순한 얼굴을 요한은 오래도록 지켜보기만 했다.

이상한 하루였다.

갑자기 비가 내렸고 참을 수 없는 공허감이 밀려들었다.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불안에 떨었다.

만약 그때, 그 어린 날에 너에게 진실을 얘기해 주었다면 달랐을까?

어쩌면 네가 일찍 나를 떠나갔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불안하게 고동치기 시작했지만 한 번 시작한 상상은 끝을 모르고 달려갔다.

미치도록 후회가 되었다.

마음이 깊어지기 전에 차라리 전부 말해 줄 걸 그랬다. 그 후의 일은 오롯이 리세트의 선택에 달렸겠지. 그를 괴물 보듯 피한다고 해도 기꺼이 감내해 내야만 하는 문제였다. 마땅히 그래야 했다. 과거의 친구로 남는 게 더 옳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깊어진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리세트만 원했다.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을 사랑하고 여전히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리세트에게 차마 진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다.

두려웠다. 버려질까 봐, 네가 나를 보며 괴물이라고 할까 봐.

머리카락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스며들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는 점차 늘어났다. 옷을 흠뻑 적신 빗물이 바닥에 흥건하게 고일 때까지 요한은 가만히 그 자리에, 리세트의 얼굴을 보며 머물렀다.

차가워 뻣뻣하게 굳은 손은 리세트의 뺨을 매만져 보듯 주변을 배회했다. 스르륵 눈을 뜬 리세트는 얼마간 눈을 끔뻑거리다 응석을 부리듯 그의 손에 뺨을 비볐다. 손끝에 번지는 온기는 선명했다.

“비를 왜 맞았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요한은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씻고 왔어.”

그가 생각해도 형편없는 핑계였다.

“옷을 입고 씻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속아 주지.”

조금 느릿한 목소리였지만 핀잔하는 듯한 기색이 묻어났다. 뺨에 닿아 있던 손을 억지로 거두어들이는 그를 보는 눈망울이 맑게 빛나는 듯했다.

“요한. 머리 숙여 봐.”

“……물 떨어져.”

“얼른.”

거부하지 못할 명령에 요한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바보같이 설레고 마는 모습이 한심한데, 리세트의 손길이 부드럽게 머리를 만져 주자 불안했던 마음이 빠르게 진정되었다.

“차가워.”

리세트는 요한의 머리카락을 만지다 문득 깨달았다. 얼굴에 떨어지는 물방울의 온도가 다르다는 걸. 요한의 뺨을 만져 보려고 손을 내렸을 때는 이미 입술이 삼켜진 후였다.

눈물의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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