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88)화 (88/151)

88화
가장 소중한 것

“도와주시면 제가 가진 거 다 드릴게요. 전부요.”

허겁지겁 허리춤을 뒤적인 여자애가 낡은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저한테 제일 소중한 거예요.”

간절한 목소리와 얼굴 때문에 도저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숲은 최근 고블린의 서식지로 급부상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 들어갔다면 필시 죽었겠지. 하지만 이미 죽었을 거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제, 제 이름은 리세트 하리펜이에요. 도와주시면 제 이름을 걸고 뭐든 다 해 드릴게요.”

대답하지 않는 그가 금방이라도 떠나갈 것이라 여겼는지 그 여자애, 리세트 하리펜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찢어지고 갈라진 손끝이 거칠었다. 조막만 한 손인데 악력은 꽤 셌다.

얼마간 더 바라보기만 하자 맑은 눈망울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 눈물이 눈시울을 적시기 전 요한은 상처투성이인 손을 와락 움켜쥐며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감사합니다!”

제법 눈치가 있는지 리세트 하리펜은 그의 옆에 꼭 붙어 손으로 방향을 지시했다. 잘 걸어가던 그 애의 걸음이 우뚝 멈추자 요한도 덩달아 멈추어 섰다.

“사람을 찾으려면 큰 소리로 떠들어야 하잖아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려야 하니까요.”

“그런데?”

“숨어 있던 괴물들이 튀어나오면 어떡해요?”

불안한 듯 꼼지락거리는 손을 짧게 살핀 요한은 담담한 말로 걱정을 지워 주었다.

“상관없어. 죽이면 되니까.”

“하지만 혼자서는 위험하잖아요.”

“괜찮으니까 빨리 찾아.”

걱정을 떨치지 못했는지 리세트 하리펜은 그를 살피다가 다시 숲을 둘러보고, 그리고 다시 그를 보았다. 맑은 눈동자가 가득 그의 모습이 담겼을 때였다.

“엄마! 아빠!”

방금까지 걱정한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숲에 잠들어 있는 몬스터들까지 죄다 깨울 작정인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다. 처음에 고블린이 출몰했을 때는 기절할 듯 놀라더니 이제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부모님을 부르짖었다.

요한은 달려드는 고블린들이 근처에 오기도 전에 태워 없앴다. 감탄하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 애의 눈동자가 그를 당혹스럽게 했다.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꽤나 자신감이 넘치던 목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엉망으로 갈라졌다. 눈물을 참는 목소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실은 건 그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물까지는 보고 싶지 않아서. 더더욱 그 눈물의 이유가 가족이라면.

“엄마! 아빠! 어디 있어요?”

줄을 그어 둔 나무 기둥을 하나씩 찾아 나가며 그 애는 목청 높여 소리쳤다.

나무에 새긴 마지막 표식이라며 리세트 하리펜은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멈추어 섰다. 울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라는 걸 안 직후로 한 번도 그 애를 보지 않았던 요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역시. 울고 있었다.

소리라도 내었으면 싶을 정도로 아랫입술을 짓씹은 채로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닦아 주려고 뻗었던 손길이 멈춘 건 수풀 사이로 보이는 사람의 형체를 발견했을 때였다.

‘우리 엄마는 나랑 똑같이 생겼어요. 아빠는 갈색 머리예요. 눈은 구름 없는 하늘처럼 새파래요. 키도 크고 덩치도 엄청 커요.’

하필 그 애가 말한 인상착의와 흡사했다. 죽었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눈앞에서 그들을 발견하자 요한은 잠시 사고가 굳어 버렸다.

쓰러진 여자는 은발. 그 옆에 쓰러져 있는 남자는 갈색 머리.

둘 모두 눈을 뜬 채로 숨이 끊어진 듯 보였다.

제 손을 간절하게 붙잡은 여자애와 닮은 그 눈을 본 요한은 무심코 리세트 하리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 애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려고 해서,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벌어진 일이었다.

위로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리세트 하리펜은 품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아 냈다. 그 순간에도 옷이 젖어 들 뿐,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요한은 넋이 나간 리세트 하리펜을 업고 마차로 돌아왔다. 인근 마을로 향하던 길의 중간 지점쯤에서 드디어 그 애의 입술이 열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두 손을 마주 잡아 무릎 위에 올려 둔 리세트 하리펜의 입술에는 미소가 담겼는데, 눈은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었다. 요한은 그 눈을 잘 알고 있었다. 요즘 그가 거울을 볼 때마다 목격하는 눈과 다를 바 없었으니.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간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입술을 막고 싶었다. 무엇을 물어본들 제대로 된 답을 해 줄 수 없을 것 같아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요한은 이번에도 자신을 향한 무구한 신뢰가 담긴 눈을 외면하지 못했다.

“뭔데?”

“괴물한테 잡아먹힌 사람은 평생 지옥을 떠돈다고 들었어요. 사실이에요?”

몬스터들을 둘러싼 해괴한 소문 몇 가지가 떠올랐다. 저 애가 물어보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아니.”

“정말요?”

“그래. 아니야.”

겨우 그 대답이 무어라고 리세트 하리펜의 눈동자를 채웠던 눈물의 기운이 잦아들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죽어서야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눈물을 그쳐 준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어…… 도련님, 정말 감사해요.”

가지런히 무릎 위에 포개어 놓은 손이 꼬물거렸다. 흙이 묻어 꼬질꼬질한 얼굴에는 진심 어린 미소가 담겼다. 그 모든 걸 살펴 나간 요한의 눈길은 다시 티 없이 맑은 초록색 눈동자를 향했다.

“요한 델피니움.”

“네?”

“내 이름이야.”

“어…… 네.”

평민이 귀족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겠지. 당연한 일이고, 딱히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요한은 굳이 이름을 알려 주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에는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몇 살이야?”

“열 살이요.”

“뭐, 열 살?”

아픈 노아의 키와 별반 차이가 없어 기껏해야 여덟 살쯤으로 짐작하고 있던 터라 꽤나 놀라웠다. 반문하던 목소리에서 그런 속마음을 읽었는지 리세트 하리펜은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아빠를 닮아서 키가 나중에 큰다고 했어요. 지금은 작지만 엄청 커질 거예요.”

“……엄마를 닮았다며?”

“생긴 것만요. 키는 아빠를 닮았대요.”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 사이로 낭랑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꼬박꼬박 경어를 쓰던 리세트 하리펜은 어느새 편하게 말을 놓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뭐 그리 할 말이 많은가 싶을 정도로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이따금 창밖을 살펴보는 시선이 너무도 슬퍼 보여 요한은 문득 깨달았다. 그 애 나름의 방식으로 슬픔을 참고, 이겨 내고 있다는 걸.

마차가 멈춰 서자 리세트 하리펜은 주머니를 건넸다. 낡은 옷감으로 만든 갈색 주머니. 도와 달라고 했을 때 제 전부를 주겠다는 약속의 증표로 삼은 것이었다.

보물이라 하였지.

“나한테는 필요 없는 거야. 너 가져.”

“다 준다고 약속했잖아. 이제 이건 내 것이 아니야.”

고개를 젓는 동작이 단호했다. 양손을 모아 주머니를 든 리세트 하리펜은 그의 눈앞으로 팔을 쭉 뻗었다. 받아 주지 않으면 가지 않을 것처럼 굴어 이상하게 가만히 지켜보게 되었다.

저 애는 갈 곳이 없다. 수도로 함께 간다면…….

아직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세트 하리펜은 그의 옆에 주머니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조심히 가, 요한. 정말 고마웠어.”

안녕을 고하듯 두 손을 번쩍 들어 머리 위에서 흔드는 그 애의 모습은 서서히 길의 저편으로 멀어져 갔지만 요한은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유리창에 비치는 건 바라만 보아도 소름이 끼치는 제 모습뿐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보일 무렵 요한은 다급하게 그 애가 놓고 간 주머니의 매듭을 끌렀다. 보물처럼 여기던 것치고 작고 볼품없는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주조한 것인지도 몰라볼 정도로 빛이 바랜 동전. 꼬깃꼬깃 접어 둔 종이. 모양이 특이한 돌멩이 여러 개. 그리고…… 분홍색 꽃잎.

차례대로 스쳐 간 손길은 꽃잎에 오래도록 닿아 있었다. 원래부터 이런 감촉이었나 싶게 보드라웠다. 마치 뺨을 스치던 그 애의 머리카락처럼.

“도련님.”

때마침 리세트 하리펜을 고아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온 마부는 난처한 얼굴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가 챙겨 준, 돈이 가득 담긴 주머니였다.

“이걸, 왜?”

“받으라고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는데 결국 주지 못했습니다. 하도 강경하게 버텨서 당해 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요한은 그만하면 되었다는 듯 눈짓하며 고개를 돌렸다. 마차는 이제 그가 원래 가야 할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리세트 하리펜이 놓고 간 것과 달리 무겁기만 한 주머니를 쥔 손에 서서히 힘이 실렸다.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 그 얼굴이 떠올랐다. 소리 죽여 울음을 참아 내던 그 얼굴이.

“다시 숲으로 가.”

마부는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하면서도 능숙하게 말의 고삐를 쥐었다. 이제 마차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리세트 하리펜을 내려 준 곳을 지나올 때는 꽉 다물린 턱에 지그시 힘이 실렸다. 낡은 주머니를 움켜쥔 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요한은 숲 길목에서 대기하라는 명을 남기고 홀로 숲으로 들어왔다. 그 애가 남긴 표식을 찾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요한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가까이서 본 죽은 자들의 모습은 생각보다도 처참했다. 리세트 하리펜의 시선을 돌렸을 때 가슴 한편에 들어온 죄책감을 이제는 완전히 씻어 낼 수 있을 듯했다. 그 애가 보아서는 안 될 모습이었으므로.

땅을 깊게 파다 문득 고개를 들자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흙이 묻은 손으로 요한은 조심스럽게 시신을 모아 수습했다. 파 놓았던 흙을 다시 덮으려다가 요한은 낡은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분홍색 꽃잎을 만져 보는 손에는 긁히고 찢긴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다시 꽃잎을 넣고 끈을 꽉 조여 맨 후 요한은 시신과 함께 주머니를 묻었다.

무덤이 훼손되지 않게 최대한 땅을 평평하게 다지고 손으로 여러 번 눌렀다. 마침내 허리를 폈을 때는 이미 해가 산의 중턱에 걸친 채였다. 곧 밤이 내릴 테니 어서 숲을 빠져나가야 했다.

“거짓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마지막 인사를 남긴 요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굳이 나무 기둥을 살피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 흔적을 쫓아갔다. 시작점에서는 여러 번 줄을 그려 넣은 듯했지만 끝으로 갈수록 다급하게 한 줄을 그어 놓은 모양이었다. 고블린에게 쫓기는 통에 그게 최선이었을 테지.

그러다 문득 시선이 이끌린 곳에서 요한은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를 보았다. 낡은 주머니 안에서 본 것과 전혀 다른 꽃이라는 걸 안다. 꽃잎의 색과 모양뿐만 아니라 크기까지 달랐으니까.

지나쳐 가려던 요한은 잡초 사이에 홀로 우뚝 선 진한 분홍빛 들꽃을 꺾었다.

그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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