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기적이라 불리는 소녀
수도로 돌아와서는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보냈다.
제일 먼저 작위 수여식을, 그 후에는 귀족원 회의에 참석하고 가신들의 도움을 받아 알아듣기에도 버거운 의제를 해결해야 했다. 낮의 시간에는 아카데미를, 틈이 생길 때마다 가문의 일을 돌보고 주말에는 회의에 참석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를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의례적인 인사와 미소, 그 끝에는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다. 딱히 별다른 감상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요한도 이 세계의 일원으로 녹아들었으니까.
이물감이 느껴지는 눈을 질끈 내리감은 요한은 아카데미의 정문 앞에서 마차를 돌려보냈다. 마차의 바퀴 소리조차 신경줄을 갉아먹는 듯해 피곤했다.
사람으로 붐비는 교정이었지만 요한은 그 누구와도 스치지 않고 전투 계열의 건물로 향할 수 있었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가 가는 길을 터 주었다. 요한은 떠들썩한 강의실의 뒷문을 소리 없이 열고 들어왔다.
“끔찍하지 않아? 살인자 주제에 공작위까지 승계받았잖아. 소름 돋아.”
말을 하던 동기생은 뒤늦게 그를 발견하고 사색이 된 얼굴로 달아났다. 그래 보아야 같은 강의실이었지만. 그가 자리로 가 앉자 삽시간에 강의실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던 요한은 더는 견딜 수가 없어 강의실을 나갔다.
수업이 곧 시작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히고 답답했다. 뒤에서도, 앞에서도 질리도록 들은 그 말이 다 무어라고 정신이 황폐해졌다.
꼭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 애가 떠올랐다. 리세트 하리펜. 그러고 보니 아직 빚을 다 청산한 건 아니지 않나. 뭐든 원하는 걸 주겠다 하였는데. 소란스럽던 머릿속은 그 이름으로 채워지면 금세 안정을 되찾곤 했다.
그래서 요한은 더욱 그 이름에 매달렸다.
강의실 건물의 뒤편은 도피처로 쓰기 적당한 것 같았다. 요한은 어제 찾은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나무둥치에 등을 기댔다. 시끄러운 소음에서 벗어나자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얼마간 청량한 바람의 소리만 스치던 귓가에 사박사박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자리를 잘못 찾은 듯싶었다.
지친 한숨을 삼켜 내며 요한이 막 눈을 떴을 때였다.
햇살 아래에 선 자그마한 여자애가 보였다. 바람이 흩트려 놓은 가는 은발은 마치 꼭 날개 같았다. 천사의 날개. 그런 것이 실존한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다소 우스운 생각이었지만 그런 걸 자각할 여유는 없었다.
“안녕!”
바람이 싣고 온 목소리가 맑았다.
꿈이라고, 이건 꿈일 수밖에 없다고 요한은 생각했다.
웃음소리가 가까워졌다. 리세트 하리펜이 그에게 달려왔다.
처음 보았을 때와 무척이나 다른 모습이었지만 요한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해진 옷 대신 아카데미의 교복을 입고 있어도, 부스스한 모양새로 엉킨 머리카락이 아니어도 저 애는 리세트 하리펜이 아닌 다른 누구일 수가 없으니까.
만약 이 모든 감각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 ❖ ❖
리세트 하리펜은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요한도 다른 사람들이 가진 그 견해에 진심으로 동감했다. 그에게도 기적이나 다름없으므로.
리세트가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하는 덕분에 요한에게는 잠시도 떨어지지 않아도 되는 구실이 생긴 셈이었다. 같이 자고 일어나는 일상은 그에게 큰 위안과 따스함을 가져다주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잘 준비를 마쳤다. 선생님들의 감시가 느슨해지는 틈을 타 요한은 리세트의 방으로 향하곤 했다. 리세트는 이른 밤에도 늦은 밤에도 언제나 깨어 있었다.
“네 눈은 어쩜 그렇게 예쁠까?”
손을 잡은 채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리세트가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꼭 밤하늘 같아. 작은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밤하늘.”
요한에게 짙은 파란색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낙인이자 더러움의 상징이었지만 리세트와 함께 보는 밤하늘은 마치 꼭 다른 세상에 펼쳐진 아름다운 색채 같았다. 리세트가 예쁘다고 하면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좋았다.
리세트는 예쁜 게 좋다고 하니까. 그런데 나더러 예쁘다고 하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던 얼굴을 조금 덜 미워하게 되었다.
리세트가 눈물을 흘릴 때면 마음이 아팠고 웃는 걸 보면 행복했다.
저 미소를 지켜 주고 싶었다. 이대로, 내 곁에서 웃을 수 있도록.
리세트 주변에는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트반 크리프. 귀찮은 녀석이었다.
셀번 밀란과 케서린 로티. 늘 열심히, 배운 대로 성실하게 수업에 참여하는 리세트이니 선생님들의 관심이 기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노바르 로슈만. 어딘가로 당장 치워 버리고 싶은 거슬리는 놈.
리세트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 사실이 요한의 목을 조여 왔다. 비단 자신의 눈에만 그렇게 비치지는 않을 테니까. 모두가 리세트를 사랑스럽다는 듯 보게 될 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리세트가 있어야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는 나는, 티 하나 없는 애정을 그 애에게 퍼부어 주는 사람들에게 빼앗기게 되면?
불안하고 초조해질 때마다 요한은 꽃을 찾게 되었다. 리세트가 보물처럼 여기던 분홍색 꽃잎을 가진 탐스러운 꽃을 찾아 매일 품에 안겨 주었다.
이 정도면 좋아해 주려나.
꽃을 고를 때면 설레었고 리세트가 그걸 받고 웃어 주면 행복감마저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행복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이나.
행복한 시간이 쌓여 갈수록 요한의 마음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리세트도 언젠가는 소문을 듣게 될 터였다. 그러면 물어보겠지. 진실이냐고.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무서웠다.
친구…….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함께하는 이름이라며 리세트가 진지하게 말해 주었던 날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변치 않을 믿음을 드러내는 눈망울까지도.
괜찮을 것 같다고, 진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리세트가 그를 버리지는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때마침 리세트가 자신의 강의실 건물로 찾아오라고도 말했다.
그때부터 요한은 계획을 세우며 시험 날만을 기다렸다. 공부에 매진하는 리세트 곁에서, 그저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털어놓고 나면 어떨까. 홀가분할까, 아니면 후회하게 될까.
막상 시험 날이 되자 또다시 마음이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답안지에 이름만 쓴 채로 시험지를 펼쳐 보지도 않던 요한은 소란스러움을 잠재우듯 답안지를 급히 제출하고 강의실을 나갔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시험 결과 발표 날이 되었다. 수석 자리에 적힌 리세트의 이름을 보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리세트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도망가는 걸 보았지만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왜 그러는지 대충 알 것 같으니까.
그만큼이나 리세트도 오늘을 기다렸다는 걸 확인받은 듯해 요한은 기뻤다.
어서 빨리 수업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초조한 시선은 자꾸 시계 주변만 맴돌았다. 유독 초침이 느리게 움직이는 듯해 고장이 난 건가 싶어 다른 강의실까지 가서 확인했지만, 안타깝게도 아주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계를 보고, 수업을 흘려듣고, 출석을 부르는 목소리에 적당히 손을 드는 사이에도 요한의 눈길은 온종일 시계를 떠나가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 수업까지 얌전히 기다리지 못한 요한은 건물 밖으로 나와 리세트가 찾아오는 숲 길목으로 향했다.
앉았다가 다시 일어서고, 나무 주변을 하염없이 서성거렸다.
다행히 시계가 보이지 않으니 조금은 초조함이 가셨다. 아주 조금이지만.
교복 재킷을 벗어 잔디밭에 툭 놓은 요한은 그 위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속으로 초를 세며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 시선을 돌리기를 한참. 마침내 종이 울리자 요한은 벌떡 일어나 재킷을 주워 들었다. 달려 나가는 두 다리에 점차 속도가 붙었다.
학부생들이 그를 발견해 길을 터 주는 것보다 요한이 그들을 피해 가는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설레던 마음은 치유 계열의 건물로 들어간 순간에 다 지워져 버렸다. 건물 입구까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세트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요한은 어떠한 표정도 담지 못한 얼굴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입구로 들어와 오른쪽 복도의 맨 끝 강의실. 리세트의 설명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목소리를 따라가면 되었다.
요한은 벽에 기대선 채로 강의실의 유리창 너머를 살폈다. 책상을 밟고 넘어가는 리세트가 보였다. 동기생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리세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시는 그런 소리 입 밖에 내지 마! 내가 너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리세트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녀석이 몸부림을 쳐 벗어나 리세트의 리본을 틀어쥐었다. 당장이라도 들어가 놈의 손을 떼어 내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요한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살인자를 살인자라고 부르는 게 뭐가 나빠? 그런 짓을 저지른 놈이 잘못한 거지. 이래서 근본이 없는 것들을 아카데미에 들여서는 안 되는 거야. 앞뒤 분간을 못 하잖아!”
악에 받쳐 소리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을 때가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고, 요한은 생각했다. 귀를 틀어막고 외면했어야 했다.
“요한은 살인자가 아니야!”
제 몸보다 훨씬 큰 녀석에게 리세트는 맹렬하게 되쏘았다.
“뭐, 뭐라는 거야. 이거 안 놔? 미쳤어?”
“네가 봤어?”
리세트의 손은 제 리본을 움켜쥔 녀석의 머리카락을 다시 확 잡아당겼다. 당황해 허둥거리는 놈의 몸이 기울어졌고 리세트는 재빠르게 손을 놓아 멀찍이 떨어졌다.
“보지 못했으면 함부로 말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너에게 평생 지켜야 할 비밀이 생겼구나.
순수한 믿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요한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말하면 안 되는 거야.
그걸 깨닫자 비로소 몸이 움직였다. 다리가 엇갈려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요한은 잠시도 멈추어 서지 않고 달렸다. 도망갔다.
괴물. 살인자.
타인의 목소리로 들은 그 말이 리세트의 목소리로 되살아났다. 당연하다는 듯 걸음이 멈춘 곳은 리세트와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난, 그의 유일한 휴식처가 된 숲의 길목이었다.
다시 찾아가야 한다고, 리세트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요한은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푸르렀던 하늘에 서서히 노을빛이 감돌기 시작했지만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도,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매일같이 이곳으로 오던 리세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요한은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