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축복이라 불렸던 소년
머리가 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코가 맵고 폐부가 조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런 느낌은 곧 사라졌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요한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변한 시야 안으로 지금은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버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술로만 간신히 속삭이자 아버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너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한 아버지는 품에 안고 있던 그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 주었다. 불에 타고 있는 저택에서부터 시작된 연기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요한은 멍한 얼굴로 저택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어머니와 노아 곁에서 함께 눈을 감았는데……. 어떻게 그 혼자 저택 밖에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 어머니와 노아가 저곳에 있다. 그러니 그도 당연히 두 사람 곁에 있어야만 했다.
답을 구하듯 아버지를 보았지만, 아버지의 눈길은 짧게 요한을 살펴본 후 떠나갔다. 어머니와 노아가 잠들어 있는 그곳으로, 파란 불에 삼켜진 거대한 저택으로.
“너는 델피니움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후계자가 될 거다.”
아버지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발걸음은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를 돌아 그를 본 아버지의 모습은 이제 불에 잡아먹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꺼져 가던 불길이 다시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별이 사라진 밤하늘처럼 새까만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요한은 움직이지 않는 손에 마력을 모아 봤지만 금방 흩어져 버렸다. 의식을 잡는 게 점점 힘이 들었다.
서서히 몸에 번지기 시작한 열이 한순간 요한의 의식을 뒤덮었다. 익숙한 힘이었다. 요한이 가진 마력과 똑같은 것. 누구의 것인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기울어져 가는 저택의 모습이 요한이 기억하는 그날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도 몸에 번지기 시작한 마력은 끊임없이 온몸으로 퍼져 들어왔다.
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요한이 가장 완벽한 델피니움가의 주인이 된 날이었다.
❖ ❖ ❖
축복이라 불리던 아이는 하루아침에 저주의 근원이 되어 있었다.
요한은 자신을 두고 하는 말들을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들 대부분이 사실이라 반박할 이유도 없었다.
저택의 불을 낸 건 요한 델피니움이다.
맞는 말이었다.
가족을 죽인 살인자.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계획적인 범행이다. 처음부터 영지로 갑작스럽게 내려온 이유도 어쩌면 일을 꾸미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마력이 고갈된 걸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느 것도 틀린 말이 없었다. 그 계획적인 범행에 유일한 오점, 그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만 제외하면.
장례식이 끝난 후 요한은 임시로 머무르고 있는 영지 별채의 방으로 들어갔다. 저택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작은 별채는 본래 사용인들의 공간이라 떠들썩했지만 지금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우두커니 문 앞에 서 있던 요한의 눈길이 흔들렸다. 샛노란 나비가 창문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을 굳게 닫아건 요한은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하늘로 날아오른 나비는 얼마간 별채를 떠돌다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계속 머물렀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하염없이 주변을 맴돌았다.
요한은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 커튼을 치고 몸을 돌렸다.
저택은 흔적도 없이 다 타 버렸다. 거대한 저택이 자리하던 부지는 잿더미가 쌓여 있을 뿐,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신을 수습할 길도 없었다. 그가 피워 낸 불길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으니.
책상 위에 올려놓은 상자가 눈에 띈 건 그 무렵이었다. 아버지를 따라온 집사가 건넨 그 상자를 향해 가는 발걸음 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무엇에라도 집중을 해야 했다. 무엇이든 좋았다. 이 깊은 침묵을, 버거운 무게가 짓누르는 것 같은 공기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았다.
마침내 상자를 열고 그 안에 담긴 걸 보았을 때 요한은 더욱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델피니움 가문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낡은 책 한 권. 가문의 비전 마법서라는 걸 몰라볼 수가 없었다. 지하실 바닥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이 가문의 문양 옆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읽고 싶지 않은데. 델피니움의 흔적이 묻은 것이라면 전부 없애 버리고 싶은데 이미 요한의 손은 책장을 펼쳐 들었다. 책을 힘껏 움켜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후계자를 만드는 방법.
책의 첫 장은 마치 물건을 만들어 내는 걸 설명하는 듯한 제목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델피니움의 마력으로 후계자를 잉태할 여자의 마력을 누른다. 각별한 주의가 따른다. 마법진의 형태가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여자는 죽는다. 마력을 전달할 매개체, 즉 후계자를 잉태할 여자의 몸 안 깊이 마법진을 새겨 넣는다. 또 다른 매개체도 추가로 얼마든지 지정할 수 있다. 마법진만 새겨 넣으면 된다.
이 모든 걸 완수하면 이후로는 마력을 잘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수 대에 걸쳐 내려온 마법진은 완벽하게 보완된 상태이니 그대로 사용하길 바란다.
임신한 여자의 몸에, 마법진을 새겨 넣은 그 부분에 마력을 주입한다. 처음에는 많은 부작용이 따랐지만 이제 델피니움의 주인이 될 아이는 더 이상 마력을 거부하지 않아 부작용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스스로 델피니움의 마력을 원하게 되었다.
모든 마력이 후계자에게 전달되면 계승에 성공한다.
그 말은 즉, 매개체들이 다 죽어야만 이 위대한 비전 마법이 완성되는 것이다.]
책을 찢어 버릴 듯이 움켜쥔 요한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구역질이 났다. 바닥에 주저앉아 가슴을 힘껏 쳐 보았지만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속을 게워 내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요한은 손끝에 닿은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아버지의 이름이 봉투의 하단에 남아 있었다.
무어라 써 놓았을지 궁금했다.
무슨 말이든 해 주었으면 했다.
책장을 펼쳤을 때와 달리 편지 봉투를 찢는 손길은 다급하고 거칠었다. 마침내 편지를 다 읽고 나자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내내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막을 새도 없이 흘러내렸다.
어머니와 노아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라는 당부가 담긴 편지가, 그가 영지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다 알고 있었다는 그 편지가, 형제에게 마력을 빼앗겨 평생 반쪽으로 살아야 했던 아버지의 인생사가 적혀 있는 바로 이 편지가 결국 요한은 무너트렸다.
부족한 마력을 채워 온전히 돌려준다는 말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정신없이 울며 바닥을 굴렀다. 처음으로 소리 내 울어 본 것 같다. 숨이 멈추었으면 좋겠는데 목을 잘라 버릴 듯 움켜쥐고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헉헉대며 숨을 들이마셨다.
전부 다 나 때문에 죽었는데. 나는…… 이 순간조차 살고 싶은 건가.
어느 때보다도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마력은 이제 요한의 몸 어느 한 곳도 다치게 하지 못했다. 몸에 해가 되는 짓을 하려는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흩어졌다.
모든 기력을 소진해 맥없이 늘어진 몸 위로 따스한 햇살이 내려왔다. 샛노란 나비도 함께였다.
무언가 이상해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창틀에 턱을 괸 남자가 보였다. 카에덴 델피니움이라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대단한 집념이야. 너나 반 델피니움이나 참 무섭단 말이지.”
저자가 아버지의 마력을 훔쳐 가지만 않았더라면.
그가 원해서 그 마력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런 진실조차 요한에게는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마음껏 미워해도 될 사람이 필요했다. 부당한 처사라는 생각은 저 남자가 입을 열자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죽을 거면 나한테 넘겨주지. 어쩌면 내가 살려 줄 수도 있었는데.”
“……누구를?”
“누구를 닮아 말이 짧은 나쁜 어린이네. 너의 어머니 말이야. 그 여자가 너를 품고 있을 때, 내가 제안을 했거든. 내 연구를 도와주면 살려 주겠다고. 실패할 확률이 많아 위험한 건 사실이었지만 어차피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거였다면 나를 도와주다 죽었으면 더 좋았겠지. 그랬다면 너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야.”
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볼일은 다 끝났다는 듯한 얼굴로, 조금은 아쉽다는 듯한 말투로 기분 나쁜 말을 속삭이고 사라졌다.
“나중에 네가 결혼을 해 후계자를 갖게 된다면, 그때는 나를 찾아와. 아마 그때쯤이면 내 연구도 완성이 되었을 것 같으니까. 특별히 도와줄게.”
기절하듯 잠이 들고 그다음 날이 되어서도, 영지를 떠나는 길에도 요한은 그 남자가 남긴 말을 계속해서 곱씹게 되었다.
후계자?
듣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불현듯 뇌리에 노아의 얼굴이 떠오른 건 그 무렵이었다. 비전 마법서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아버지는 시일 내로 어머니와 노아를 죽였겠지. 요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노아는 살고 싶지 않았을까.
삶에 의욕을 보이던 그 작은 아이가 떠오르자 눈앞이 핑 돌았다. 아버지에게 놀아나 성급한 결정을 내렸다는 판단이 문득 들어 가슴이 꽉 막혀 오기 시작했다.
함께 죽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지만 노아에게 몇 번이나 물어보지 않았나.
아픈 게 싫으냐고,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된다면 어떨 것 같으냐고 물었을 때 노아는 그렇게만 된다면 너무너무 행복할 것 같다 하였다. 요한은 이제 그 말만 떠올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두 사람을 구해 내려면 이것이 최선이었다는 자기 위안에 매달렸다.
기만이고 위선이었다.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서는 바람에 요한의 생각도 잠시 지워졌다.
창밖을 본 요한의 눈매가 가늘게 찌푸려졌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웬 여자애 하나가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애의 등 뒤로 고블린이 바짝 쫓아 붙었다.
마부가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요한은 먼저 밖으로 나갔다. 조금 빠르게 걷던 걸음은 인지하지 못한 새 달려가기 시작했다.
넘어지려는 그 애의 팔목을 잡아 뒤로 숨기며 요한은 정확히 고블린의 몸을 조준해 마력을 쏘아 보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몸부림치던 고블린의 머리가 땅에 처박혔고 곧 사지가 늘어졌다.
“도와주세요.”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요한은 고개를 돌렸다.
“제발 도와주세요.”
뒤엉킨 은발에 가려진 초록색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흙 묻은 손가락이 그의 뒤편에 펼쳐져 있는 넓은 숲을 가리켰다.
“저기에…… 우리 엄마 아빠가 있어요.”